163. 선택권은 없다
“하하. 정말 오랜만일세.”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아파트 근처의 한 카페.
오진원과 노 부회장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바쁠 텐데, 찾아와줘서 고맙네.”
노규일 前 부회장.
최 부회장 전에 미래기획실장이었으며, 그룹의 이인자였다.
차기 회장으로 오진원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다가 오 회장과 사이가 멀어졌고, 그로 인해 결국 은퇴까지 하게 되었다.
오너일가와 인연이 깊었고, 오진원과도 당연히 잘 아는 사이였다.
“근데, 어쩐 일인가? 그냥 커피나 마시자고 오진 않았을 것 같고.”
노 부회장을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그는 원로 중에서도 좌장 격이기에, 지혁을 회장 후보로 세우는데 그의 입장이 매우 중요했다.
“저희 아버지 다음 자리를 상의 하려고 왔는데요.”
노 부회장의 눈을 번쩍 떴다.
“정말?”
반가워하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완전히 생각을 접은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가운 소식인데?”
“······.”
“잘 생각했어~ 자네가 아버지와 형 생각하는 마음은 알지만, 선도그룹은 이제 개인 회사가 아니야.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 해.”
노 부회장은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앞서갔지만, 어쩌다 보니 오진원이 원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선도그룹은 개인 회사가 아니죠. 왕조도 아니고요.”
“그러게, 말일세······.”
노 부회장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오진원을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제 친척 동생 오지혁 아시죠?”
“······.”
“그룹 비서실장이요. 오지혁 전무.”
“알지······.”
노 부회장은 경험 많고, 눈치 빠른 사람이다.
오진원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도.
“최 부회장님과는 얘기 끝났어요.”
노 부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정말······ 괜찮겠나?”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반대는 안 하시네요.”
“반대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않나? 보아 하니, 상의하려고 온 게 아닌거 같구먼.”
오진원은 이 말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저도 좀 얘기를 들었는데, 부회장님께서도 지혁이와 만나 보신 거 같던데요?”
“······.”
“그 친구 괜찮지 않아요?”
노 부회장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괜찮지. 괜찮긴 하지만······.’
“쉽지 않을 텐데?”
“······.”
“오 부회장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오 회장이 수락해줄까?”
“······.”
“친자식인데도 장자가 아니라며,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던 사람인데.”
오진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래서 도와주셔야 해요.”
“······.”
“잘 부탁드립니다.”
노 부회장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오진원을 아끼지만, 지혁이 인물인 건 사실이었고.
오 부회장처럼 급진적인 사람에게 그룹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오진원은 노 부회장의 표정을 살피다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식사나······.”
윙-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고.
오진원은 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잠시만요.”
[실차장님, 아무래도 와주셔야겠네요. 비서실장이 똘끼 부리고 있어요.]
최 부회장에게 온 문자 메시지였다.
대화가 잘 안 풀리면, SOS 치라고 했었다.
오진원은 핸드폰을 안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
“부회장님, 아무래도 식사는 다음에 해야겠네요. 급한 일이 생겨서.”
“괜찮아~ 한창 일할 때니까.”
“······.”
“그리고 자네가 결정한 일이라면 난 따를 테니, 부디 올바르게만 가주게.”
오진원은 한껏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거 지금 협박이죠?”
“협박?! 그래! 협박이다! 왜!”
최 부회장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자네는 뭐만 하면 싸우려고 하나? 어?! 싸움닭이야? 요즘 싸울 일이 없으니까 이제 나랑 싸우려고?”
“하하. 참나.”
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 양반이 뭘 잘못 잡수셨나······ 왜 이렇게 흥분해?’
“딴 데서 뺨 맞고 지금 저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니에요?”
“뭐가 어째? 말버릇하고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요? 제가 알던 그 최 부회장님 맞아요?”
최 부회장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콧김을 뿜으며 소매를 걷었다.
“이 사람이?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네?!”
그래도 최 부회장은 교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지혁을 ‘야, 너’라고 부르진 않았다.
지혁은 눈빛을 쏘아내며 말했다.
“그럼, 대뜸 와서는 선택권은 없으니 회장 하라고 하고, 거부할 거면 퇴사하라는데.”
“······.”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최 부회장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참나, 내가 강등시킨대? 아니면 물류로 보내버린대? 기업 총수 하라고! 총수!”
“목소리 좀 낮추시죠.”
최 부회장은 뜨끔한 얼굴로 목소리를 죽였다.
“아, 어쨌든! 하라고! 좀!”
“하하.”
지혁은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로 웃었다.
‘환장하겠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야.’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냐?”
지혁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그게 누가 할 소리예요?”
“누구긴! 나지!”
최 부회장은 계속 몰아붙였다.
“선도그룹 아끼잖아! 그리고 자네 가족 회사 아닌가? 왜 모른 척하냐고.”
“······.”
“오진양이 한테 넘어가게 둘 거야? 뻔히 보이잖아. 자네도 그 심각성이 보이기에 오진원 찾으러 갔던 거잖아.”
“······.”
지혁은 감정을 낮추며, 가만히 들었고.
최 부회장도 목소리를 좀 죽였다.
“꿩대신닭이 아니라고.”
“······.”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야. 절대로. 오진원을 만나기 전에도 내가 자네한테 얘기한 적 있잖아.”
최 부회장은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더로 태어난 사람이, 그 의무를 저버리는 건 죄악이라고.”
“······.”
“갈 길이 험난할 거 같아서, 오진원을 설득했을 뿐······.”
지혁이 아무리 신임을 얻고 있어도, 오 회장의 친아들이 아니다.
최 부회장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처음부터 자네였어. 같은 조건이라면 무조건 자네였을 거야.”
지혁은 최 부회장의 눈을 바라봤다.
‘거짓말은 아니야. 하지만 난······.’
망설였다.
수락하기 힘들었다. 계속 망설여졌다.
덜컹!
그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뭐예요? 괜히 왔나?”
오진원이 웃으면서 들어왔다.
***
지혁과 최 부회장은 오진원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진원 또한 웃으며 인사했다.
“두 분 좀 앉으시죠? 왜 소파 놔두고 서서 대화 중이죠?”
그는 부드럽게 말했고, 최 부회장과 지혁은 뻘쭘하게 앉았다.
“얘기를 어떻게 했길래, 밖이 난리예요?”
“네?”
최 부회장이 반문하자, 오진원이 말했다.
“미래기획실 직원들 다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부회장실 주변에 몰려 있던데요?”
“······.”
“아무리 중요한 얘기를 하셔도, 직원들 동요시키면 안 되죠.”
“죄송합니다. 얘기하다 보니까 목소리가 좀······.”
오진원은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아.”
“네.”
“너 혹시 부회장님께 버릇없게 군 거 아니지?”
알면서 물어보는 거였다.
“우리 조심하자.”
“······네.”
지혁은 이상하게 오진원에게는 꼼짝 못 하게 된다. 아무래도 ‘형’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오진원이 말했다.
“자, 이제 숨 좀 골랐으면 얘기 좀 할까?”
“······.”
“지혁아, 부회장님께 얘기 다 들었을텐데. 그거 다 나와 상의 끝난거야.”
“······.”
“네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는 거······ 이해는 해. 근데 어차피 목적은 같지 않니?”
오진원은 지혁의 손 등 위에 손을 올렸고. 지혁은 움찔했다.
“진양 형님이 회장 못 되게 하고, 선도그룹을 번창시키기 위한 거잖아.”
“······.”
“그거면 됐잖아.”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지랄하고 싶은데, 오진원에겐 그럴 수 없었다.
지혁은 목소리를 약간 높여서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어딨어요?”
“······.”
“지금 알려주고, 결정하라고요?”
“아니.”
오진원은 싸한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라고.”
지혁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오진원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주 부드럽고 평안한 미소로 말이다.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그는 최 부회장을 향해 물었다.
“이 얘기는 안 하셨어요?”
“했죠. 내가 말할 때는 난리 치더니, 실차장님이 말씀하니까 가만히 있네요.”
“하하. 그거야. 알고 있는 얘기를 다시 해서 그런 거겠죠.”
지혁은 생각했다.
‘아주 작정했구나. 배수의 진을 쳤네.’
두 사람은 지혁에게 약간의 여유도 주지 않으려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사람에게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진정성은 알겠어.’
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 생각했다.
‘선도그룹의 회장. 회장이라······.’
이와 비슷한 일이 ‘그 세계’에서도 있었다.
모두가 지혁에게 영감님 뒤를 이어 ‘캡틴’이 되어달라고 했지만.
결국엔 거절했었다.
깜냥이 안 된다며,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왜 중요한 순간에 난 꼭 망설이는 걸까.’
많은 사람을 책임진다는 것.
‘책임’이라는 단어에 벌벌 떠는 회사원들을 우습게 봤지만.
책임의 그릇이 다를 뿐. 지혁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그 세계'에서 교전 중 꼬마 아이를 잃은 이후로, 누군가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걸 피해왔던 것이다.
‘피하면 안 되는 일일 수도······.’
“지혁아······.”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자, 오진원이 그의 이름을 불렀고.
지혁은 한 손을 살짝 들었다.
“알았어요.”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알았다고요.”
***
지혁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고.
오진원과 최 부회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최 부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수락한 거야?”
“뭐예요. 저한테 선택권 없다면서요.”
“아니······ 그래도.”
선택권이 왜 없겠는가. 안 하겠다고 하면 그만이지.
지혁의 성향을 고려한 두 사람의 전략이었다.
어쨌든, 지혁은 결정한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뭐······ 회장? 해 볼게요.”
최 부회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오진원은 빙그레 웃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합니다. 제 스타일 아시죠?”
옆에서 지켜봐 와서 안다. 지혁은 한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해 낸다.
아주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니까.
지혁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든든한 미소를 지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오진원은 귀를 쫑긋했다.
‘조건?’
최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오지혁이 순순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어쨌든 수락했다는 게 중요하기에, 최 부회장은 편안한 얼굴로 지혁의 입을 바라봤는데······.
“진원 형님.”
“응?”
지혁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오진원은 살짝 놀랐다.
“제 밑에 있으세요.”
“······뭐?”
오진원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지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디 갈 생각하지 마시고, 제 밑에 있으라고요.”
“······.”
“옆에 말고 밑에.”
지혁은 오진원을 뚫어지게 보았다.
1만 명이 보인 간담회에서.
강 전무를 찍어누르던 그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혹시 저한테 넘기고, 딴 데 갈 생각 했던 건 아니죠?”
꿀꺽.
오진원은 아차 싶었지만.
최 부회장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오지혁 잘한다.’
오진원은 평소 모습답지 않게, 약간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 언제까지?”
지혁은 바로 대답했다.
“제가 허락할 때까지.”
“······.”
“제가 괜찮다고 할때까지, 선도그룹에서 제 밑에 있습니다.”
지혁은 오진원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높게 평가했으며, 필요했다.
‘하여간, 고단수야.’
이젠 오진원에게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다고 해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