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잠식 (1)
지혁은 이틀간 연차를 내고, 집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한번 결심한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전투에 임하기로 했으면 어떻게 이길 건지만 생각한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일격에 끝낼 수 있는 묘수는 없었다.
오 회장은 오 부회장의 후계를 위해.
외부인이 경영권에 관여할 수 없도록 지분의 집중과 분산 등 많은 준비를 해왔다.
‘어쩔 수 없는 건 더 생각할 필요 없어.’
외부의 힘으로 회장 자리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어렵더라도 방법은 단 하나였다.
연차 휴가 마지막 날 밤.
지혁은 최 부회장과 오진원을 서울의 모처로 불렀다.
방갈로 형태로 테이블이 구분된 식당이었으며,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야.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대.”
“인터넷 뒤지면 다 나옵니다.”
먼저 와 있던 지혁은 웃으며 최 부회장과 오진원을 맞았다.
오진원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생각은 잘 정리했니?”
“······.”
“너 쉬려고 연차 쓴 거 아니잖아.”
오진원은 한동안 지혁과 함께 다니면서 그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분명 이틀 동안 ‘회장이 되기 위한’ 전략을 구상했을 거로 생각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세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식사했다.
음식이 반 정도 비웠을 때쯤.
“달리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운을 띄었고.
최 부회장과 오진원은 그의 얘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선도그룹은 선도물산, 선도생명, 선도전자 순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구조고. 지주회사 격인 선도물산의 지분은 오 부회장이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던데요? 오 회장님 지분도 만만치 않고요.”
“······.”
“그 외에도 뭐 여러 장치를 해 놓으셨더라고요. 오 회장님과 오 부회장의 뜻대로만 될 수 있도록요.”
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십 년도 넘게 준비해 온 일인걸. 외부 세력에 의해 절대로 경영권이 흔들릴 수 없도록 말이야.”
“어려운 길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방법은 하나겠더라고요.”
“······.”
“회장님 마음을 돌려야죠.”
***
“그것도 돌아가시기 전에 해야겠지.”
뻔한 결론이었기에 최 부회장은 놀라지 않았다.
“맞아요. 지금 연세가 많으신데, 돌아가시면 끝이죠.”
오진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 같아도, 건강이 좋진 않으셔서.”
지혁이 이 말에 대답했다.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지혁은 비서실장이니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오 회장은 여러 지병이 있지만, 거동이 가능할 때는 어떻게든 회사 일을 돌보려 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며, 놀면 뭐 하나?’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수시로 링거 꽂고, 하루가 멀다 않고 진찰받으며 건강 체크를 했지만,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최 부회장은 빨리 본론을 듣고 싶었다.
“이 뻔한 사실을 자각하느라 이틀을 보낸 건 아니지?”
피식.
지혁은 웃었다.
“회장님을 설득하여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장자 후계에 대한 강박감이 심해 보이셔서요.”
“······.”
“그래서 대전략은,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겁니다.”
두 남자는 눈을 빛내며 지혁의 말에 집중했다.
“예를 들어, 한증막을 아무리 좋아해도, 못 견디게 뜨거우면 결국 밖으로 나오겠죠. 뭐, 그런 방식으로요.”
오진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지혁은 싱긋 웃고는 말했다.
“단순합니다. 세력을 끌어모으고, 환경을 만들어야죠. 누가 봐도 선도그룹 회장은 제가 될 수밖에 없게끔요.”
“······.”
“기본적으로 이 회사를 아끼는 분이니, 너무 확실한 대세라면 따르실 거라고 봅니다.”
지혁은 순간 무서운 눈빛을 쏘았다.
“그렇지 않으면, 가진 걸 다 잃게 될 테니까요.”
오진원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옳은 길이라 생각하지만, 내 손으로 집에 강도를 들인 건 아니겠지.’
지혁이 이어서 말했다.
“우선 형제들부터 내 편으로 끌어올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 편이 아니라 내 편으로입니다.”
“······.”
“지금부터 모든 관심과 기대는 저에게 집중되어야 해요. 분산되면 안 됩니다.”
이건 오진원에 대한 경고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선 끌지 말고 죽어지내라는 거였다.
“형제들의 지지를 끌어내는데, 진원 형님이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요. 형제들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니까요.”
오진원은 심각한 얼굴로 지혁의 말을 들었다.
“우선, 혜빈 누나부터 만날 건데요.”
최 부회장이 물었다.
“각개 전투로 가는 거야?”
“네, 안 좋은 분위기로 휩쓸려 갈 수도 있으니까요. 부정적인 건 옆에서 장작 때면 금방 타오르거든요.”
지혁은 오진원을 향해 자연스럽게 말했다.
“형님, 약속 좀 잡아줄래요? 가능한 이른 날짜로.”
“······.”
부드럽게 말했지만.
이것 분명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지시’였다.
최 부회장과 오진원 둘 다 이를 모를 리 없었고.
최 부회장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포지션이 바뀌었어. 어쩔 수 없지. 오진원이 선택한 거니까.’
최 부회장은 이런 상황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두고 볼 수밖에 없었고.
오진원도 사람인지라, 순간 표정이 굳어졌지만.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알았어. 이번 주 내로 잡아볼게.”
“네, 고마워요.”
“근데, 지혁아.”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족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아다오.”
지혁은 무심한 얼굴로 오진원을 보다가.
씁쓸한 미소로 대꾸했다.
“제 가족이기도 해요.”
***
“오빠~”
이틀 뒤.
상큼한 레몬색 치마를 입은 오혜빈은 양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레스토랑에 앉아 있던 오진원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오혜빈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야? 바쁘다고 아는 척도 안 하더니?”
“미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지. 왜 이렇게 오래 있니?”
오혜빈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 오래 있어서 불만이야?”
“하하, 무슨 소리야~ 이쁜 동생 볼 수 있어서 좋은데.”
“치. 연락도 안 하면서.”
그러면서 오진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빠, 어디 봐?”
“어, 올 사람이 있는데.”
“응?”
그때 레스토랑 입구 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진원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혜빈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고, 오진원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보았다.
‘지혁이잖아?’
막내 친척 동생을 일어서서 맞이하는 오진원의 태도가 의아했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 어서 와. 너도 오는 줄 몰랐었네?”
“아, 형님이 얘기 안 하셨어요?”
오진원은 웃으며 말했다.
“그냥 형제끼리 보는 거라 굳이 얘긴 안 했는데.”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래도 일로 만나는 건, 얘기를 해주셔야죠.”
오진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하하. 알았어. 다음부턴 그래야겠다.”
오혜빈은 이상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분위기 왜 이래? 회사에서도 직급은 오빠가 더 높지 않나?’
이상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는데.
잠시 후.
대화를 나누다가 오혜빈은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풉! 뭐라고?!”
물 마시다가 사레가 들었다.
그만큼 오진원의 말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들은 대로야. 지혁이를 밀어주려는데, 도와줬으면 해.”
“왜?!”
지혁이 바로 옆에 있었으나, 너무 놀라서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적임자니까.”
“······.”
오혜빈은 놀라서 얼이 빠져버렸다.
‘미친 거 아니야?’
“큰형은 아니잖아. 그건 너도 동감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오혜빈은 이제야 지혁의 눈치를 한번 봤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원 오빠는? 오빠는 뭐하고?”
“난 지혁이를 돕기로 했어.”
“미치겠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오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너 지혁이 잘 모르잖아.”
지혁이 바로 옆에 있으니, 편하게 말은 못 하겠고. 오혜빈은 미칠 노릇이었다.
‘얘는 친척 동생이잖아!’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오진원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지혁은 그들의 친동생이 아니며, 오 회장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근데도, 지혁이를 밀겠다는 거잖아?’
오혜빈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오진원이 다시 한번 말했다.
“혜빈아, 오빠 믿고 가자. 아버지와 우리 가족. 그리고 그룹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 선택이 맞아. 난 확신해.”
“······.”
오혜빈은 넋 놓고 있다가, 지혁을 돌아보았다.
“야,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도와주세요. 잘해드릴게요.”
“······.”
“그룹에서 원하는 자리도 약속드릴 수 있어요.”
당당하면서도 차가운 말.
신기하게도 지혁의 이런 대답을 들으니, 오혜빈의 놀란 마음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진짜구나. 그냥 꺼낸 말이 아니야.’
그녀 또한 오 회장의 딸이었고, 형제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상황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
[사랑산성에서 8시 20분에 만나.]
지혁은 오혜진으로 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혜빈을 어제 만났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결정한 일에 대해선 망설이지 않는다.’
지혁은 오늘 곧바로 오혜진을 만나기로 했다.
이번엔 오진원 없이 혼자 왔다.
오혜진을 만나기엔 혼자가 더 유리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똑.
지혁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났고.
덜컹.
문을 열자.
“오~ 한 전무님.”
예상대로 한 전무도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지혁은 오혜진에게도 인사했다.
“누나, 저 왔어요.”
“호호. 너도 참, 넉살이 대단해. 누나라는 말이 그렇게 술술 나오니?”
“누나 맞잖아요. 사적인 자리기도 하고.”
지혁은 앉으며 말했고.
오혜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말 사적인 자리야? 일 얘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하하. 뭐. 겸사겸사죠.”
오혜진은 웃으며 물었다.
“한 전무님같이 계셔도 괜찮지?”
“그럼요. 전무님 없으면 누난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하하.”
“······.”
지혁은 웃으며 뼈있는 농담을 건넸고, 오혜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음식을 내왔고.
지혁은 감탄하며 먹었다.
“와~ 여긴 메뉴가 항상 같은데도 맛있어요.”
“많이 먹으렴.”
“누나 단골집만 아니면, 저도 여기서 비밀 회동 좀 갖고 싶은데.”
“······.”
오혜진은 또 한 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보고 여기 이용하지 말라는 소리야?’
시작부터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난번 오 회장 댁에서의 형제 모임부터.
이상하게도 오혜진은 지혁에게 꼼짝하지 못했고, 지혁 또한 그걸 느끼고 있었다.
‘둘째 누나는 끝났어.’
사람에게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누가 우위인지 질서가 정해지면,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오진원을 부르지 않고 혼자 왔다.
“누나,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요.”
“응.”
“무조건 따라주셔야 해요.”
“뭐?”
오혜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뭐라는 거니? 얘기도 듣기 전에 무조건 따르라고?”
지혁은 싸한 눈빛으로 오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 있으면 안 따르셔도 되고요.”
“······.”
오혜진은 지혁을 눈을 마주하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