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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65화 (165/301)

165. 잠식 (2)

옆에서 잠자코 듣던 한 전무가 말했다.

“비서실장님, 일단 말씀해보시죠. 회사 일인데, 설마 저희가 비서실장님 말씀을 안 따르겠습니까?”

지혁은 낯선 기분이 들어서 물었다.

“거리감 느껴지네요? 하던 대로 하시죠.”

한 전무는 윗사람이자 선배로서 지혁을 대했었고, 지혁 또한 그를 어른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그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어색했다.

한 전무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죠. 회사로 이어진 사인데.”

지혁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이에 대해선 더 권하지 않고, 오혜진을 불렀다.

“네, 그럼 말씀드릴게요.”

지혁은 오혜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그녀는 눈을 들어 지혁을 마주했다.

“제가 선도그룹 회장을 해보려 합니다.”

.

.

.

“뭐?”

오혜진은 놀라지 않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종건 회장님 뒤를 이어, 회장을 해보려 하거든요.”

이제야 자각이 된 듯.

오혜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 무슨 미친 소리야.’

한 전무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오혜진과 한 전무.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향해 오랜 시간 함께 해왔다. 오혜진을 그룹 총수로 세우겠다는 목표 말이다.

근데, 웬 생각지도 못한 남자가 나타나서 회사를 장악해가더니.

어느 순간 친척 동생이 되어 버렸고.

이젠 선도그룹의 총수를 하겠단다.

‘이건 아니야.’

오혜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혁을 인정하며, 그를 어려워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년간 목표했던 일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혜진이 뭔가 말하려는데.

“대세는 이미 기울었어요.”

지혁은 그녀가 말을 못 하게 막았다.

“진양 형님 아니면 저예요.”

“······.”

“그 외의 다른 사람은 조금도 가망이 없어요.”

오혜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진원 형님과 최 부회장님이 절 밀어주고 있거든요.”

“?!”

회장이 되겠다고 말했을 때보다, 오혜진은 더 놀랐다.

‘말도 안 돼······.’

선도그룹에서 오 부회장을 제외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두 사람이 지혁을 지지한다는 얘기.

그게 사실이라면, 지혁이 회장이 되겠다는 건 결코 허무맹랑한 게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오혜진과 한 전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언제 이렇게 된 거야?’

어느새인가 바뀌어 버린 판세. 오혜진은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오 부회장 다음의 완벽한 이인자였다.

밀리고 밀리더니, 이젠 들러리가 되어 버렸다.

“불나방은 타죽을 걸 모르고 불빛에 달려들잖아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타죽을 걸 아는데도 달려드는 건······ 불나방보다도 못한 거겠죠.”

오혜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혁이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에 미련 갖지 말고.”

“······.”

“지금은 빨리 노선 정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봐요.”

“······.”

“잘 아시잖아요. 누님은 똑똑하시니까.”

***

사랑산성의 4번 방.

정적이 흘렀고.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천천히 올게요.”

그렇게 말을 흘리며 나갔다.

얘기할 시간을 주겠다는 거였다.

오혜진은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시간을 주면 지혁이 원하는 선택을 할 거로 생각했다.

덜컹.

“후유······.”

지혁이 나가자마자, 한 전무는 한숨을 쉬었다.

“직급이 달라져도 변함이 없네요. 저 사람은······.”

“······.”

오혜진은 대답 안 하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전무님.”

한 전무를 불렀다.

“네.”

“이거······ 끝난 거죠?”

알면서 물어보는 거였다.

확실히 자각하기 위해서.

오 부회장의 입지는 그의 뒤에 오 회장이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오진원과 최 부회장이 지혁의 뒤에 있다면, 그의 입지 또한 확실하다.

양강 체제.

그 외에 다른 세력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아쉽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도대체 왜······.”

오진원과 최 부회장을 얘기하는 거였다.

‘진원이랑 함께 세력을 키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다 싶어서, 오진원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켰는데.

[누나~ 지혁이 잘 만났어요? 팍팍 좀 밀어주세요~]

전화 걸 것도 없었다. 오진원에게 이미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하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진짜였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어느 쪽에 서느냐밖에 없는 거야?’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바뀌었다.

“전무님 생각엔 어느 쪽이에요?”

“······.”

“지혁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을까요?”

“네.”

한 전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혜진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왜요?”

“간단하죠. 이런 제안은 비서실장만 하지 않았습니까?”

“······.”

“오 부회장이 저희 쪽에 손을 내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지혁이가 준비하고 있는 걸 알면, 오빠도 손을 뻗을 텐데요.”

한 전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등 떠밀려서 손 내미는 거죠.”

“······.”

“상황에 밀려 잡은 손은 언제든 다시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전무가 지혁을 택해야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서실장은 다릅니다.”

“······.”

“선도물산에 계실 때, 제가 같이 일하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봐왔잖아요.”

한 전무의 눈이 빛났다.

“비서실장이 그룹 총수가 될 수 있을지. 그건 제가 감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혜진은 한 전무의 입을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 강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

“절대로 그의 반대편에 서면 안 됩니다.”

“······.”

“비서실장과는 적이 되면 안 돼요. 절대로.”

오혜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

“그건 저도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는 바니까.”

***

덜컹.

“오래 걸렸죠?”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칠 때쯤, 지혁이 들어왔다.

한 전무는 불편한 얼굴로 생각했다.

‘밖에서 듣고 있던 건 아니겠지. 타이밍이 너무······.’

그는 지혁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잘 알기에, 이런 의심을 가질 만했다.

지혁은 음식을 한 입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할까요?”

오혜진은 약간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목소리를 내었다.

“지지할게.”

지혁은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오혜진은 눈을 부릅뜨고 지혁을 바라봤다.

“너 꼭 되어야 해.”

“······.”

“이렇게 대놓고 지지했는데, 진양 오빠가 총수 되어 버리면······.”

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얘기를 막고 말했다.

“최선을 다할게요. 이건 저 혼자만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서, 그 정도까지밖에 말씀 못 드리겠네요.”

“······.”

“하지만, 베팅한 만큼 많은 걸 돌려받게 될 거라는 건 약속드릴게요.”

“······.”

“전 약속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한 전무님?”

한 전무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럼요. 그건 확실하시죠.”

선도물산을 떠났던 사람이 유 본부장과의 약속을 지킨다며, 직접 방문하여 그의 자리를 원복시켰었다.

그 외에도 지혁은 자신의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었다.

“그럼, 한배를 타기로 했으니.”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한 전무를 불렀다.

“한 전무님.”

“네.”

“선도물산을 완벽히 장악해 주세요.”

“······.”

“오랫동안 누님 지시로 잠식해 오셨잖아요?”

“······.”

“신임 대표 눈치 보지 마시고, 더 마음껏 장악해 주세요. 요직은 싹 다 한 전무님 사람으로 바꾸시고, 대표 권한도 가져올 수 있는 건, 다 가져오시고요.”

한 전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까지요?”

“네, 유 본부장님이 지원사격 할 거니까. 광폭 행보 해주시면 됩니다.”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유 본부장을 언제 자기 사람으로 만든 거야? 둘이 불편한 사이 아니었어?’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혁에게는 방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 순간이었다.

한 전무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대표가 오 부회장님 사람인데, 그렇게 너무 티 나게 해도 될까요? 제재 들어올 텐데.”

“그게 바라는 겁니다.”

“······.”

“적의 심장을 압박해서, 무리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

“실수가 승리를 만듭니다. 너무 거대한 적은 그렇게 접근해야 해요. 우린 그 틈을 비집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고요.”

오혜진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생각했다.

‘무슨 군사작전 하듯이 말하네.’

지혁은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했다.

“과감하게요. 아셨죠?”

한 전무는 오혜진의 눈치를 보았고.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굳은 얼굴로 지혁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시간이 흘렀다.

한 전무는 지혁의 지침을 잘 수행했다.

이미 선도물산을 어느 정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 지침을 따르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선도물산의 대표는 ‘식물 대표’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화초가 되어 버렸고.

한 전무와 유 본부장의 콜라보로, 선도물산은 오 부회장의 손아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주식 지분도 중요하지만. 영향력이라는 게 있다.

오 부회장은 선도그룹의 지주회사인 선도물산에 대한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똑똑.

“들어오세요.”

지원팀장. 장남일 이사가 비서실장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거기 앉으세요.”

“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원팀장 맞은 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잘하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눈치 못 채고 있습니다.”

지원팀장은 원래 오 부회장의 사람이다.

고 차장으로부터 지원팀장이 지혁에게 호감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 접근을 해봤는데.

어렵지 않게 넘어왔다.

지금 지원팀장은 이중 첩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딴생각하시면 큰일 나십니다.”

“······.”

지혁은 중간중간 단도리를 했다. 그가 다시 마음을 바꿀까 봐 말이다.

“아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비서실장님과 고 차장을 경험했는데······ 그럴 수가 없죠. 하하.”

지혁은 자세를 고쳐잡고 물었다.

“뭐, 소식 있습니까?”

지원팀장은 목소리를 죽였다.

“오 부회장님 관련하여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요?”

지혁은 얼굴이 가까이하고, 목소리 더 낮추어 말했다.

“말씀해보세요.”

“네, 얼마 전에 오 부회장이 선도전자 청주 공장에 현장 지도를 갔었는데요.”

“네.”

“큰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지혁의 눈이 커졌다.

‘큰 실수?’

동물적인 감이 왔다.

‘기회가 온 건가?’

“무엇에 대한 실수입니까?”

“근로자들이 들고일어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지혁은 의아했다.

‘그걸 여기서 모를 수가 없는데. 미래기획실에서도 보고 들어온 건도 없었고.’

지혁의 의구심을 지원팀장은 바로 해소해주었다.

“오 부회장이 실수를 감추기 위해, 틀어막고 있다고 합니다.”

“아······.”

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누구든 갖고 있는 핸드폰으로 카메라, 녹음, 영상이 가능한 시대다.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으나.

실수를 숨기는 것.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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