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68화 (168/301)

168. 어느새 (1)

선도그룹 중역 회의.

반기에 한 번 선도본관에 각 관계사 대표와 미래기획실 팀장급 이상이 모인다.

회장이 주관하는 몇 안 되는 회의 중 하나인데, 그룹의 주요사안과 미래에 대해 논한다.

선도그룹 관계사 대표급이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쓸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다.

중요한 일을 논하는 자리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오 회장 및 다른 관계사의 대표들과 얼굴을 익히는 만남의 자리의 역할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 회장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중역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정 가운데 자리로 갔고.

바로 옆자리에 오 부회장이 있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흠!”

오 회장은 헛기침하고, 그의 인사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 부회장이 아무리 아들이라도, 나이가 오십이 다 되었으며 그룹의 이인자인 선도전자 부회장이다.

영상을 본 후, 당장이라도 불러서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정도면 오 부회장도 알 것이며, 좀 지켜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꼴 보기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가.’

오 부회장은 오 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시위자들과 실랑이하는 영상이 너튜브에 떴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조치를 취했으니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특히, 오 회장이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오 부회장은 사회자석에 있는 미래기획실 전략팀장에게 말했다.

“어서 시작하세요. 회장님도 오셨는데.”

“아직 비서실장님이 안 오셔서요.”

“비서실장?”

오 부회장이 인상을 찡그리자, 오 회장이 대신 말했다.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5분 정도 늦는다더라.”

비서실장에게 미리 보고받아서 오 회장은 알고 있었다.

“그까지 걸 뭘 기다리세요. 있는 사람끼리 하면 되지.”

“미래기획실장, 실차장도 같이 늦거든.”

그러고 보니, 최 부회장과 오진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다려야겠네. 근데······.’

오 부회장은 사회자석에 있는 전략팀장을 바라봤다.

‘저 양반은 부재중인 인원 중에 가장 직급이 높은 최 부회장을 얘기해야지. 왜 오지혁을 들먹거려.’

그때였다.

[비서실장님 입장하십니다.]

대회의실 문이 열리고.

성큼성큼.

지혁이 앞장서서 걸어왔다.

그리고 그의 양 뒤쪽에 최 부회장과 오진원이 따라서 걸어왔는데.

선도그룹의 실권자.

세 남자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은 위풍당당했으며.

풍기는 아우라가 굉장했다.

오 부회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이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뭐지?’

최 부회장과 오진원이 지혁을 받치듯 뒤에 서 있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눈에 거슬렸다.

그 모습이 신경 쓰인 건 오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이상했던 건.

-비서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관계사 대표 대부분이 지혁의 입장과 함께 기립하며 인사했다는 것이다.

오 회장이 들어왔을 때의 풍경과 사뭇 비슷했다.

‘나 들어올 때는 저 정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오 부회장은 들어올 때 관계사 대표들로부터 이 정도만큼의 환대는 받지 못했다.

이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왠지 배알이 꼬였다.

“회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혁의 인사말에, 오 회장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고.

바로 옆자리의 오 부회장을 향해서도 인사했다.

“부회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최 부회장이 오 회장 바로 옆자리에 앉았고.

그 옆으로 오진원, 지혁 순으로 앉았다.

그제야 일어서 있던 관계사 대표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중역 회의는 시작되었고.

사회자인 미래기획실 전략팀장은 그룹의 현황과 이슈에 대해 보고했다.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갔고.

어느덧 중역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토의 시간이 되었다.

“이상 보고 마칩니다. 지금부터 그룹 주요 의사결정 사항에 대해 의견 듣는 시간 갖겠습니다.”

오 회장은 경청을 중시하는 만큼, 소통도 굉장히 중요시한다.

토의 시간을 통해, 각 관계사 대표들이 어떤 생각과 통찰력을 가졌는지 관찰하기 때문에.

각 관계사 대표들은 눈에 불을 켜고, 토의에 참여한다.

전략팀장이 주제를 던지면 난상 토론하는 방식으로 회의는 진행되었고.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런데, 지혁은 한마디도 안 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그 또한 관계사 대표들이 의견, 경청하는 모습 등을 관찰 중이었다.

관계사 대표들은 오 회장 못지않게 그런 지혁의 눈치도 보고 있었고.

오 부회장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마음에 안 들어.’

난상토론이 어느 정도 끝났을 무렵.

전략팀장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습니다. 미래기획실에서도 오늘 중역 회의 직전에 인폼 받은 건데요. 2주 뒤에 피치사 톰 쿡 최고경영자께서 국내 방문 예정이라고 연락받았습니다.”

‘피치사’라는 말에 선도그룹의 모든 중역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선도전자를 견학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외부 노출이 가능한 부분에 한해서 스케줄을 조율하려 합니다. 선도전자에서는 협조 부탁드립니다.”

“네, 그렇게 하죠.”

오 부회장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한국 방문 일정 중 이틀을 선도그룹과 함께하고 싶다는데, 에스코트를 요청해 왔습니다.”

오 부회장은 짓이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에스코트입니까? 우리가 갈 때는 회의실에서도 못 기다리게 했는데.”

“······.”

“그냥 알아서 다니라고 하세요.”

피식.

회의 시작 후,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지혁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고, 지금은 평화 협정 맺은 상황이잖아요. 다르죠.”

지혁은 오 부회장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피치사에 대접받고 싶으면, 지금 미국 가보세요. 잘해줄 겁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빴다.

그리고 겨우 두 마디 했는데.

그 무게감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지혁이 입을 여는 순간부터 관계사 대표들이 초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오 부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거슬리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

오 부회장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미국 한번 가봐야겠네.”

“······.”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고, 전략팀장은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진행했다.

“톰 쿡이 입국할 때, 우리 회사에서도 그에 걸맞은 인사가 마중을 나가주는 게······.”

말이 끝나기 전에 오 부회장이 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내가 가면 되잖아요? 피치사 대표가 왔는데, 선도전자 대표가 가야죠.”

“······.”

“잘 지내보자고 오는 건데. 통 크게 제가 마중 나가서, 안 좋았던 일 풀고 할 테니까요.”

오 회장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전략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와 관련해서 피치사 요청사항이 있었습니다.”

“요청사항?”

오 부회장이 묻자, 전략팀장이 말했다.

“공항에 대표님께서 오시는 건 부담스럽다고 하시면서요. 비서실장님이 와주시길 특별 요청했습니다.”

“뭐? 누구?!”

오 부회장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톰 쿡은 겉은 부드럽지만, 아주 계산적이며 냉정한 사람이다.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으나.

그의 상대로 오 부회장이 아닌 지혁을 지목한 거였고.

이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

“그걸 왜 피치사가 정하죠?”

“네, 그래서 정중하게 요청이 왔습니다.”

“······.”

“그렇게 명확하게 지목하신 거로 봤을 때는 톰 쿡 사장님이 비서실장님과 시간을 갖고 싶으셔서······.”

오 부회장은 결국 흥분하고 말았다.

“아니, 그러면 왜 선도그룹에 연락하냐고요. 오지혁이한테 직접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지.”

“······.”

“이 사람들이 또 우릴 갖고 놀려고 하네?”

오 회장이 말했다.

“오 부회장. 목소리 좀 낮춰.”

“······.”

오 부회장이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다물자, 오 회장이 말했다.

“회사 대 회사의 만남이고. 그들의 희망 사항을 그대로 받아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네.”

“······.”

“이건 논의해서 결정하기로 하지. 그래도 피치사는 신경을 좀 써줘야 하니까.”

전략팀장을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의견 있으신 분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

회의실엔 정적이 흘렀다.

감히 오 부회장과 지혁을 대상으로 의견을 개진할 관계사 대표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 회장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톰 쿡이 직접 지명했으며, 전략팀장이 명분을 설명했음에도 오 회장이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건.

오 부회장이 톰 쿡을 상대하는 거로 의견을 내달라는 거였다.

“아무도 말씀을 안 하시니 제가 한 말씀 드릴까요?”

최 부회장이 손을 들었다.

“그냥 공항 마중일 뿐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거든요. 비서실장이 그룹을 대표하는 성격도 있고, 직급도 전무니까.”

오 회장은 황당한 눈으로 최 부회장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최 부회장이 한마디 한다고 하니, 오 회장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 한 동료이기에 오 회장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오 회장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의견을 내고 있었다.

“선물은 상대방이 원하는 걸 해줘야죠. 내가 하고 싶은 선물을 하는 게 아니라.”

오 부회장 또한 당황하여 최 부회장에게 말했다.

“부회장님!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난 원치 않는 선물이란 말입니까?”

그때, 오진원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섰다.

“부회장님~ 소리 안 질러도 말 잘 들려요~”

“······.”

“그룹의 부회장이 공항까지 마중 나간다는 게 좀 그렇지 않아요?”

“뭐?”

“그냥 지혁이······ 아니, 비서실장에게 맡기세요.”

“단순한 마중이 아니잖아!”

오진원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웃고 말았고.

그룹의 최고 실력자 두 사람이 지혁을 지지하고 나서니, 더 다른 의견은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오씨 일가.

오 부회장은 선도생명 사장 오혜진을 바라봤다.

“오 사장. 자넨 뭐 의견 없나?”

오 사장이라도 자기편을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물어본 거였으나.

“여러모로 보나, 비서실장이 나가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왜?!”

“······.”

그리고 오 사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오 부회장은 눈이 커져서 눈알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이 사람들이······.’

이러고 끝이었다.

더는 의견은 없었다.

오 회장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뭉쳐있어.’

방금 말한 세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 회장은 분명 느꼈다.

‘오지혁······ 너 대체.’

지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

결국 톰 쿡 한국 방문은 지혁이 상대하기로 했고.

회의를 마친 뒤, 회식 자리로 이어졌다.

반기 한 번의 중역 회의는 다 함께하는 회식으로 자리를 마친다.

“회장님 가시죠.”

지혁이 오 회장을 의전하기 위해 다가갔는데.

“아니야. 따로 갈게.”

“······.”

지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오 회장은 변명하듯 말했다.

“좀 쉬고 싶어서 그래. 먼저 가서 진행하고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지혁이 입구 쪽을 향해 걸음을 떼자, 오 회장은 오 부회장을 불렀다.

“부회장.”

“네.”

“나 좀 보자.”

오 회장은 오 부회장이 하는 일에 웬만해선 관여도 훈수도 두지 않았다.

일 끝나고 따로 보자고 하는 건 정말 드문 경우였다.

오 부회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오 회장을 바라봤는데.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뭐해? 어서 일어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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