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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71화 (171/301)

171. 존재감 (2)

오 부회장의 건배사 이후.

회식은 계속 이어졌다.

관계사 대표들은 여전히 지혁을 찬양하고.

최 부회장과 오진원은 옆에서 거들고.

오 부회장은 굳은 얼굴로 지혁이 주는 술만 받아 마시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 좀.”

오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잠시 후.

지혁이 따라 일어났다.

화장실 안.

덜컹.

“아이코! 깜짝이야.”

오진원은 손을 닦다가, 갑자기 나타난 지혁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뭘 그렇게 놀라요?”

지혁이 웃으며 말하자, 오진원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인기척이 없어. 인기척이.”

“······.”

“일부러 그러는 거니? 아니면 원래 그런 거니?”

“글쎄요?”

지혁은 피식 웃었고.

오진원은 미소 지으며 나가려는데.

“형님.”

지혁이 그를 불러세웠다.

“응?”

“아까 선도증권 건이요.”

“아······.”

지혁은 별말 하지 않았는데, 오진원은 변명하듯 말을 뱉어냈다.

“아까 했던 내가 했던 말이 사실이야. 내가 가서 뭐 한 거 없어. 봉사활동 경험담 얘기 좀 해준 거 말고 없는데. 왜 사람을 치켜세워서는 이렇게 난감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지혁은 형제들을 꽉 잡고 있었고.

오진원은 지혁을 동생이지만 상사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 얘기하려던 게 아니에요.”

“······.”

“아까, 제가 말을 좀 싸늘하게 했죠?”

“어?”

지혁은 오진원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 알죠? 지금은 제가 이럴 수밖에 없는 거.”

“······.”

“그때도 얘기했지만, 저한테 집중되어야 해요. 자리를 확실히 차지할 때까지는요.”

“어······ 그래.”

오진원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도대체가······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게 해.’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간혹, 좀 싸늘해도 이해해줘요. 다 전략이니까요.”

“······.”

오진원은 얼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갈까요? 오늘 형이랑 술 한 잔 못 했네요.”

지혁은 앞장서서 회식 자리로 갔고.

그 뒤를 따라가며 오진원은 생각했다.

‘그래도 온 김에 소변은 보고 가지.’

***

중역 회의가 끝난 후.

한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중역 회의는 수요일이었고, 주말까지 이틀이나 더 있었지만.

지혁은 한 주가 마무리된 기분이었다.

중역 회의부터 회식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머릿속에 그린 거였고, 본인이 생각한 상황과 분위기가 나오도록 굉장히 고심했었다.

그렇게 에너지 쏟은 일을 마치고 나니, 주말엔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고 싶었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

수아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지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응? 어. 오늘은 집에 있으려고.”

“그래?”

수아는 몸을 바싹 붙이며 눈짓을 보냈다.

“요즘 자기 너무 바쁘더라?”

“······.”

“나 요즘엔 안 이뻐 보여?”

은근슬쩍 신호를 보냈지만.

혈기 왕성한 지혁도 너무 피곤하니까 스킨쉽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도 당연히 이쁘지만, 내일은 미치도록 이뻐 보일 거 같아.”

다음을 기약하는 완곡한 거절의 뜻을 표했고.

“치.”

수아는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나중에 유명 인사가 되면 더 비싸게 굴 거 아니야?”

“하하.”

“하긴, 이미 유명 인사지.”

수아가 말하는 게 재밌어서 지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여자는 나이 들수록 육식동물이 되어간다더니. 진짜 그런가 봐?”

“뭐라고?”

“자꾸 날 잡아먹으려고 하잖아. 예전엔 피하더니.”

“어머.”

이 말에 수아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혁은 그녀를 꼭 안으며 말했다.

“좋다는 뜻이야.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크게 나지. 한쪽만 힘주면 재미없잖아.”

“어휴~ 아저씨 같은 소리 한다.”

“아저씨 같은 게 아니라, 아저씨야. 으하하.”

지혁은 젊은데다, 원체 건강한 사람이었고.

수아가 귀엽게 행동하니, 슬슬 아래에서 뭔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일단 스트레칭 좀 하고.’

온종일 누워 있다가, 갑자기 움직이면 허리 삐끗할 것 같아서.

일어나 몸을 풀려는데.

위이잉-

핸드폰 진동음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지혁은 웬일인가 싶어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들~]

“안녕하세요~ 뭐 하세요?”

[음식 준비 중이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혼자서 뭘 얼마나 맛있는 거 해 드시려고, 음식 준비 중이세요?”

[음?]

어머니로부터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었다.

[너 안 오냐? 언제 올 건가 싶어서 전화한 건데?]

“네? 저요?”

지혁은 수아를 향해 물었다.

“오늘 어머니 댁에 간다고 했어?”

“아니? 얘기 없었는데.”

지혁은 어머니가 뭘 잘못 알고 계시는가 해서 물었다.

“갈까요? 용인인데, 차 끌고 가면 금방이죠.”

[······.]

수화기 너머로 소리가 없었다.

“어머니?”

[이상하네. 서로 얘기가 돼서 온다는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진양이가 온다는구나.]

.

.

.

“네?! 누구요?”

지혁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진양이’라면 오 부회장이다.

지난번 가족 모임 이후, 어머니는 오 부회장을 이름으로 부른다.

[진양이. 너희 회사 부회장.]

꿀꺽.

지혁은 불길한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사람이 왜요?”

[그 사람이라니. 형한테.]

“······.”

[나도 모르겠구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저녁 먹으러 오겠다고 하던데?]

지혁은 오 부회장이 무슨 꿍꿍이 일지 고민했다.

[몰랐니?]

시계를 봤다.

‘오후 5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 지금 바로 갈게요.”

[뭐······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어머니는 불안함을 느꼈는지, 되물었고.

‘나 도착할 때까지 문 열어주지 말라고 할까.’

지금은 전쟁의 시대가 아님에도, 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내 가족에게 온다고 하니 괜히 걱정되었다.

‘아니야. 그러면 불안해하실 거야.’

“아니요. 아무 문제 없어요. 금방 갈게요.”

지혁은 전화를 끊고, 나갈 채비를 했다.

***

“왜? 무슨 일이야?”

“······.”

“어디 가는데?”

다급한 모습을 보며 수아는 걱정되어 물었으나, 지혁은 생각하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왜 어머니 집을······.’

가족에게 접근한다고 생각하니, 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가서 어머니와 오 부회장 단둘이 있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기야!”

물어도 지혁이 대답을 안 하자, 결국 수아는 소리를 질렀고.

“미안해. 수아야.”

“······.”

“갑자기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갔다 올게.”

“어머니 집 가는 거 아니야?”

수아는 옆에서 통화하는 걸 들었고, 혹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수아는 방으로 걸음을 빨리하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

“안돼!”

지혁의 사자후에 수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지금은 집에 있어.”

“······.”

“어머니 괜찮아. 어디 아프신 거 아니야.”

수아는 놀란 얼굴이었고.

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지금은 좀 급해서······.”

“······.”

“미안해.”

이럴 때 또라이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지혁이 정상인과 좀 다르다는 걸 잘 아는 수아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였다.

“알았어. 대신 약속 하나 해.”

“······.”

“갈 때 택시 타고 가. 운전하지 말고.”

지혁이 지금 좀 흥분한 듯 보여서, 혹시 과호흡이 오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 택시 타고 갈게.”

지혁은 현관을 나서며 말했다.

“전화할게. 미안해.”

수아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어머니 댁.

지혁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가서 급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리-

문이 열렸고.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 구두가 보였다.

‘와있구나.’

“어머니! 저 왔어요.”

“어~ 왔니?”

지혁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거실로 갔는데.

어머니는 편안한 미소로 지혁을 맞이했고.

그녀 앞에 오 부회장이 찻잔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지혁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왔냐?”

“······.”

지혁은 오 부회장에게 인사하지 않고, 무섭게 노려보았으며.

오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작은어머니, 지혁이 왔으니까. 이제 식사할까요? 배고파요.”

“그러자. 그러게 먼저 먹으라니까.”

“기다렸다가 같이 먹어야죠.”

잠시 후.

식탁에 저녁이 차려졌고.

세 사람이 모여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오 부회장이 말하자,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

우걱우걱.

“와~ 너무 맛있는데요?”

“호호. 다행이네.”

두 사람은 시종일관 다정했고.

지혁은 집에 온 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작은어머니, 옛날 생각나네요~”

“옛날 생각?”

“네~ 전 명절에 작은어머니 만났던 게 참 좋았거든요. 작은아버지도요.”

“······.”

“저한테 참 잘해주셨잖아요.”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호호. 너한테 잘해주지 않은 사람이 있었니? 그리고 네가 그때 얼마나 귀여웠는데.”

오 부회장은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났고, 그가 유치원생일 때 동생들은 아기였다.

“많은 기대와 의무감······ 전 어릴 적부터 감당해야 할 게 많았고, 참 답답했었거든요.”

“······.”

“절 선도그룹 후계자가 아닌, 어린아이로 대해주는 분은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밖에 없었어요.”

“호호. 우리 부부는 욕심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이 말에 오 부회장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지혁은 계속 주의 깊게 오 부회장을 살폈으나, 옛날 얘기하며 식사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둘이 거실에서 조금만 기다릴래? 금방 정리하고 갈게.”

“네.”

지혁은 어머니에게 깎은 과일을 받아서 거실로 갔다.

***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과일을 먹다가.

오 부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작은어머니랑 친했어.”

“······.”

“옛날 얘기하니까 좋네.”

지혁은 오 부회장에게 물었다.

“추억 얘기하려고 온 거예요?”

“아니.”

오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아버지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셨지.’

형제들 단속하라는 의미로 한 얘기였지만, 오 부회장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지혁을 확실한 적으로 인식한 후.

일주일간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형제들 단속할 시기는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내 가족은 네가 먼저 건드렸어.’

오 부회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너한테 사과하려고 왔다.”

“뭘요?”

“그동안 무시한 걸 말이야.”

흠칫!

사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음울한 기운을 느꼈고, 지혁은 고개를 돌려 오 부회장을 돌아보았는데.

그의 이마에서 짙은 보랏빛이 뭉게뭉게 보였다.

오 부회장은 광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이제 널 진짜 내 핏줄로 인정한다.”

“······.”

“기대해도 좋아.”

지혁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래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으며.

몸 속 세포 하나하나가 톡톡 터지는 느낌이었다.

‘긴장감.’

“하하.”

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고.

의아한 얼굴의 오 부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래야 재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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