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그래, 해보자.
“웃어?”
여전히 오 부회장은 광기 서린 눈으로 지혁을 보고 있었다.
처음엔 좀 당황했었지만, 지혁은 이젠 차분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웃음이 나네요?”
“왜?”
“재밌으니까.”
지혁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까놓고 얘기해 볼까요?”
“······.”
“솔직히······ 좀 싱거웠거든요.”
지혁은 특유의 맹수 같은 눈으로 오 부회장을 보고 있었지만.
그 또한 미동도 하지 않고, 지혁의 눈빛을 받았다.
“이게 좀 아이러니한 게 있어요.”
“······.”
“상대해야 할 사람이 너무 쉬우면 안심은 되지만······ 재미없거든.”
“······.”
“선도그룹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분이 계속 자살골 넣고, 똥볼 차다가 혼자 고꾸라지면······ 싱겁잖아요. 좀 편하기야 하겠지만.”
훗.
오 부회장은 웃었다.
‘동요하지 않네?’
지혁은 일부러 자극적인 말로 건드려 본 거였는데, 오늘 오 부회장은 달랐다.
“이제,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네.”
“······.”
“이제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 편할 일은 없을 테니까.”
오 부회장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나도 물어보자.”
“네. 뭐든지요.”
두 사람은 평온한 얼굴로 대화 중이지만, 머리는 쉬지 않고 굴리고 있었고, 그걸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
“······.”
“내가 뭐 네가 사귀던 여자 채가기라도 했어? 그럴 일도 없잖아? 나이 차도 10살이나 나는데.”
오 부회장은 빙글거리며 말했다.
“작은아버지 때문은 아닌 거 같고.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사건건 날 방해하려 들고, 내걸 뺏으려는 걸까?”
“뭐가 부회장님 건데요?”
“몰라서 묻냐? 차기 회장 자리지.”
지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죠. 비즈니스 하시는 분이 왜 벌어지지 않은 일을 그렇게 단정 지어 말씀하실까요.”
이때, 오 부회장의 평온한 얼굴에 힘줄이 솟았다가 사라졌다.
“이미, 회장님이 결정하신 일이야.”
“사람 마음은 쉽게 바뀌어요.”
지혁의 눈에서 안광이 쏟아졌다.
“안 그럴 거 같죠? 회장님도 사람이에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야!”
결국, 오 부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선 넘지 마라.”
“제 앞엔 선 없습니다.”
“······.”
“몰랐어요? 저 또라이인 거.”
오 부회장은 입술을 떨면서 지혁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개싸움 하자, 이거지.”
“······.”
“작은어머니 집 찾아오는 거로 충분히 경고될 거로 생각했는데.”
오 부회장은 지혁에게 경고했다.
“오냐. 나도 보여줄게. 네가 뺏으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뺏는다. 너와 네 가족. 빈털터리로 만들어줄 테니까.”
“······.”
“네 욕심의 대가······ 꼭 경험하게 될 거야.”
오 부회장은 지혁이 욕심을 부린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고.
지혁은 이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결과가 중요하지 뭐.’
어쨌건 지혁은 오 부회장이 회장이 못 되게 하려는 거였고, 그러려면 그의 권리를 뺐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욕심을 부리는 게 맞았다.
“······과일 다 먹었니?”
그때, 어머니가 쭈뼛거리며 거실로 오고 있었다.
***
어머니는 모두는 아니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어느 정도는 들었다.
‘사이가 좋기 힘들겠지.’
어머니가 오자, 오 부회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굳어진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오 부회장은 아무리 평온한 척하려 해도, 지혁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 그래. 저기, 안방 옆에 있어.”
“네.”
오 부회장이 화장실에 들어간 후.
어머니는 지혁에게 바싹 다가앉아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들.”
“네.”
“적당히 좀 해.”
“······.”
“잘 지내는 것도 노력이 필요한 일이야.”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은, 좀 잘 지내면 안 되겠냐? 큰형이지만, 네 회사 상사이기도 하잖아.”
“······.”
“네가 져 주고, 양보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뭘 어쨌다고 자꾸 형한테 대드니?”
지혁은 싱긋 웃고는 말했다.
“대드는 거 아니에요. 그냥 회사 얘기 좀 하다 보니 목소리가 커진 건데······.”
“······.”
“요즘엔 일 얘기할 때는 직급 상관없이 자유롭게 토의하고 그래요.”
어머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말했다.
“얘가 엄마를 바보로 아네.”
콩.
지혁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말했다.
“요 녀석아. 엄마 말 들어. 형한테 까불지 마. 가정교육 잘못 받았다는 소리 들어.”
“어머니.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가정교육을······.”
“나이가 중요하냐? 내 아들인 게 중요하지.”
지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일에 가족이 엮이면 안 좋은가 보다.’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안광을 쏘아낼 수도 없는 일이고.
그저 묵묵히 어머니의 훈계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어머니.”
오 부회장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저희 일 얘기 한 거 맞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응? 어어.”
어머니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 얘기하는 거 들었니?”
“지혁이가 워낙 회사 일을 열정적으로 해서, 간혹 하극상처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흠칫.
지혁은 오 부회장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엄마 앞에서 입 조심해라.’
오 부회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름대로는 회사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서 그러겠죠. 뭐,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하. 안 그렇니? 지혁아?”
“······.”
지혁은 오 부회장을 무섭게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
어머니는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다가, 뭐라도 해서 분위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에 제안했다.
“너희들 고스톱 좋아하니?”
***
고스톱 한 시간 정도 치다가.
지혁과 오 부회장은 집을 나섰다.
“지혁아, 너도 지금 가려고?”
“네, 아내가 기다려요.”
어머니는 혹시 나가다가 또 싸울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 토요일 밤이니까. 둘 다 딴 데 가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거라.”
“네.”
오 부회장이 웃으며 인사했다.
“작은어머니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녁 잘 먹고 갑니다.”
“그래~ 또 놀러 와. 다음엔 네 처도······ 어이쿠!”
오 부회장은 이혼해서 혼자 있다. 습관적으로 나온 인사말이었는데.
굳어진 오 부회장의 표정을 보고, 어머니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그냥 또 놀러 와.”
“······.”
옆에서 보고 있던 지혁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 갈게요.”
“그래, 딴 데 가지 말고 어서 집으로 가.”
“그 말씀만 벌써 세 번째에요. 들어가세요.”
“오냐.”
덜컹.
어머니가 들어간 뒤.
오 부회장이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울래?”
“담배 안 피는데.”
오 부회장은 담뱃불을 붙였고.
지혁은 그 옆에 서서 밤공기를 마셨다.
“차 갖고 왔냐?”
“아니요. 택시 타고 왔어요. 부회장님은요?”
“난 가져왔지. 대리 불렀다.”
저녁 먹으면서 가볍게 술도 한잔했었다.
오 부회장이 말했다.
“차 없냐? 아버지가 차는 안 사줬어?”
약간 비꼬는 투였는데.
“사준다고 하셨는데, 그건 다음에 사겠다고 했어요. 한꺼번에 많이 받아먹으면 배탈 나거든요.”
지혁답게 받아쳤다.
“하하. 참나. 뻔뻔하긴.”
“큰어머니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지혜로운 재테크라고.”
오 부회장은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꽤 걸리네.”
어차피 태워주지도 않을 거.
지혁은 먼저 갈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확실히 해주자는 마음이 들었다.
“부회장님.”
“음?”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릴게요.”
“뭔데.”
“후계 자리 내려놓으세요.”
적을 공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유하는 거였다.
“뭐가 어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안해 드리는 거예요. 후계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공식적으로 밝히시고, 선도전자 대표이사 자리에만 집중하신다면 지금 부회장직 유지하게 해드릴게요.”
오 부회장은 담뱃불을 거칠게 끄고 말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어머니 집 밖으로 나왔고, 이제 서로 거리낄 게 없었다.
오 부회장은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뭔데?”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 부회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도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이죠.”
.
.
.
.
“하······ 하하!”
오 부회장은 어이없어서 지혁을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툭.
그리고 지혁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네가 뭘 한다고?”
지혁은 밀쳐진 어깨 부위를 보다가 말했다.
“몸에 손대는 거 상당히 싫어하거든요. 나도 모르게 손 나갈 수 있으니까, 이런 건 안 하시는 게 좋아요.”
“뭐?!”
지혁의 표정은 무서웠고, 오 부회장은 목소리는 컸지만, 다시 터치하진 못했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뒷덜미 잡혀서 억지로 끌려 내려오기 싫으면, 잘 생각하세요.”
“야! 너 말 가려서 안 할래? 이게 어딜······.”
오 부회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지만.
‘후유- 참자. 계속 이런 식으로 말려 왔어.’
***
지혁은 급진적인 오 부회장이 감정을 컨트롤 하려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해 볼 생각인가 보네.’
오늘 어머니 집에서 그에게 처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무시해서 미안했다고.’
“방금 말씀드린 거, 기한은 다음 주 월요일······.”
“야, 오지혁.”
오 부회장이 불렀다.
“바로 얘기해줄게. 그럴 생각 전혀 없다. 됐냐?”
그때, 언덕 아래에서 낯선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리 부르셨어요?]
오 부회장은 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고, 지혁을 바라봤다.
“너랑 둘이 있는 거 짜증 났는데, 마침 잘 왔네.”
“······.”
“어쩌다 너랑 이렇게 됐을까.”
“상황이 그렇게 된 거죠.”
지혁은 오 부회장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이 선도그룹의 후계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거야.’
오 부회장은 차를 향해 돌아서기 전에, 멈칫하더니.
“몸조심 해라. 진심이야.”
지혁도 한마디 했다.
“형님.”
지혁이 그를 형이라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아까 제가 얘기했던 제안······ 다시 생각해보세요.”
“······.”
“저도 진심이에요.”
오 부회장은 웃으며 걸음을 떼었다.
“헛소리하지 말랬지. 그럼 건투를 빈다.”
오 부회장은 차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헤어진 직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우선, 오 부회장은 차에 타자마자 바로 추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데요. 비서실장 관련해서 준비하라고 말씀드린 거 있죠?”
그는 창밖을 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거 합시다. 당장 월요일부터요.”
지혁은 그 나름대로, 뭔가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보통 일 저지르기 전에 동태를 살피기 마련이야.’
오 부회장이 어머니 집에 온 걸, 단순한 현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 부회장이 차를 타자마자, 지혁은 이중 첩자인 지원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 밤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비서실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월요일 아침에 선도전자로 바로 출근하시고요. 당분간 밀착해서 감시하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지혁은 굳은 얼굴로 오 부회장의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