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적의 움직임 (2)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형주는 연신 소리치며 계속 90도 각도로 인사했고.
찰칵. 찰칵.
로비에 있는 일부 직원은 이 모습을 찍고 있었다.
“제가 감히 비서실장님께······ 정말 죄송합니다!”
윤 부장은 버럭 소리 질렀다.
“황 차장! 뭐해?! 빨리 비서실장님 안으로 모시라니까.”
“네?”
황 차장은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서 넋 놓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실장님, 어서 이쪽으로.”
황 차장은 지혁의 팔짱을 잡아끌었는데.
지혁은 살며시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갈게요.”
“아, 네.”
황 차장은 지혁이 터치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바로 손을 빼었다.
“죄송합니다!”
이형주는 미친놈 같았다.
지혁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계속 멀어지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1층 로비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무슨 일일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뭔지는 몰라도,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러게, 얼마나 뭐라 했으면 저렇게······.
-비서실장님이 좀 빡세긴 하잖아.
“죄송합니다!”
지혁이 게이트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연거푸 죄송하다고 소리쳤고.
윤 부장은 이형주를 잡아끌며 무섭게 말했다.
“이봐! 적당히 좀 해!”
“죄송합니다!”
“야!”
윤 부장은 안 되겠다 싶어서, 이형주의 팔을 붙잡았다.
“고 차장님! 좀 도와주세요.”
“네.”
이형주는 두 사람에게 붙잡혀 건물 밖으로 내쳐졌다.
현관 밖으로 나오자, 이형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놓으시죠.”
그리고는 현관 안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올라가셨나?”
윤 부장이 그에게 험상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뭐 하는 거야?! 어!”
“······.”
“이게 웬 행패냐고!”
“행패요?”
이형주는 피식 웃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말했다.
“사과하는 게 행패에요?”
“······.”
고 차장은 무서운 눈으로 이형주에게 말했다.
“당신, 조심해.”
“······.”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는데, 가만 안 둬.”
이형주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저 갑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
지혁과 황 차장 둘이 있었고.
황 차장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비서실장님······ 괜찮으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지혁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 차장님.”
“네?”
“방금 저 한 방 먹은 거 맞죠?”
“······.”
지혁은 눈은 그대로 둔 채,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제법이네.”
***
선도전자 화성캠퍼스.
오 부회장 집무실.
문 걸어 잠그고, 집무실 밖에 아무도 없게 만든 후.
오 부회장은 추 이사와 독대했다.
“그래서, 이형주 차장은 오지혁한테 접근 실패했다는 거야?”
“네, 좀 비굴하게 접근해 봤는데, 잘 안된 거 같습니다.”
오 부회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추 이사를 바라봤다.
“나 같아도 안 받아주겠다. 아무리 미래기획실로 발령받은 인재라 해도, 오지혁 아래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
“더군다나 나랑 대치 중인 상황에서 그렇게 들이대면 당연히 의심하지 않겠나?”
이 말에 추 이사는 살짝 미소 지었으나, 오 부회장은 그 미소를 아직 보지 못했다.
“이사님, 수가 너무 얕아. 저번에 선도전자 공장에서 했던 것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해서는 안 될 일이야.”
추 이사는 한 번 더 싱긋 웃었고.
이제야 그의 미소를 본 오 부회장은 거슬려서 한마디 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라고······.”
오 부회장이 더 말하려는데, 추 이사가 말을 잘랐다.
“이건, 미끼입니다.”
“미······ 뭐?!”
오 부회장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추 이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끼였고요. 물었습니다.”
“······.”
추 이사가 지원팀장으로 있을 때, 지혁은 의전팀원이었으며, 그가 의전팀장으로 있을 때는, 지혁이 비서실장이었다.
지혁을 위, 이래서 경험해 본 추 이사는 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성격이 세고, 자기 확신이 강하지.’
그건 지혁의 장점이지만, 한 편으로는 단점이기도 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오 부회장은 뭔가 느껴서, 다급히 되물었고.
추 이사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보여줬다.
“음?”
핸드폰을 보며 오 부회장은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다가.
다시 자세히 보았다.
지혁의 등을 향해, 이형주의 이마가 땅을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주변에 몇몇 여직원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이었다.
“아······.”
이제야 오 부회장은 느낌이 왔고.
추 이사를 바라봤다.
‘이 사람······ 좀 하네?’
오 부회장은 핸드폰을 다시 추 이사에게 건네며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
추 이사는 지혁에게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지혁이 잘못되길 바랐다.
그가 비서실에 온 후로 모든 게 꼬였으니까.
지혁은 원래 후환을 두지 않는 성격인데, 추 이사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가 팀장으로 있을 때 일도 잘했으며, 아래 직원들도 불평불만 없이 회사를 오래 다닐 정도로 신망도 좋았으니까.
지혁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경계하거나 나쁘게 보지 않았었다.
“이미 진행했습니다.”
“어떻게?”
“익명 커뮤니티에 사진과 글 올렸습니다.”
“누가?”
“이형주 차장입니다.”
“익명 커뮤니티인데, 당사자가 직접 올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당사자가 아닌 척했죠.”
오 부회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추 이사는 웃으며 말했다.
“저와 머리 맞대고, 고심을 거듭해서 올렸습니다.”
오 부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뭐, 블러인드 같은 곳에 말인가?”
“네, 잘 아시네요.”
“당연히 알지.”
오 부회장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블러인드의 단골 소스였으니까.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다.
“글 올린 것 좀 보여주겠나?”
“네.”
클릭.
추 이사는 노트북을 꺼내어 바로 보여줬는데.
방금 추 이사가 보여준 사진과 함께 사연이 올라와 있었다.
『오늘 대박 장면 봄. 가까이 있어서 얘기 들었는데. 이형주 차장이란 분 미래기획실로 발령받은 날인 듯한데, 오자마자 비서실장에게 인사하네? 어머, 근데 누구한테 인사하니? 본 척도 안 해. 이 지랄.』
오 부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직원인 척한 거야?”
“네, 확실한 알리바이를 위해서······.”
“······.”
오 부회장은 계속 읽었다.
『이형주 차장이란 분은 비서실장님을 흠모해서 가까이서 일하고 싶다며 들이대는데. 비서실장님은 뭐라더라. 잔챙이는 필요 없다고? 어머. 이 지랄.』
“다 좋은데, 여직원 흉내 내서 글 올린 건 실수인 거 같아.”
“부회장님께서 진짜 글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셔서 그렇습니다. 요즘 여직원들은 이렇게 씁니다.”
『너무한 거 아니니? 언니, 오빠들은 어떻게 생각해? 비서실장 위세에 눌려서 계속 ‘죄송합니다’라고 소리치는데. 거부감 들었음. 막 이래.』
“짜증 나서 못 보겠다.”
“효과는 좋습니다.”
추 이사는 조회 수를 가리켰는데.
다른 게시물들과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압도적인 조회 수였다.
댓글들도 꽤 보였는데.
└이건 비서실장님이 너무 했네.
└업무 능력이 출중하시잖아.
└일 잘하면 뭐 해. 너무 좀 안하무인이긴 해.
└난 비서실장님 좋은데. 말만 좀 부드럽게 했으면.
부정적인 얘기는 원래 들불처럼 퍼져가기 쉬운 법이다.
알게 모르게 지혁은 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도 받고 있었기에.
꽤 효과가 있었다.
“괜찮네.”
댓글까지 확인한 후에야, 오 부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
[비서실장의 만행. 실력자는 이래도 됨?]
비서실장실.
지혁과 지혁라인은 블러인드에 올라온 글을 보고 있었다.
“하아······ 이 자식을 진짜.”
윤 부장은 블러인드의 글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회사에서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이런 짓을 하고 다녀!”
‘공작’을 당했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다.
설마설마했는데.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화가 났다.
그건, 고 차장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더럽게 하네요. 더럽게.”
지혁과 오 부회장의 최측근들은 알고 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상황에 돌입했는지.
견제와 공격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지 깎으려는 목적으로 들어올 줄은 생각 못 했다.
“조회 수가 또 올랐네요.”
황 차장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만, 지혁만 태평한 얼굴이었고.
윤 부장은 답답해서 말했다.
“비서실장님은 화 안 나?”
“화를 내서 뭐 합니까. 이미 벌어진 일인데.”
“······.”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는 게 중요하죠.”
윤 부장은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지만,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지저분한 방식 썼다고 열 받을 거 없어요. 반칙이 어딨습니까.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죠.”
“······.”
“제 생각에는 오 부회장이 계획한 일은 아닌 거 같고. 저쪽에 머리 좀 쓰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요.”
윤 부장이 말했다.
“그래, 감탄은 그만하고. 어떻게 할 건데.”
“좀 생각을 해봤는데.”
지혁은 천천히 말했다.
“정면 돌파가 좋을 거 같아요.”
“정면 돌파?”
윤 부장이 되물었고, 황 차장이 덧붙여서 말했다.
“그럼, 블러인드에서 싸우겠다는 거예요? 진실이 아니니까?”
지혁은 이형주에게 무시하는 투로 ‘잔챙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형주가 올린 글은 약간의 소스에 많은 살을 붙여서 악의적으로 꾸민 얘기였다.
지혁은 황 차장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건 저쪽이 바라는 상황일 거예요.”
“······.”
“싸우려 들면 더 이슈가 되겠죠. 지금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진실을 따질 만큼 중요한 사안도 아니고.”
“······.”
“어쨌든 직원들은 글쓴이의 말을 믿고 있어요.”
세 남자는 지혁의 말에 집중했다.
“대중들에겐 믿는 게 사실이죠.”
얼마 전 오 회장이 오 부회장과 독대했을 때 했던 말이다.
지혁 또한 이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럼 어쩌겠다는 건데? 진실을 밝힐 건 아닌데, 정면 돌파한다?”
“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사과하려고요.”
“뭐?! 하지도 않은 일에 사과해?”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그것도 전략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죠.”
황 차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억울하지 않으세요?”
“감정보다는 잘 해결되는 게 중요해요.”
“······.”
“뭐, 영 거슬리면 추후 적절할 때에 갚아줘도 되고요.”
지혁은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 좀 줘보실래요. 지금 바로 쓰게.”
지혁은 타이핑을 시작했다.
***
점심시간.
근처 식당에서 여직원 셋이 식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말했다.
“대박.”
“왜?”
“블러인드 봐봐. 비서실장님이 댓글 남겼어.”
“뭐?!”
회사 중역들은 블러인드에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직접 댓글을 다는 경우는 잘 없었다.
『안녕하세요. 비서실장 오지혁입니다.』
여직원의 호들갑에 다른 여직원들도 핸드폰을 켜며 난리를 쳤다.
“대박. 대박.”
『일련의 상황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우선, 이형주 차장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계셨던 직원분들 불편하게 해드린 것도 사과드립니다.』
세 여자는 지혁의 사과 댓글을 읽으면서.
점점 눈이 하트로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