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75화 (175/301)

175. 돌려주다 (1)

-화끈하다.

-해명 글 일 줄 알았는데, 사과글이었네?

-그런데 이게 이 정도로 사과할 일인가?

여직원들은 계속 글을 읽었다.

『회사의 중요 직책자로서 행동을 조심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혁의 글에 변명의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도 없었다.

다만 자신으로 인해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한 것과 불편함을 느낀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앞으로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업무 보시는데, 사소한 일로 신경 쓰게 해드렸습니다.』

너무 정중하게 사과하니, 처음에 올려진 글만 보고 비난했던 사람들도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처음 블러인드를 보라고 했던 여직원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사과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니까, 말이야.”

“그럼, 사실은 사실이라는 건가?”

다른 여직원의 말에 다른 두 여직원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뭐야 새삼스럽게?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잖아.”

“아닐 거라는 생각도 조금은 했지. 블러인드는 익명 커뮤니티니까.”

“······.”

지혁의 진심 어린 사과글을 보면서, 블러인드 글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풀리면서, 머리가 냉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런 제안 해도 될지 모르겠으나, 어차피 저희 선도그룹 직원들이 모두 보고 계시니까요······.』

지혁의 글에는 사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형주 차장님.』

글을 읽던 여직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어머, 실명을 그냥······.

-원 글에도 실명은 있었어.

-아, 어떻게 심장 떨려.

지혁이 어떤 사람인지 선도그룹 전 직원들은 알기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긴장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정중하게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이 차장님을 불쾌하게 해드렸던 자리에서 직접 뵈었으면 하거든요.』

-어떡해······.

-너무 멋있잖아.

-완전 상남자.

『0월 00일 아침 9시 출근 시간에 뵙겠습니다. 잠깐이면 되니까요. 출근하시는 길에 제 정중한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콩닥콩닥

여직원들은 ‘기다리겠습니다’란 문구에서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상. 선도그룹 비서실장 오지혁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 이사님!”

선도전자 화성 캠퍼스.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비서실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추 이사님!”

자리에 있던 추 이사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비서실에 막 들어온 사람을 돌아보았고.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차장! 여긴 웬일이야?”

이형주 차장.

비서실엔 다른 직원들도 있었고.

추 이사는 이형주 차장이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사님! 글 보셨어요?”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보려는데, 추 이사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덜컹!

“아니,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면 어떡해? 다른 직원들 다 보는데.”

“안 그러게 생겼어요?! 아직 글 못 봤죠?”

“무슨 글?”

추 이사는 지혁에 대한 저격글 조회 수가 어느 정도 오른 뒤부터는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비서실장이 댓글 달았잖아요!”

“댓글? 어디다?”

“블러인드요!”

“이런, 미친.”

추 이사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자기 저격글에 공개적으로 댓글을 달았다고? 그것도 익명 커뮤니티에?’

그동안 지혁이 일 처리를 어떻게 해왔는지, 추 이사도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기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 일단 좀 보자.”

추 이사는 황급히 핸드폰을 켜서, 내용을 확인했다.

“와······.”

읽으면 읽을수록.

‘이 사람은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파격적이다 못 해,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특히, 일을 계획하고 이 글을 직접 작성한 당사자인 추 이사로서는······.

사과글에서 날카로운 칼을 느꼈다.

칼끝이 목에 겨눠진 기분이었다.

꿀꺽.

추 이사는 끝까지 다 읽은 후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떻게 하지······.’

이슈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슈가 되었다.

‘공개 사과하고, 이름까지 거론하여 지목했어. 만나자고.’

추 이사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이형주는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뭐라도 말씀 좀 해보세요.”

“하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고.

추 이사는 한숨만 쉬었다.

‘괜히 건드렸나?’

불길한 기분만 엄습해갔다.

‘아무래도 방법은······.’

“추 이사님! 어떻게 하냐고요!”

“무시해야 하지 않을까?”

“네?”

“자네를 만나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싶다고 한 건 어쨌든 제안이잖아. 그냥 무시해도······.”

“제 이름을 직접 거론했는데도요?”

“자네가 블러인드 직원도 아니고, 못 봤다고 하면 되지 않나.”

“이미 주변 동료들이 난리입니다. 블러인드 읽어보기도 전에 동료들이 얘기해줘서 알았어요.”

추 이사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혁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강한 압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쨌든 만남을 피하면 되잖아.”

“출근 시간에 기다린다는데. 그럼 연차 써요?”

“······.”

“이미 팀장님께서도 조금 늦어도 이해할 테니, 잘 풀고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9시까지 출근이기에, 9시에 만나면 몇 분 정도는 늦을 수밖에 없다.

이형주의 팀장은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니, 그 사람은 쓸데없이 배려심이 깊어. 원래 안 그랬던 거로 알고 있는데.”

추 이사의 볼멘소리에 이형주가 말했다.

“비서실장님 일이니까요. 미래기획실도 비서실장님이 꽉 잡은 거 모르세요? 최 부회장님은 비서실장님의 수하처럼 행동하시고.”

“······.”

이리저리 궁리해봐도 답은 없었다.

로비에서 지혁을 만날 수밖에 없게끔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데.

똑똑.

“안녕하세요~ 잠깐 방해 좀 해도 되겠습니까?”

지원팀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타났다.

***

안 그래도 그로기 상태였는데.

회장 비서실의 지원팀장이 나타나니, 더 놀랐다.

“어, 어쩐 일이세요?”

“하하, 어쩐 일은요. 우리 사이에.”

추 이사는 지원팀장을 보며 불편 표정을 지었고.

지원팀장은 자신의 등장과 함께 회의실 분위기를 바뀐 걸 보며 생각했다.

‘일주일간 있어도 아무것도 못 본 게 이유가 있었네.’

지원팀장은 이중 첩자인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걸 자각했다.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근처에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추 이사님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려고 기다렸는데, 오래 걸리셔서요.”

그러면서 지원팀장은 이형주의 인상착의를 살폈다.

‘이형주 차장이군.’

이곳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확인했었다.

어제 오후.

지혁이 지원팀장을 불러 지시했었다.

‘지원팀장님, 내일 선도전자 가서 추 이사님 관찰 좀 해보세요.’

‘네? 추 이사요? 그 사람은 왜요?’

오랜 시간 인접 팀장으로 있었기에 둘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오 부회장 측에서 이런 식으로 머리 쓸 줄 아는 사람은 없거든요. 뉴페이스이면서, 저한테 반감도 있는 사람일 거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

‘추 이사님이 떠오르네요.’

‘알겠습니다. 관찰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형주 차장 본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가시기 전에 인상착의 확인하고 가세요. 내일쯤이면 둘이 함께 있는 거 목격할 수도 있으니까.’

지혁의 지시로 오늘 아침 선도전자 화성 캠퍼스에 오긴 했으나.

내심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웬걸.

지원팀장의 등장에 추 이사는 당황하는 모습이었고.

그의 옆엔 정말로 이형주 차장이 있었다.

‘하여간······ 무서운 사람이야.’

지원팀장은 회의실로 들어온 후, 지혁의 짐작이 모두 맞았다는 걸 알고 속으로 많이 놀랐으나.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 중이었다.

추 이사가 말했다.

“네, 그럼 인사는 했으니까······ 저희가 좀 하던 얘기가 있어서요.”

“혹시, 이형주 차장님이세요?”

“네?”

지원팀장은 불쑥 아는 척을 했고.

이형주는 당황했다.

“저 아십니까? 초면인데.”

“아유, 그럼 알죠~ 요즘 유명하시잖아요.”

“······.”

지원팀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쩌다가, 그런 사람을 건드렸어요.”

“네?”

“제가 비서실장 아래 있잖아요.”

지원팀장은 일부러 비서실장을 적대하듯 말했다. 선도전자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오 부회장의 사람이었으니까.

“이 차장님 상당히 용기 있으시네. 임원급들도 잘 안 건드리는 사람을······.”

“······.”

“굳이 말 안 해도 어떤 의미인지 알죠? 비서실장님이 그룹에서 해 온 일들 아시잖아요.”

지혁이 어떤 일을 했는지, 선도그룹 내에 모르는 직원들은 없다.

일부는 TV에도 나올 정도였으니까.

추 이사는 인상을 굳히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가보세요.”

“아, 네네. 그럼, 딱 한 마디만.”

지원팀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매는 빨리 맞는 게 좋아요. 피하면 한 대 맞을 거 두 대 맞습니다.”

“네?”

“뭐, 그렇다고요.”

지혁이 펼쳐놓은 멍석에 나오게 하려고 한 말이었다.

***

‘하······ 젠장.’

지혁이 로비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날.

이형주는 전철역에서 내려서, 선도본관을 향해 걸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안 들어갈 수도 없고.’

여러 궁리를 해봤는데, 여기서 피하는 게 더 이상했다.

공식적으로는 이형주는 잘못한 게 없고, 사과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현관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다들 딴청을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는 게 티 났다.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목적은 뻔해 보였다.

‘아주, 제대로 구경났네.’

이형주가 현관 앞에 나타나자, 몇몇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는 척했고.

군중들은 수군거렸다.

-왔네. 왔어.

-사무실 9시 좀 넘어서 들어가겠는데.

-아, 몰라~ 좀 혼나고 말지.

-재밌는 구경 놓치기 싫어.

두근두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형주는 현관 앞에 섰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야. 그래야 해.’

위축되는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 계속 되뇌었다.

덜컹.

선도본관 로비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폭을 사이에 두고 인간 벽이 세워져 있었다.

‘미쳤다······ 이게 이렇게까지 해서 볼 일이야?’

이형주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인간 벽 길의 끝에 지혁이 보였다.

게이트 앞에 서 있었고, 그를 지나쳐야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었다.

뚜벅뚜벅.

이 상황과 지혁의 존재감.

이형주는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고.

정신 놓고 지혁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형주가 다가오자, 지혁이 말했다.

짧은 말이었는데.

날카로운 칼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비서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사과드리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블러인드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고, 이형주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혁이 물었다.

“불쾌하셨다면서요.”

“아······ 그게.”

이형주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렇게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차장님도 블러인드 글 보셨죠?”

“네? 아, 네.”

“그 글에 대해서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

“있으실 것 같은데.”

지혁은 안광을 쏟아내었고.

꿀꺽.

이형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잔머리 굴리면 뒤진다.’

분명 지혁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형주는 결국 자기 입으로 말했다.

“누군진 몰라도······ 사실과 다른 얘기를 잔뜩 써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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