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78화 (178/301)

178. 그를 부른 이유 (1)

“Welcome. Sir.”

지혁은 톰쿡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여행 중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통역사가 옆에 있었지만, 지혁은 직접 영어로 말했다.

‘어? 비서실장님 영어 못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룹 내에서 지혁의 ‘풀바디랭귀지’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룹 수장과의 만남에서 손짓·발짓해가며 의사소통하는 건 모양새가 맞지 않다고, 통역사를 배정했는데.

“하하. 네, 덕분에 불편한 건 없었습니다. 비서실장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네,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그동안 영어 공부 좀 하셨나 봐요?”

톰쿡 또한 지혁의 풀바디랭귀지를 인상 깊게 봤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지혁은 풀바디랭귀지로 일본 엔지니어와 대화하며, 선도그룹에 유리한 분위기로 미팅을 이끌었었다.

“하하. 네, 그동안 공부 좀 했습니다.”

지혁은 해외 출장을 경험하면서, 영어는 풀바디랭귀지 없이 직접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회사 생활하면서 틈틈이 공부했다.

리스닝은 이미 완벽했기에, 스피킹 연습에만 집중하여,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 어렵지 않았다.

“여러모로 멋진 분이시네요.”

“과찬이십니다.”

찰칵! 찰칵!

지혁과 톰쿡이 대화하는 중에 계속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고.

톰쿡은 지혁에게 기자들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보시고 함께 사진 찍으시죠.”

“네.”

지혁은 어색했으나, 선도그룹을 대표해서 나온 자리인 만큼, 애써 미소 지었다.

톰쿡과 지혁.

피치사의 수장과 나란히 선 모습.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니었다.

기자들은 노트북을 펼치고 연신 타이핑했고.

데스크에는 지혁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는 등 정신이 없었다.

지혁이 회사 공식 행사에 대표 성격을 띠고 나온 건 처음이었고.

오 회장이나 오 부회장과 달리, 지혁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략팀장이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선도그룹 전략팀장입니다. 오늘 선도그룹과 피치사 일정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는 톰쿡에게 인사했고, 톰쿡은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했다.

“반가워요.”

“일정이 좀 타이트해서요. 지금 바로 이동했으면 합니다.”

“네, 그러시죠.”

“선도전자 청주 공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톰쿡은 기자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 후, 전략팀장을 따라서 움직였고.

톰쿡 바로 옆에서 지혁이 있었다.

수많은 기자가 두 사람을 따라서 우르르 움직이는데.

마치, 여왕벌을 따르는 벌떼 같았다.

공항 출구 바로 앞에 검은색 세단이 대기 중이었고.

톰쿡은 차에 타기 전 지혁에게 말했다.

“저랑 같이 가시죠.”

“네?”

“동석하기 불편한가요?”

톰쿡은 지혁에게 열린 차 문을 향해 손짓했고.

찰칵! 찰칵!

기자들은 이 모습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지혁은 살짝 당황했지만.

분위기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안 불편합니다. 네. 함께 가시죠.”

***

선도본관.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팀.

그룹의 홍보실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오늘 선도전자에서의 톰쿡의 동선과 일정 등, 언론사의 각종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했는데.

“팀장님!”

커뮤니케이션팀의 홍지원 팀장.

지혁이 비서실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전 비서실장인 강전철 전무를 상대할 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인물이다.

“나 정신없어. 부르지 마.”

“언론사에서 요청이 왔는데요.”

“요청 왔으면 준비한 대로 하면 되지, 뭘 자꾸 불러.”

톰쿡에 대한 자료는 철저하게 준비해놓고 있었다.

“팀장님, 그게 아니라요.”

결국 팀원은 홍 팀장 자리로 찾아왔고.

“아, 바쁘다니까. 왜 자꾸.”

홍 팀장은 짜증 섞인 얼굴로 앉은 자리에서 올려다보았는데.

팀원은 꽤나 난감한 얼굴이었다.

“톰쿡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홍 팀장은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자세를 고쳐 앉았고.

“언론사에서 비서실장님이 누구냐고 난리입니다.”

“비서실장? 오지혁 전무님?”

“네.”

“······.”

“그분이 누군데, 톰쿡을 마중 나왔냐고.”

“······.”

“너무 질문이 많아서······.”

홍 팀장은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았는데.

여기저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양손으로 수화기 붙잡으며 난리도 아니었다.

홍 팀장은 잠시 생각한 후에 물었다.

“기자들이 정확하게 뭘 물어보는데?”

“비서실장님에 관한 건 무엇이든지요.”

“······.”

“학력, 입사 기수, 직급, 회사 내 역할, 가족관계······ 별걸 다 요청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요구하는 수준을 들어 봤을 때, 선도그룹에 권력 구조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게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단순히 톰쿡의 에스코트 역할이 아니라.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다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와······ 역시 비서실장님.’

이 생각에 이르자, 홍 팀장은 절로 감탄이 나왔다.

중역 회의에서 아무 말 없다가, 톰쿡 에스코트 얘기가 나왔을 때는 물러서지 않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녀 또한 회사의 중역이기에, 지혁과 오 부회장이 어떤 상황에 돌입했는지 잘 알고 있다.

정말 지혁이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노린 거라면······.

“자기야.”

“네, 팀장님.”

“학력, 입사기수, 직급 정도만 공개하고, 그 외에는 회사에서 비서실장님이 했던 일들 있잖아.”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진짜 몰라서 물어?”

“······.”

“비서실장님 돋보일 수 있게 해드려야지. 지금은 우리 회사 얼굴로서 거론되고 있는 건데.”

팀원은 홍 팀장의 얘기를 들으며, 표정이 좀 미묘했다.

‘상식적인 얘기인데······ 표정이 왜 저럴까. 혹시, 오 부회장 쪽인가?’

홍 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업무적으로 일이기에 거리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이해 못 한 말 없지? 어서 배포 자료 만들어서, 나한테 검토받아.”

“네?”

검토받으라는 말에 팀원은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그럴수록 홍 팀장은 강하게 말했다.

“왜 자꾸 우물쭈물해. 바쁘다니까? 내가 지시한 것 중에 뭐 문제가 될만한 거 있어?”

“없습니다.”

“그럼, 어서 움직여.”

홍 팀장은 예나 지금이나 지혁에게 팬심이 있었고.

그가 잘 되길 바랐다.

***

차 안.

청주 공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톰쿡과 지혁이, 앞 좌석에는 피치사 수행원들이 앉았다.

톰쿡과 지혁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이동 중이었는데.

지혁은 등짝에 땀이 다 뱄다.

‘아무리 그간 영어 공부했어도, 차 안에서 미국인과 1대1로 대화 하는 건······.’

지혁은 웬만한 일에는 눈도 끔쩍 안 하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정말 고역스러웠다.

‘아직도 20분이나 남았어.’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입에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 그 얘기 좀 해봅시다.”

한 가지 대화 주제가 끝난 후, 더 말 걸지 않기를 바라며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톰쿡은 도무지 쉬지를 않았다.

‘본인은 모국어로 대화하니 피곤한 것도 모르겠지.’

하지만, 그를 무시할 수 없었고, 지혁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작년에 피치사 방문하셨을 때요.”

“네.”

“그때 우리 일본 엔지니어와 대화하는 게,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거, 대화 맞죠?”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대화 맞습니다. 대화는 꼭 말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 대답에 톰쿡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하하. 그러니까요. 몸으로 대화한 거잖아요.”

지혁은 미소로 긍정을 대신했다.

“바디랭귀지인 건 알겠는데, 비서실장님이 하신 건 특별해 보이더라고요?”

“풀바디랭귀지라고 부릅니다.”

지혁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고.

톰쿡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요. 풀바디랭귀지. 그거 어떻게 하는 겁니까? 무슨 원리가 있는 건가요?”

“······.”

“간단하게라도 좀 알려주세요. 너무 궁금해요.”

이때, 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러려고 저 나오라고 하신 겁니까?”

갑자기 훅 들어갔고.

톰쿡은 살짝 당황하여 물었다.

“네?”

“대표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으신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

“아마, 그때 제 모습이 뇌리에 남으셨나 본데.”

“······.”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는 짐작해 볼 수 있죠.”

톰쿡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표정은 살짝 굳어졌다.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전 세계인과 대화할 수 있는 무언가겠죠.”

그는 지혁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지혁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마터면, 넘어가서 다 알려드릴 뻔했습니다~ 하하.”

이제야 톰쿡도 웃으며 말했다.

“하하. 비서실장님, 굉장히 조심스러우시네요. 그런 생각까지 한 건 아닌데.”

“······.”

“그럼 풀바디랭귀지는······.”

“네~ 알려드릴 생각 없습니다.”

지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고.

“······.”

이제야, 톰쿡은 더 말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그렇게 조용히 차를 타고 가다가, 청주 공장이 얼마 안 남았을 때쯤.

지혁이 물었다.

“대표님.”

“네.”

“근데, 에스코트로 왜 저를 지목하셨나요? 풀바디랭귀지 때문만은 아니죠?”

톰쿡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 얘기는 나중에 저와 따로 하시죠.”

“······.”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떠세요? 배석자 없이.”

지혁은 톰쿡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러시죠.”

***

‘Welcome to the sundo Cheongju factory.”

(선도 청주 공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청주 공장에 도착.

커다란 현수막이 정문에 걸려있었고.

오 부회장과 선도전자 임원들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끼익.

차가 멈춘 후, 오 부회장은 바로 톰쿡을 맞이하려고 뒷문으로 다가갔고.

철컹.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오 부회장은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려는데.

“안녕하세요.”

웬 한국말과 함께 지혁이 오 부회장의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살짝 허리를 숙인 오 부회장과 꼿꼿한 지혁.

언발란스한 상황에, 어디선가 짧은 웃음소리도 들렸다.

오 부회장은 지혁의 얼굴을 확인 후, 당황하여 황급히 손을 빼며 말했다.

“뭐, 뭐야.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분명 피치사 톰쿡이 아닌 지혁이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너무 티 나게 싫어하시네요. 기자들도 있는데, 좀 웃으세요.”

찰칵. 찰칵.

이 묘한 모습을 기자들은 다 담고 있었고.

오 부회장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이, 이게······.”

보는 사람이 많아서 화도 못 내고.

오 부회장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How are you?”

지혁이 나온 곳에서 톰쿡이 뒤이어 나타났다.

오 부회장은 그걸 보고 또 한번 놀랐다.

‘둘이 함께 타고 온 거야?’

동승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고, 오 부회장은 외부에서 대기 중이라 그 소식을 접하지 못했었다.

“하하.”

톰쿡은 오 부회장의 놀란 모습을 보며 웃다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부회장님.”

“아······ 네. 안녕하십니까?”

톰쿡은 인사를 마친 뒤, 부회장 옆을 지나치며 지혁에게 말했다.

“비서실장님, 어디부터 보면 될까요?”

이건 분명······,

오 부회장을 무시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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