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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79화 (179/301)

179. 그를 부른 이유 (2)

오 부회장은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듯 지나간 톰쿡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저 사람······ 일부러 저러나?’

오 부회장은 공공연히 선도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불린다.

황당함을 넘어 당혹스러웠고.

주변 선도전자 직원들의 시선도 민망했다.

한참 어린 사촌 동생.

부회장인 자신보다 직급도 훨씬 낮은 ‘전무’가 그룹의 대표로서 톰쿡을 에스코트하고 있다.

막상, 눈앞에서 이 일이 벌어지니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수치심으로 꽉 쥔 주먹을 떨고 있었는데.

“부회장님.”

옆의 추 이사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

“예상 못 했던 거 아니잖아요.”

톰쿡이 방문하기 전에 추 이사와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했었고.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톰쿡이 지혁을 직접 지명했으니. 그가 오 부회장을 자극할만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쾌한데.”

톰쿡이 대단한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오 부회장으로서는 그럴만했다.

“부회장님, 얻을 것만 생각하십시오. 감정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

“여긴 홈그라운드지 않습니까. 주도적으로 행동하셔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추 이사는 오 부회장을 부추겼고.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계획대로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오 부회장은 추 이사의 마지막 말에 힘을 얻고, 성큼성큼 톰쿡과 지혁의 뒤를 쫓아갔다.

“대표님.”

톰쿡은 오 부회장의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톰쿡은 의아한 눈길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고. 지혁 또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분명, 조금 전에 톰쿡은 지혁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그런데도, 오 부회장이 나서겠다는 게 의외였다.

“제 공식 직함이 선도전자 대표이사입니다. 이곳 청주공장은 자주 오는 곳이며 잘 압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게 나을 겁니다.”

톰쿡은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멀찍이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추 이사와 바로 옆의 오 부회장을 번갈아 보았다.

‘제법이네.’

생떼가 아닌, 이유 있는 뻔뻔함이었다.

지혁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오 부회장은 같은 선도그룹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며, 외부의 적 앞에서 가족끼리 싸울 수는 없으니까.

지혁은 톰쿡에게 말했다.

“대표님, 부회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동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혁은 오 부회장에게 톰쿡의 옆자리를 내어주진 않았다.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에스코트는 뒤에서 따라오면서 하라는 거였다.

“자, 그럼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오 부회장은 재빨리 톰쿡의 반대편 옆으로 간 뒤, 진행 방향으로 안내했다.

톰쿡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선 지혁과 오 부회장.

직원들은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

백반집.

수아는 작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동료들과 함께 점심 먹으러 자주 온다.

메뉴가 요일마다 정해져 있어서, 고르지 않아도 되는 게 편리하다.

“오늘은 좀 다른 데 가서 먹자니까.”

“호호. 점심은 간단하게 먹는 게 좋아요.”

팀장의 핀잔 섞인 말에 수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보통 여직원들은 점심 식사도 좋은 데 가서 먹자고 하던데, 우리 윤수아 대리는 완전 아저씨 입맛이란 말이야.”

“호호. 아저씨라뇨. 아직 저 아가씨로 오해 많이 받아요~”

“······.”

팀장과 팀원들. 총 4명.

수저 세팅하는 중에, TV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합동 뉴스입니다. 오늘 미국 피치사의 톰쿡 CEO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피치사는 글로벌 기업 고글과 어깨를 견주는 세계 최대 기업 중 하나인데······.]

식사를 기다리던 중, 팀장과 팀원들은 천장에 달린 TV에 집중하고 있었고.

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와······ 피치사의 수장이 한국을 다 방문하고. 우리나라가 요즘 핫하긴 한가 보다.”

팀원이 대꾸했다.

“맞아요. 우리나라에 피치사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대형 고객도 아닌데.”

“뭐, 한류도 그렇고 세계 문화를 리딩하는 힘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고려해서 방문하는 거겠죠.”

각자 나름의 뇌피셜로 분석을 쏟아내었고.

수아도 냉수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풉-

못 볼 걸 본 듯, 놀라서 머금었던 물을 컵 안에 다시 뱉어내었다.

[톰쿡 CEO는 첫 일정으로 선도전자 청주공장을 방문하는데요. 스마트폰 경쟁사이자, 반도체 협력사인 선도전자의 생산기지를······.]

화면에서 환한 얼굴로 톰쿡을 맞이하는 선도그룹의 남자.

분명 오늘 아침에 집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자기가 왜 여기서 나와?’

지혁에게 얘기 들은 건 없었다.

먼저 묻지 않는 한, 회사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선도전자에서는 그룹 비서실장인 오지혁 전무가 대표로 톰쿡을 맞았습니다. 선도전자 대표이사인 오진양 부회장 혹은 미래기획실장인 최재훈 부회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었는데. 새로운 인물이······.]

팀장은 화면 속의 지혁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대단한데? 엄청 젊어 보이는데 비서실장에 전무라고?”

“그러니까요. 이런 자리에서 선도그룹 대표로 나올 정도면, 범상치 않은 인물 같은데.”

꿀꺽.

수아는 동료들의 대화를 들으며 침을 삼켰다. 그 범상치 않은 인물이 툭 하면 스파크 보내는 남편이니까.

[톰쿡의 방한만큼이나 큰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저희 합동 뉴스에서 급하게 확인해본 바로는 오지혁 비서실장은 선도물산 00기로 공채 입사하여, 일신상의 이유로 휴직했다가, 복직 후 1년 만에 팀장을 시작으로 고속 승진을······.]

“와, 진짜 인물이네.”

“그러니까, 뻘로 저 나이에 전무 달았겠어.”

“선도그룹은 인복이 있나 봐. 저런 사람들이 입사해주고.”

합동 뉴스에서 오지혁에 대한 소개는 계속되었다.

[회사 내에 굵직한 일들을 성공시켰고, 특히 문제 있는 경영자들을 정리시키는데 전문가라는 후문입니다. 오 회장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회장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고 있으며, 직원들로부터도 꽤 존경받는 걸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딱 보니까, 저 사람 뭐라도 하나 하겠다.”

“에이~ 여기서 뭘 더해요. 이미 정점인 거 같은데.”

“회장 조카라며? 저 정도 신임이면 차기 회장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팀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국 팔은 안으로 굽습니다. 회장은 절대 못 되고요. 나중에 오 부회장이 회장 되면, 저 사람이 선도전자 대표이사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만 해도 진짜 대단한 거 같은데.”

팀장은 입맛을 다시며 대꾸했다.

“뭐······ 그게 현실적이긴 하지.”

대화하던 중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던 한 팀원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저분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그러면서 수아의 눈치를 봤다.

수아는 하지 말라는 고개를 저었으나, 이미 늦었다.

“결혼식장에서 본 거 같거든요?”

팀장은 놀란 나머지 눈이 커져서 물었다.

“누구 결혼식?”

“윤수아 대리님이요.”

“······.”

모두 놀란 얼굴로 수아를 보다가.

“에이······ 설마.”

팀장은 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고,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아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아무리 그래도, 내 남편을 부인할 수는 없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참. 저 이는 사람 놀라게 말도 없이. 호호.”

수아는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크게 웃었지만.

팀장과 팀원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선도그룹 비서실장. 그러니까 오지혁 전무님의 아내라고?!’

꿀꺽.

팀장은 수아를 불렀다.

“윤수아 대리님.”

“네?”

“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회사 왜 다녀?”

***

청주공장.

“이쪽 반도체 생산라인은 세계 최대 규모로······.”

오 부회장이 주도하여 설명했고, 톰쿡은 매사 주의 깊게 들었다.

지혁은 그런 톰쿡과 오 부회장을 번갈아 살폈다.

“다음 보여드릴 곳은 저희가 자랑하는 파운드리 기술공정입니다.”

“오~ 좋네요.”

톰쿡은 반색했지만, 지혁은 오 부회장에게 다가가 작게 한국말로 말했다.

“거긴 보여주면 안 되지 않아요?”

“뭐?”

“피치사가 저희 경쟁사라는 거 잊으신 겁니까?”

톰쿡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오 부회장은 톰쿡에게 미소지으며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지혁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오지혁.”

“······.”

“네가 뭘 알아? 반도체를 알아? 스마트폰을 알아?”

“······.”

“옷이나 만들 줄 아는 녀석이 어딜 참견질이야? 파운드리가 뭔지 들어는 봤어?”

지혁은 선도그룹 대표로 공항에 나가서 톰쿡을 맞이했고, 언론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지혁에게 뺏겼다고 생각한 오 부회장은 불쾌한 감정이 쌓여 있었고,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3차원 적층 패키지 기술을 접목, 즉 복수의 칩을 얇게 적층해서 칩의 면적을 줄이고 고용량 메모리를 장착할 수 있는 기술.”

“······.”

“VIP 접대하는데, 그 정도 공부도 안 했을까 봐요?”

간결하게 정리된 얘기를 듣고, 오 부회장은 속으로 좀 놀랐다.

“주목받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요. 선은 넘지 마세요.”

“톰쿡이 기술자도 아니고. 공정 한번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

“이런 새가슴이······ 뭐? 회장을 하겠다고?”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잔말 말고, 따라다니기나 해.”

오 부회장은 환하게 웃으며 톰쿡에게 다가갔고.

톰쿡은 웃으며 물었다.

“두 분 대화 잘 끝난 건가요?”

톰쿡의 물음에 오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네. 비서실장이 전자 쪽은 잘 몰라서요. 제가 좀 가르쳐주느라.”

“하하. 그래요?”

톰쿡은 지혁은 바라보았는데.

지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파운드리 공정을 함께 시찰한 후.

어느덧 어수룩한 저녁이 되어, 청주공장 일정은 끝이 났다.

정문 앞에 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톰쿡이 먼저 탄 후 지혁 또한 차에 타기 전, 옆에서 배웅 중인 오 부회장에게 한마디 했다.

“형님, 오늘은 좀 실망입니다.”

“뭐?”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이, 이 자식이?!”

오 부회장이 쌍심지를 켜며 한마디 하려는데, 지혁은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

호텔의 루프탑 바(BAR).

푸른 빛이 조명이 감도는 어두운 공간의 한구석.

톰쿡과 지혁은 마주 보고 앉았다.

얘기했던 대로 배석자 없이 두 사람은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공개적인 장소였으나, 손님은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얘기 편하게 해도 됩니다.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피치사에서 바를 하루 통째로 빌린 것이다.

톰쿡의 말에 지혁은 화답했다.

“이런 계획은 먼저 말씀 주셨으면, 저희가 장소를 섭외했을 텐데. 손님한테 얻어먹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하하. 서프라이즈입니다.”

톰쿡은 칵테일을 입에 머금고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비서실장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상적으로 봤거든요.”

“······.”

“세상에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게, 경영자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죠”

‘설마······.’

지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얘기를 들었다.

“피치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톰쿡은 지혁을 스카우트하고 싶은 본색을 곧바로 드러내었고.

“하하.”

지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따라서 미소 짓던 톰쿡은 지혁이 계속 웃자, 불쾌한 기분이 들어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는데.

“아, 미안합니다. 너무 황당해서.”

“······.”

“아, 뭐 그러실 수 있어요. 상황을 잘 모르시니까.”

지혁은 웃고 있지만, 안광이 빛났다.

“저는 그런 제안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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