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반가운 조력자
“인사팀장님?”
지혁은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반가워했고.
인사팀장은 90도 각도로 지혁에게 인사했다.
“비서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니까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인사팀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알아봐 주셔서 다행입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못 알아보실까 걱정했는데.”
그동안 너무 연락이 없었다는 불만 섞인 말이었고.
지혁은 그 말을 알아듣고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에이~ 삐지셨던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하하.”
지혁은 찬찬히 인사팀장을 살핀 뒤, 말했다.
“좋아 보이시네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비서실장님도 잘 지내시는 거 같던데요?”
“네?”
“뭐, 연락은 없으셔도 TV에 얼굴도 비치고 하시니까. 안색은 살피고 있었거든요.”
“······.”
지혁은 피식 웃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삐진 거 맞네.’
다시 걸음을 떼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비서실장님께서 하도 연락이 없으시니, 제가 직접······.”
“적당히 하세요.”
“흡. 네.”
지혁이 짧게 한마디 하자, 인사팀장은 식겁해서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오늘 그룹 전체 인사책임자 회의가 있어서 왔습니다.”
“아~”
그룹 차원에서 정기적인 인사 부서 모임을 한다.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그럼, 선도물산 인사 대표로 오신 걸 텐데. 실장님은요? CHO님이 오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인사팀장은 서운한 기색을 확 보였고.
이제야 지혁은 눈치를 챘다.
‘아······ 얼핏 본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인사발령 공지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인사실장님 되셨죠.”
“기억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
지혁은 이번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헛기침했다.
“흠! 안 그래도 뵈면 제가 승진 선물이라도 해드리려 했는데.”
지혁은 빙그레 웃었고.
인사실장도 서운함을 풀고 따라서 웃었다.
“그럼 이제 이사님이시죠? 임원 되셨네요.”
인사실장은 지혁라인 중 최초로 임원이 되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모두 비서실장님 덕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인사실장님이 잘하셔서 그런 거죠.”
지혁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실장은 두 손으로 지혁의 손을 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선도본관을 향해 걸으며, 지혁이 말했다.
“인사실장님은 워낙 탁월하셔서 알아서 잘하시네요.”
“네? 하하. 아닙니다. 부대표님이 신경 많이 써주셨습니다. 그게 다 비서실장님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두 남자는 선도본관 로비로 들어섰다.
***
“어떻게 아셨어요?”
지혁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현재 영업본부장이었던 한원철 전무가 선도물산 부대표를 맡고 있다.
사랑산성에서 지혁, 오혜진 사장, 한 전무와의 회동 이후.
오혜진은 숨기지 않고 적극적인 행보를 했으며.
한 전무를 전면에 내세워, 힘을 실어줬다.
이미 선도물산을 실권을 잡고 있던 그는, 부대표로 취임하면서 힘이 더 실렸고.
말이 부대표지, 영향력으로 따지면 실질적인 대표나 다름없었다.
지혁은 선도그룹의 지주회사인 선도물산을 신경 쓰고 있었기에, 한 전무와 간간이 연락하고 지냈으며
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챙겨달라고 요청했다.
지혁과 오혜진.
두 세력은 힘을 합쳤고, 지혁의 사람은 곧 오혜진이 챙겨야 할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 여파로 선도물산에 남아 있는 지혁라인 중, 인사팀장은 임원 승진과 함께 실장이 되었고.
생산팀장인 하재웅 부장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명색이 인사실에 있는데.”
“그럼 그동안 제가 연락 잘못 드린 거, 안 미안해해도 되겠네요.”
“하하.”
인사실장은 어색하게 웃은 뒤, 카페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서실장님, 저랑 커피 한잔하고 가시죠.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서운해서 저 오늘 잠 못 잡니다.”
인사실장은 한결같다.
지혁을 어려워하지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건 똑같았다.
“그럴까요?”
지혁 또한 그럴 생각으로 카페 쪽으로 살짝 걸음을 옮겼는데.
-어머! 어머!
-비서실장님~!
-어뜨케. 어뜨케.
-실물 미쳤다.
-능력도 좋은데, 얼굴까지 이러면 사기 아니야?
지혁을 발견한 직원들이 웅성이며, 모여들었고.
이런 반응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오늘 좀 심한데?’
-어제 TV 봤어?
-화면발도 잘 받으시더라.
-아무래도 회사 간판으로 보여야 하니까, 부회장님보다 좀 더 잘생긴 비서실장님이 공항 가신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그럼 잘생긴 사람이 회장 하게?
수군거림을 좀 더 듣다 보니 이해되었다.
‘어제 톰쿡과의 만남 때문이구나.’
“비서실장님 항상 이래요?”
인사실장은 주위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옆에 있는 본인까지 민망할 정도였다.
‘선도물산 때와는 차원이 다르네.’
1층 로비 카페는 외부인 출입이 가능했는데.
웬, 여고생들이 난리였다.
-실물 개 잘생겼어.
-그러니까. 톰쿡 보려고 TV 봤다가, 저 아저씨한테 시선 뺏겨버렸잖아.
-사인받을까?
인사실장은 여고생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교복 입은 거 보면 학생은 맞는 거 같은데, 학교 안 가고 여기 왜 있는 걸까.’
“인사실장님.”
“네?”
사람들은 점점 몰려들었고. 이젠 가까이 있어도 말소리가 서로 잘 안 들릴 정도였다.
“평소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어제 TV 나왔더니 좀 심하네요.”
“아······ 네.”
지혁은 재빨리 몸을 게이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커피는 이따가 제 방에서 마시죠. 회의 끝나고 오세요. 비서실장실 어딘지 알죠?”
지혁이 게이트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인사실장은 생각했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
회장실.
똑똑.
[비서실장입니다.]
“들어오게.”
뚜벅. 뚜벅.
지혁이 안으로 들어왔고, 회장실 안은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제 TV로 잘 봤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지혁은 곧바로 보고서를 펼쳤다.
“일일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지혁은 여느 때처럼 오 회장의 집무 책상 앞에 서서, 일일 보고를 진행했고.
오 회장 또한 평소처럼 보고받았다.
한가지, 분위기는 좀 달랐는데.
냉랭했다.
평소와 다른 말을 하거나, 말을 적게 하는 것도 아닌데, 분명 뭔가 달랐다.
오 회장과 지혁. 둘 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가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으며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톰쿡과의 관련된 얘기가 일일 보고의 대부분이었는데.
오 회장은 얘기를 다 들은 후.
“그래, 수고 많았네.”
“네.”
“근데, 그게 다야?”
“네?”
“저녁에 따로 시간 안 가졌나?”
지혁의 일일 보고에는 청주공장 방문까지만 포함되어 있었다.
배석자 없이 술 한잔했던 내용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
“톰쿡 대표와 가볍게 술 한잔했습니다.”
“그 얘기는 왜 안 하지?”
“업무가 아니었으니까요.”
“······.”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오 회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회사 경쟁사 대표와 술 한잔하는 게 개인적인 일인가?”
“······.”
“술은 누가 샀는데?”
“피치사에서 제공했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는 거지?’
문득, 자기 뒤를 밟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오 회장은 연륜이 깊은 사람이었고, 그의 경험에 비추어 일련의 과정을 짐작하고 물은 거였다.
“협력사와의 술자리는 그룹에서 지양한다는 거 모르나?”
“피치사가 우리 회사의 서플라이어도 아니고요. 바이어한테 술 한잔 얻어먹은 게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로 생각하여 초대에 응했습니다.”
“······.”
“그래도 문제가 된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지겠습니다.”
오 회장은 지혁을 가만히 노려보았고.
지혁은 피하지 않았다.
“아주 당당하구나. 건방져 보일 정도로.”
오 회장의 시선이 달라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혁의 이런 당당한 모습을 좋게 평가했었다.
지혁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오 회장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적어도 오 회장, 즉 큰 아버지께는 면전에서 반박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후유-
오 회장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지혁아, 우리 꼭 이렇게 해야 할까?”
“······.”
지혁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뭘······ 말씀이십니까?”
오 회장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지혁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 회장 또한 모르지 않는다.
“아니다. 됐다.”
“······.”
“그만, 나가 보렴.”
“네.”
***
똑똑.
“들어오세요.”
비서실장실.
인사실장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지혁은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여기가 그 유명한 비서실장실이군요. 선도그룹에서 가장 핫한 곳.”
“하하. 하여간, 한결같으셔. 앉으세요.”
지혁은 인사실장의 과장된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커피 드실 건가요?”
“앉아 계십시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지혁이 말리기도 전에 인사실장은 커피잔 있는 곳에 가 있었다.
“앉아 계세요. 손님인데.”
“비서실장님이 주시는 건 불편해서 못 마십니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뭐 드실래요? 말씀 안 하시면 제가 알아서 드릴 겁니다.”
지혁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립니다.”
“네!”
“······.”
지혁은 인사실장이 건네는 커피잔을 받으며 생각했다.
‘은근히 인사실장한테는 말리는 기분이라니까. 결국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은 안 나쁘고.’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선도물산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시죠? 요즘 회사 이슈가······.”
이번에도 지혁이 묻기도 전에, 가장 궁금해했던 걸 알아서 먼저 얘기했고.
지혁은 그의 얘기를 잠자코 들은 후 말했다.
“확실히 대표님 힘이 빠졌네요.”
“거의 식물입니다. 그건 저희로서는 좋긴 한데······ 지금 선도물산은 고래 싸움에 껴있는 새우 같은 형세라, 실적과 경영에 집중을 못 하고 있습니다.”
“······.”
“대표는 힘을 못 쓰고, 그렇다고 부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것도 이상하고요.”
인사실장은 지혁의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속마음을 얘기했다.
“비서실장님 같은 분이 선도물산 대표로 오면 참 좋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시고요.”
“아, 혼잣말이었는데 들렸습니까? 하하.”
인사실장은 민망함을 큰 웃음으로 무마했다.
“아, 실장님. 요즘 오 부회장님이 ‘인사이드 갤러리’에서 핫한 거 아세요?”
“네?”
지혁이 인사이드 갤러리를 몰라서 되묻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오 부회장이 거론되고 있다는 게 생소했다.
“거기에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가 있는데요. 요즘 오 부회장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거든요.”
“그건 어떻게 아세요?”
“전 인사담당자이지 않습니까. 인적정보 관리하는데, 경계는 없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왜 그분 이름이 오르내리는데요?”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는 보통 가십거리 위주의 글이 올라오거든요.”
“······.”
“청주공장에서 할머니 병원 보낸 얘기로 장작 넣고 있는 갤러들이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