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84화 (184/301)

184. 비난 (1)

최 부회장은 지혁이 건넨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선도전자의 망아지.』

『부모 잘 만난 게 유일한 자랑인 인간.』

『위아래도 없는 쓰레기.』

.

.

.

.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

활활 불타고 있었다.

제목을 클릭하여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제목들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 뻔히 짐작되었다.

이 뜨거운 분위기에 최 부회장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와······엿 됐네.”

자신도 모르게 교양 없는 말이 나왔다.

꿀꺽.

자연스럽게 ‘땅콩 회항’ 사건이 떠올랐고, 거기에 오 부회장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진짜······ 인정사정없구나.’

처음에 최 부회장은 지혁이 협박할 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살짝 문제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 뒤, 오 부회장 혹은 오 회장에게 압박하는 그림말이다.

오 부회장도 연일 오 씨며, 지혁도 연일 오 씨다.

오너일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말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후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지만, 개인적으로 오랜 인연을 맺어온 오 회장이 곤란을 겪는 일은 원치 않았다.

‘내가 사람을 얕게 봤어.’

지혁을 바라봤다.

최 부회장의 상식을 넘어선 사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다.

“자네······ 진짜로 끝까지 갈 생각은 아니지?”

“······.”

“어느 정도 가다가 멈출 생각이지?”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부회장님.”

“······.”

“삼국지 아시죠.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조조를 속이기 위해 황개를 가짜로 때리던가요?”

꿀꺽.

최 부회장은 대꾸하지 못했다.

“아니잖아요. 죽도록 패잖아요.”

“······.”

“모든 일은 진정성이 있어야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엔, 주유가 황개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를 택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요. 감정이 실려야 더 리얼하니까.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의 말을 들으며 최 부회장은 생각했다.

‘그냥······ 말을 말자.’

이젠 말릴 수도 없고, 지혁의 행동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게 조심히 하는 것 같더라니.’

오 부회장을 대할 때면 신중했고, 감정을 숨기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폭주 기관차 같았다.

“진양 형님 인기 많네~ 장작 살짝 넣었더니 타오르는 거 보니까요.”

이 와중에 지혁은 웃고 있었다.

“쌓은 덕이 많은가 봐요. 하하.”

최 부회장은 웃고 있는 지혁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

최 부회장은 게시글 몇 개를 클릭하여 읽어보았는데.

욕이 섞여 있는 건 기본이고, 내용이 장난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자극적으로······.’

지혁은 최 부회장을 향해 말했다.

“거기 있는 글들 저희가 작업한 거 아닙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장작만 몇 개 올렸을 뿐이에요.”

“······.”

“그냥 진양 형님이 인기가 좋은 겁니다.”

“이런 인기는 전혀 달갑지 않겠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진양 형님이 좋은 이미지를 쌓아온 덕도 있겠지만, 국내 최대 그룹의 재벌 2세라는 게 한몫했죠.”

『개새끼가 부모 잘 만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어른 공경할 줄 알아야지. 나이를 어디로 처먹은 건지······.』

『내가 보기엔 직원을 애완견 취급하는 듯. 기본적인 인격 존중이······.』

최 부회장은 읽어갈수록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원래 이렇게 원색적이야?”

“이런 곳이니까요.”

『선도그룹에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최 부회장 있잖아. 그 사람이 오진양이 구두 잘 닦아줘서 그 자리 갔다는 말이 있어······ 업무 능력은 그냥 그런데, 그렇게 비위를 잘 맞춘다고.』

『오랜 기간 자리 지키는 거 보면 뭔가 있겠지. 최 부회장 구두 닦는 거 말고도 다른 재주가 있는 건 아닐까? ㅎㅎ』

최 부회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여기 내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

“그것도 사실과도 전혀 다른 얘기를. 내가 오 부회장 구두를 왜 닦아줘?!”

지혁에게 따지듯이 물었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얘기했죠. 지금 올라오는 글 대부분이 유동닉들이 자발적으로 올리는 거라고.”

“유동닉이 뭔데?”

“그냥 어그로에 환장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돼요.”

지혁의 말을 듣고 보니, 아이디가 대부분 ‘ㅇㅇ’이었다.

“이거 혹시 다 같은 사람이 쓰는 건 아니지?”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 최 부회장은 작성자가 대부분 ‘ㅇㅇ’로 되어 있으니, 같은 사람이 올리는 건 아닌지 착각될 만했다.

지혁은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사실이 아닌 건 못하게 해야 하지 않아? 여기엔 관리자 없나?”

지혁은 싱긋 웃고 대답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당사자와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죠.”

“우리가 알잖아.”

지혁은 쓴웃음 짓고는 말했다.

“지금 저더러 아니까 막으라는 건가요? 굳이? 왜?”

“······.”

“그런 글 쓰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유동닉들이 갤질하며 노는 것이며, 더군다나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굳이 내가 왜요?”

최 부회장은 못마땅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지만.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방은 얼마 전에 근거 없는 얘기를 사실인 양, 그것도 직접 퍼뜨렸어요. 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요?”

따져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지금 여파로 봐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이 커뮤니티에서 거론되고 있는 청주공장 폭행 건도 오 부회장이 실수한 일이에요. 그게 불씨를 남긴 거고요.”

“아무리 그래도······.”

지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작은 분명 오 부회장이 먼저 했어요.”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지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방이 반칙하는데, 나 혼자 페어플레이하는 건 병신 짓이죠.”

***

다음날.

오 부회장은 선도본관 1층에 도착했다.

금일 선도전자 예산미팅이 있어서, 업무 목적으로 방문한 건데.

‘그 자식 마주하기 싫은데.’

지혁만 만나면 기분이 안 좋아져서 되도록 선도본관에 오는 걸 피하고 있었다.

덜컹.

추 이사가 차 문밖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부회장님, 가시죠.”

추 이사는 오 부회장의 완전한 최측근이 되었고.

그가 다니는 곳엔 항상 동행했다.

차 밖으로 나가려고, 오 부회장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툭.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허리가 헐거워진 기분을 느꼈는데.

“음?”

재빨리 허리춤을 살펴보니, 혁대가 끊어져 있었다.

오 부회장은 곧바로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뭐야, 기분 나쁘게.’

정장을 십수 년째 입고 있지만, 혁대가 끊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추 이사도 당황하여 말했다.

“제 거 빼서 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오 부회장은 남의 것을 쓰는 걸 아주 싫어한다.

추 이사는 옆의 비서에게 재빨리 지시한 후 말했다.

“백화점 가서 하나 사 오라고 했습니다. 금방 올 겁니다. 일단 움직이시죠.”

“······ 그래.”

오 부회장은 바지춤을 추켜올리고, 허리가 보이지 않도록 재킷 단추를 다 채웠다.

1층 로비에 들어섰는데.

“······.”

그의 등장과 함께 왁자지껄하던 1층 로비가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뿐만 아니라, 로비에 있던 외부인들도 마찬가지로 조용해졌다.

대한민국에서 오 부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뚜벅. 뚜벅.

이런 시선이 낯설지 않기에.

오 부회장은 개의치 않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흠······.’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대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는데.

부회장 자리 정도에 있으면, 사람들의 표정과 웅성임만으로도 분위기 파악은 할 줄 안다.

평소와 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낯짝도 두껍다.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어디선가 자신을 향해 하는 소리인지, 본인들끼리 하는 말인지 모를 수군거림이 들렸다.

‘하아······ 오늘 여러모로 불쾌해.’

오 부회장은 입맛을 다시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예산미팅을 마치고.

선도전자로 돌아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대기 중인 차를 향해 다가가는데.

“형님!”

오진원이 차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

오 부회장은 어릴 적부터 오진원을 비교적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그가 지혁의 뒤에 서기로 한 이후부터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웬일이냐?”

퉁명스럽게 오진원을 맞았고.

그와는 달리 오진원은 해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은요. 형님 기다리고 있었죠.”

“왜?”

추 이사를 비롯한 비서들이 차 주변에 대기 중이었고.

오진원은 그들의 눈치를 본 후 말했다.

“오셨다는 얘기 듣고 잠깐 뵈었으면 해서요.”

“지금 봤잖아.”

“잠깐 시간 되세요?”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오 부회장은 오진원이 불편했고,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나 만나 보라고 지혁이가 시키든?”

“······.”

오진원은 슬픈 얼굴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그런 게 아닌데.”

오 부회장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지금 너 못 믿는다.”

“······.”

“나에게 뭔가 하려 하지 마.”

옆에서 추 이사도 오진원의 태도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좀 이상한데.’

오진원이 좋은 사람인 건 선도그룹 직원들이 다 안다.

그런 그가 슬픈 얼굴로 오진양을 보고 있는 게 좀 이상했다.

추 이사가 말했다.

“부회장님, 일부러 나와서 기다리셨는데, 잠깐 얘기 나누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싫어.”

“그러지 마시고.”

“싫다니까.”

오 부회장은 사람 말을 더럽게 안 듣는다.

마음을 정한 이상, 아무리 최측근이 말해도 소용없었다.

쾅!

차 문을 닫았고, 곧바로 차는 출발했다.

오 부회장은 백미러로 힐끔 뒤를 보았다.

오진원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

“홍 팀장님!”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 팀.

선도그룹은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기에 이 팀은 항상 정신이 없다.

여기저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홍 팀장은 팀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홍 팀장님!”

“아, 왜!”

팀원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은 불러대니, 홍 팀장은 자기 이름 부르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톰쿡 대표 청주공장 방문 건 관련하여, 최종 보도자료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검토해 주셔야죠.”

“뭘 검토해. 이미 미국 돌아갔잖아. 특별한 내용 없으면 그냥 언론에 넘겨.”

팀원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톰쿡 대표 보도자료인데······ 저 살 떨려서 그렇게는 못 합니다.”

“······.”

홍 팀장은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나중에 팀장님처럼 임원이 되면, 달라져 보겠습니다.”

홍 팀장은 석 달 전에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했다.

“참, 말이라도 못 하면. 가져와 봐.”

“화면에 띄워 놨습니다. 제 자리로 가서 보시죠.”

홍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팀원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확인한 후, 자리로 돌아왔는데.

“뭐야, 이게?”

생소한 화면이 노트북의 스크린을 채우고 있었다.

‘인사이드 갤러리?’

홍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난 회사 컴퓨터로는 이런 데 방문 안 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이트 창을 닫으려다가.

한 문구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

마우스를 잡은 손이 멈추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