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막싸움 (2)
“원하는 거요?”
오 회장의 눈빛이 매섭고 날카로웠다.
지혁은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회사 내규대로 하길 바랍니다.”
“왜지?”
회의실은 조용했다.
오로지 오 회장과 지혁의 목소리만 울렸다.
“너무 당연한 걸, 왜냐고 물으시니 좀 당혹스럽네요.”
지혁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직원이라면 회사 내규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 부회장님도 선도그룹의 직원입니다. 그걸로 이유는 충분해 보입니다.”
“후후.”
오 회장은 여전히 지혁을 노려본 채로 웃었다.
“이 사람이 나랑 지금 말장난하려 하네.”
“······.”
“내가 그 당연한 걸 몰라서 묻나? 진짜 원하는 게 뭐냐고.”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명 좀 전까지는 지혁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오 회장이 공격하고, 지혁이 방어하는 형국이었다.
“전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회사 내규대로 처리되길 바랍니다.”
“그래?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회의실에 마치 오 회장과 지혁 두 사람만 있는 듯했다.
“오 부회장이 회사 내규대로 징계를 받게 된다면, 어떤 파급력을 기대하나?”
“그건 모릅니다.”
순진한 얼굴로 답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욕보인 대표이사의 폭행 사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이 날카로운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정말? 난 자네 속이 보이는데?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을걸?”
경쟁자인 오 부회장을 쳐내고,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서려는 그의 속마음을 말한 거였으나.
지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회의 참석자들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회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대신 설명해주실 분 계십니까?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고 하셔서 묻습니다.”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대화에 누구도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지혁은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회장님. 지금 중요한 사안에 대한 회의 중입니다. 저 또한 오 부회장 일에 대해 개인적인 감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좀 전에 오 회장이 말한 ‘속이 보인다’라는 표현을 비꼬려는 거였다.
“이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
오 회장은 입을 꾹 다물고 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아, 하려거든 속내를 밝히고 제대로 해라.’
‘회장님, 오 부회장 먼저 죽이고요.’
두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의 심정을 주고받았다.
지혁과 오 회장.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충분히 통하는 사람들이다.
***
“아무래도 이 사안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할 것 같네요. 당사자 얘기를 좀 더 들어봤으면 하는데.”
지혁은 오 회장이 쉽게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그의 약점을 건드리려 했다.
오 부회장.
현 상황에서는 오 부회장이 오 회장의 취약점이다.
“부회장님.”
이제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걸어 다니며 말했다.
칼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음?”
오 부회장은 깜짝 놀라서 지혁의 말에 대답했다.
“억울하십니까?”
“모르겠어.”
“네? 억울한지 모르겠다고요?”
“딱히, 할 얘기가 없어.”
지혁은 주제를 바꿨다.
“할머니 밀친 영상 같이 보셨는데. 그때 왜 그렇게 밀치신 겁니까?”
“잘 기억이 안 나네.”
“뭐라고요?”
“······.”
“좀 전에 영상에 나온 사람 부회장님 아니에요?”
“글쎄······나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오 부회장은 말을 돌렸다.
장·차관 인사철이면 TV 청문회를 통해 봤던 익숙한 모습이었는데.
지혁은 꽤 당황스러웠다.
오 부회장이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예상 못 했다.
‘부회장님 잘하고 계십니다.’
오 부회장 뒤에 앉은 추 이사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지혁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추 이사 짓이구나.’
좀 전에 오 회장과 지혁이 언쟁을 벌일 때, 추 이사는 오 부회장 옆으로 다가가서 다시 한번 상기시켰었다.
‘공격 들어올 겁니다. 무조건 대답 피하십시오.’
지혁은 지금 오 부회장보다 추 이사가 더 신경 쓰였다.
“하하. 재밌네.”
크게 한번 웃은 뒤, 앉아 있는 오 부회장 바로 뒤.
오 부회장과 추 이사 사이에 섰다.
“선도전자에서 제대로 산재 처리 못 받은 직원들이 수십 일 동안 시위하는데, 얘기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을 무시하며, 심지어 시위 과정에서도 단체로 몸싸움을 벌였죠.”
“······.”
“그 과정 중에 딸 잃은 슬픔으로 시위에 참여한 할머니가 부회장님께 다가가자, 땅바닥에 패대기치셨고요.”
오 부회장은 가만히 있었지만,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의 유동닉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죠. 노약자를 그렇게 패대기치는 사람을 개념이 있다고 보긴 어렵거든요.”
‘개념 없는 새끼’라는 말을 부드럽게 표현했다.
“그래도 저지른 짓이 무서웠는지, 할머니한테 돈 먹여서 입 막고. 너튜브에 영상 올린 사람한테도 돈 먹여서 내리고.”
“······.”
“돈 많은 사람은 세상 살기 참 쉽네요. 돈만 먹이면 되니까.”
지혁은 참석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까요. 그것도 선도전자의 대표이사께서.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닥쳐······.”
끓어오르던 오 부회장의 한계치가 넘어서고 있었다.
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오 부회장을 바라보았다.
“제가 한 얘기 중에 틀린 거 있습니까?”
“······.”
“아, 또 모른다고 하시려고요? 기억이 안 난다든지.”
“······.”
“젊은 나이에 참······ 집무실이 아니라, 요양원에 계셔야 하는 게 아닐지.”
“닥치라고!”
결국, 오 부회장은 폭발했고.
벌떡 일어나 지혁의 멱살을 잡았다.
지혁은 가만히.
멱살을 잡힌 채로 오 부회장을 노려보았다.
“손버릇이 나쁘시네. 너무 능숙해 보이는데요?”
“닥치라고 했다. 이 개새······.”
오 부회장이 이성을 잃고, 쏟아내려 했고.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지혁은 속으로 웃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뒤에 앉아 있던 추 이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정말 죄송합니다!”
“······.”
“다 제가 오 부회장님을 부추겨서 생긴 일입니다.”
지혁은 또 한 번 놀랐다.
“죄송합니다!”
***
죄송하다며 소리치는 추 이사를 보며, 지혁은 생각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육탄방어.
말 그대로, 오 부회장을 살리기 위해 추 이사는 몸을 던졌다.
회의실에 있는 참석자들 모두 놀랐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추 이사의 행동은 예상을 벗어난 거였다.
“당시에 할머니를 밀친 건, 위협이 생겼을 때면 망설이지 말고 뿌리치시라고 제가 말씀드렸던 거였고. 돈 들여서 너튜브 영상 지운 것도 다 제가 계획한 일입니다.”
‘일개 이사가······ 단순히 징계로 끝나지 않을 텐데.’
지혁은 추 이사의 행동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 부회장이 살려줄 거로 생각하는 건가? 혹시 이것도 입을 맞춘 건가?’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 부회장도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지혁은 한숨을 쉬며 아쉬워했다.
‘흐름 끊겼어. 오늘 추 이사가 여러모로 놀라게 하네.’
하지만, 곧 눈빛이 차가워졌고, 계획을 수정했다.
‘목을 베지 못하면, 팔다리라도 끊는다.’
“추 이사님. 지금 하신 말씀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추 이사는 고개를 숙였고.
지혁은 곧바로 윤리경영팀장을 바라봤다.
“팀장님, 추대웅 이사의 권고사직을 건의드립니다.”
“?!”
오 부회장은 얼굴은 확 굳었고.
추 이사 놀라서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대표이사를 기만했고, 인사 관련 문제로 그룹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권고사직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걸림돌이었던, 추 이사를 오 부회장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윤리경영팀장이 말했다.
“비서실장님 주신 제안은 접수했고요. 내부 규정에 따라서 적합성 확인 후, 인사팀에 안건 올리겠습니다.”
“네. 방금 추 이사 본인의 입으로 실토한 내용을 반드시 기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들으셨습니다.”
이렇게 지혁은 윤리경영팀장도 압박했다.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칼을 뽑은 이상 상대방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줘야 했다.
***
지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람을 쓰는 것도 경영자의 책임입니다.”
참석자들은 이런 지혁을 보며 속으로 좀 질렸다.
‘힘들지도 않나 봐.’
‘보는 내가 지친다.’
‘그냥 칼잡이네. 칼잡이야.’
‘앞으로 비서실장은 무조건 조심해야지.’
오 부회장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추 이사 탓만 하실 겁니까?”
“······.”
“경영자시잖아요.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지혁도 사실 힘들었다.
하지만, 한번 물은 이상, 최대한 힘을 빼놔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부회장님이 직접 말해보십시오.”
“······.”
오 부회장은 전의를 상실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넋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지혁의 얼굴도 보기 싫었다.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만 좀 해라. 힘들다.’
하지만, 지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렇게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추 이사의 육탄방어로 그의 책임이 좀 덜해지긴 했지만.
선도전자의 대표로서 한 일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책임은 져야 했다.
오 부회장은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뻔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당분간 근신하거나.’
‘선도전자 대표가 아닌 다른 직책으로 가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오너일가의 이름으로 이 모든 일을 뭉개거나.’
지혁은 마지막 선택지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례를 조심해야 해. 오너일가라고 해서 한번 뭉개면, 다음에 또 그럴 거야.’
그 일만은 막기 위해, 계속 오 부회장에게 융단폭격을 퍼부었고.
오 부회장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였으며, 그 대신 오 회장의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얼굴에 핏기마저 사라지고 있었는데······.
“비서실장님, 인제 그만하시죠.”
최 부회장이 나섰다.
“네?!”
지혁이 무서운 눈으로 최 부회장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지혁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자네가 잃을 것도 생각해야지.”
지혁은 지금 반쯤 눈이 돌아가 있는 상태였고.
최 부회장의 말에 주변을 돌아봤다.
참석자들인 계열사 대표와 미래기획실 주요 직책자들이 기겁한 얼굴로 지혁을 보고 있었다.
“회장님.”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을 나직이 불렀다.
“일어나시죠.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흠······.”
오 회장은 최 부회장의 손을 잡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최 부회장은 회의 참석자들을 향해 말했다.
“오 부회장님 징계 건 관련해서는 제가 회장님 뜻 전달받아서 윤리경영팀에 얘기하겠습니다. 회의 해산할게요.”
후유-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을 부축하여 지혁 옆을 지나가다가.
“이따가 내가 부르면 회장실로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