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책임은 져야지 (1)
오 회장과 최 부회장이 나간 뒤에도,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오 부회장과 지혁이 아직 자리에 있으므로.
“부회장님 일어나시죠.”
추 이사가 오 부회장에게 다가갔고.
“어······ 그래.”
일어날 때 추 이사가 거들어줬다.
오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지혁을 경계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를 두려워하진 않았었는데.
이번 일로 이젠 지혁이 완전히 달리 보였다.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지혁 쪽을 향해선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기를 죽여놓긴 했는데, 조심성도 키워준 건 아닐지 모르겠네.’
지혁은 냉정하게 이 상황을 관망했다.
‘그래도 추 이사가 분리되었으니까.’
오 부회장 측에서 가장 껄끄러웠던 인사를 정리했기에, 성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회의실을 나갔고.
회의실에 남은 참석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감정이란 게 있는 사람일까.
-이 와중에도 웃는 게 참······.
-뻘쭘해서 일부러 미소 지은 거겠지.
-보면 몰라요? 그거 아니잖아.
참석자들은 피곤한 얼굴로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실차장님.”
오진원의 옆에 앉은 선도증권 대표가 불렀다.
“실차장님?”
딴생각에 빠져있던 오진원은 뒤늦게 대답했다.
“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회의 끝났는데.”
다 나가고, 회의실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가시죠. 피곤한데, 저랑 커피 한잔 어떠세요?”
“좋죠.”
평소의 오진원답지 않게, 표정이 어두웠다.
선도증권 대표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생각했다.
‘자기 형제들끼리 난리를 쳤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지. 오 회장님 안색도 안 좋아졌고.’
선도증권 대표는 재촉하지 않고, 좀 기다렸다.
“실차장님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
이 질문에 오진원은 눈을 내리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도증권 대표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고,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늘 일······ 좀 심한 것 같긴 합니다.”
“······.”
“두 분 다요.”
“······.”
“실차장님 마음이 좀 불편하시겠어요.”
선도증권 대표는 실차장을 위로했다.
“비서실장님이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분이긴 한데······ 이럴 때 보면 좀······.”
그 뒤에 ‘불안하다’라는 말은 생략했는데.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도 비서실장님을 지지하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잠자코 듣던 오진원은 선도증권 대표의 말을 끊었다.
“부회장님이 심했죠.”
“네?”
“이건 부회장님이 잘못한 일입니다. 비서실장은 그 일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약간 과격했을 뿐이고요.”
“아······ 네 그렇죠.”
오진원 또한 오늘 지혁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한 녀석이잖아.’
지혁이 성향 자체가 그렇다는 걸 잘 알기에 믿기로 했다.
“그럴만한 일이었으니까요. 곡해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 네.”
선도증권 대표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오 회장실.
최 부회장은 그를 자리에 앉힌 뒤, 바로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두 사람은 할 얘기가 있었다.
후유-
오 회장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고.
최 부회장 또한 소파에 앉은 상태로 팔을 무릎에 걸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상태로 시간이 꽤 흐른 뒤.
“자네도 함께 계획한 일인가?”
오 회장이 입을 열었고.
최 부회장은 짧게 대답했다.
“네.”
‘계획’했냐는 질문.
최 부회장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미 다 끝났으니까.
“하지만 모든 걸 계획했다고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운만 띄운 거고, 나머진 대중들이 알아서 움직인 거니까요.”
“······.”
“잔인하게 들리실진 몰라도······ 이 일의 본질은 오 부회장이 자초한 겁니다.”
오 회장도 윤리경영위에서 봤으니 잘 알고 있다.
이 일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
“······.”
“자네들 목적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
“너무 하잖아? 이렇게밖에 못 하겠어? 이게 최선이야?”
최 부회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룹을 위해서입니다.”
“뭐? 그룹을 위해서 이런 분란을 만든다고?”
“······.”
“오 부회장이 급진적인 성격에 좀 실수하긴 했지만, 어쨌든 선도전자 대표이사잖아. 지금 선도전자에 문제 있나? 회사 잘만 굴러가고 있는데?”
최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대로만 간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그를 후계로 세우신 게 문제입니다.”
“······.”
“제가 방금 말씀드렸죠. 그룹을 위해서라고요. 선도전자를 위해서 벌인 일이 아닙니다.”
오 회장은 입을 꾹 닫았다.
“사람마다 정해진 그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 부회장은 유능한 사람이지만, 그 위에 아무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
“회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다른 사람 말을 안 들으며, 의사결정이 급진적일 때가 많다는 걸요.”
오 회장은 최 부회장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람이 위에 아무도 없는 자리에 앉는다면. 이 회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쉽게 예상되지 않습니까?”
최 부회장은 작정한 듯, 솔직한 얘기를 쏟아내었고.
오 회장은 듣는 내내, 뒷골이 서늘했다.
‘아주 철저히 숨기고 있었구나.’
최 부회장은 오 회장의 가장 가까운 부하직원이자, 동료인 사람이다.
본인과 완전히 다른 뜻을 품고, 수십 년간 일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제부터였나?”
그런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걸 물어본 거였고.
“오진원이 아닌 오 부회장을 후계로 정하셨을 때부터입니다.”
최 부회장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트라우마에 갇혀서 사실 겁니까?”
“······.”
“회장님도 아시잖아요. 오진양은 아니라는 거.”
***
오 회장은 생각에 잠겼고.
최 부회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하는 중에 무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수십 년간 함께 일한 동료가 회사와 회장님을 위해 한 말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따닥. 따닥.
오 회장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고.
그 소리로 회장실 안은 더 적막감이 흘렀다.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네.”
“······.”
“근데, 한 가지 심각한 오류가 있어. 자네가 뭔가 나와 딜을 해보려는 거 같은데.”
오 회장은 최 부회장을 쏘아보았다.
“협상이란 건 테이블 위에 놓일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는 거야.”
“······.”
“진양이가 선도그룹의 후계로서 부적격하다? 그건 거론할 수 없는 얘기야.”
최 부회장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어쩔 수 없는 거구나.’
오 회장은 계속 말했다.
“감상을 들어주는 건 오늘뿐일세. 그 얘기를 앞으로는 꺼내선 안 돼.”
피식.
오 회장은 콧방귀를 뀌고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지혁은 적합하다는 거야? 일 잘하고 눈치도 빨라. 나이에 비해 통찰력도 있다는 것도 인정해.”
“······.”
“근데, 걔가 경영자로서 보여준 게 있어? 뭘 믿고 그룹 총수를 시키자는 거지?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솔직히 진양이와 오지혁 둘 중에 누가 더 불안한가?”
오 회장의 말이 전혀 틀리진 않지만, 최 부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는 비서실장을 높게 평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 부회장과 가장 큰 차이는······.”
“······.”
“적어도 비서실장은 아랫사람을 생각할 줄 압니다. 그룹 총수는 아래만 봐야 하는 사람인데, 오 부회장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오 회장의 표정이 굳고,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최 부회장이 말했다.
“전 지금 다음 후계 자리로 누가 적격한지가 아니라, 오 부회장은 부적격하다는 걸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
“오늘 홍 팀장이 발표한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 관련된 건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오 부회장은 일을 저질렀고 그걸 또 숨기려고 했었죠.”
오 회장은 어금니를 깨물고, 깊은 신음을 내었다.
“이건 책임져야 합니다. 혹시 없던 일로 넘어갈 생각은 아니시죠?”
“······.”
“그룹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입니다. ‘땅콩 회항 사건’ 못지않을 여파가 올 수 있습니다.”
“흠······.”
오 회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책임져야 하는 건 맞아. 하지만, 진양이가 지금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간 돌아오기가······.’
“한 가지 물어보지.”
“네, 말씀하십시오.”
“진양이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면, 커뮤니티에서 거론되고 있는 것들은 깔끔하게 무마시킬 수 있나?”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만?”
“정확한 건 비서실장과 대화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오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보고 지금 지혁이를 만나라고?”
“키를 잡은 사람은 비서실장입니다. 저는 이 일이 계획되어 있었다는 것만 알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 압니다.”
“······.”
후유-
오 회장은 짜증 섞인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만나기 불편했다.
‘내가 어쩌다가 그 어린 녀석을 피하게 된 거야.’
“부를까요? 아니면 내일 만나시겠습니까?”
오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이 찝찝한 기분을 내일까지 가져가고 싶진 않아.’
“지금 부르게.”
“네.”
***
지혁은 회장실을 향해 걸어가며, 최 부회장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봤다.
[기회야. 잘 생각하고 들어와라. 말 너무 심하게 하지 말고.]
지혁은 피식 웃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현실성 있는 제안이 무엇일지도.
똑똑.
“비서실장입니다.”
[들어오게.]
오 회장 대신, 최 부회장이 대답했고.
덜컹.
지혁은 안으로 들어가, 오 회장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오 회장은 대꾸하지 않았고.
최 부회장이 지혁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앉게.”
“네. 근데, 부회장님도 계속 계실 건가요?”
“뭐?”
“회장님과 저. 둘이 대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집안 일이기도 하니까요.”
최 부회장은 당황한 눈길로 지혁과 오 회장을 번갈아 봤다.
‘지금 두 사람만 둬도 될까? 불안한데.’
지혁은 오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어떻습니까?”
그는 싱긋 웃고는 말했다.
“재밌군. 그래. 최 부회장. 자리 좀 비켜주게.”
“아······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최 부회장은 오 회장에게 묵례한 뒤.
지혁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쾅!
오 회장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넌 연일 오 씨 아니냐?!”
그의 목소리가 잔뜩 격양되어 있었다.
“네 형이잖아! 네 큰아버지 아들이지 않냐! 아무리 목적이 있어도, 정도가 있지. 형제끼리 너무한 거 아니냐?!”
지혁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형제끼리······.”
“······.”
“형제끼리 너무한다라······.”
지혁은 오 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