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책임은 져야지 (2)
움찔.
순간, 날카로운 칼이 훅 들어오는 것 같았다.
‘종원이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오종원 이사.
지혁의 아버지이자, 후계 다툼에서 오 회장에게 밀린 남자.
그 일로 오종원 이사는 집에서 나갔고.
췌장암으로 인한 사망. 그리고 생활고.
공교롭게도 지혁의 가족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걸 염두에 두고, 복수할 목적으로······.’
오 회장은 지혁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그의 표정을 살폈고, 과거에 지혁이 보여온 모습들을 떠올렸다.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는데.’
“확대해석하지 마십시오.”
지혁은 오 회장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회장님 존경하고 좋아한다고요.”
“······.”
“저 빈말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복수할 목적이었으면 이렇게 장황하게 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짧아도, 지혁의 말이 섬뜩했다.
“복수하려면 진작에 했죠.”
처음에 오 회장은 분위기를 잡으려고, 책상을 내리치며 강하게 시작하려 했는데.
‘형제끼리, 회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라는 말.’
이 한마디로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그 일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또렷이 바라봤다.
“하지만 기억은 합니다.”
“······.”
“있었던 일이니까요.”
오 회장은 멍하니 지혁의 입만 바라봤다.
“내 행동만이 정의며, 자신의 실수도 좋은 쪽으로 합리화시키는 치사한 인간들.”
“······.”
“그게 정신 건강에 좋긴 하겠죠. 전 나쁜 놈들보다 그런 사람들이 더 밥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회장은 지혁의 말을 듣는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본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거든요. 부디, 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대충 얘기는 들어서 아는데······.”
“······.”
“회장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낸 분 아닙니까?”
오 회장의 꽉 다문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른 분은 몰라도 회장님은 제 적극적인 행동을 이해하시리라 믿었거든요.”
“이해야 하지.”
오 회장은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돼.”
***
지혁은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회장실 안을 이리저리 천천히 걸었고.
오 회장은 불안한 눈으로 그런 지혁을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만의 확고한 요새에 자객이 들어선 것 같았다.
‘이번 일 끝나면, 인사이동 시켜야지.’
이제 지혁을 비서실장으로 두고 지낼 수는 없었다.
“회장님.”
화들짝.
지혁의 부름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는 정말 안 되겠습니까?”
“뭐?!”
지혁은 솔직하게 원하는 걸 말했다.
“제가 회장님의 다음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겁니까?”
“······.”
오 회장은 지혁을 멀뚱히 바라봤다.
황당했다.
‘아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저 잘할 수 있습니다.”
말만 들으면, 회장 자리에 환장한 놈 같지만.
무표정한 얼굴.
격양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었고.
목소리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혁에게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아우라가 느껴졌는데.
‘확신?’
오 회장에게 다음 회장을 시켜달라는 말도 안 되는 행동에, 확신이 보였다.
‘이건 뭘까? 욕심도 아니고······.’
지혁의 표정과 행동은······.
‘의무감이야. 이걸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생각이 이에 이르자, 오 회장은 더 혼란스러웠다.
“왜 그래야 하는 거냐?”
“······.”
“도대체 회장을 왜 하려는 건데?”
이 자리를 노리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만 할 권력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나갔다는 것 말고는 도저히 지금 지혁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복수도, 권력도, 돈 욕심도 아니야.’
대화를 나눌수록 지혁의 행동은 이해가 안 되었고, 도리어 호기심만 생겼다.
“제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네가 회장 안 하면 큰일이라도 나냐?”
비꼬려고 한 말이었는데.
“네.”
지혁은 곧바로 대답했다.
“큰일 납니다. 제가 회장을 해야 합니다.”
“······.”
너무 황당해서 대꾸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오늘 힘드네.’
오 회장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왜 해야 하냐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
“그 세계······.”
오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고.
지혁은 아차 싶었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할 얘기는 아니야. 안 그래도 이상하게 보고 있는데.’
지혁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기에, 회장이 지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제가 회장을 해야, 선도그룹이 삽니다.”
“이 무슨······.”
오 회장은 지혁이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너무 멀쩡하게 하니, 더 제정신으로 안 보였다.
“선도그룹을 잘 경영할 자신이 있습니다.”
“······.”
“더 이상······.”
지혁은 ‘피 보기 싫다’라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고.
그 대신, 이 상황에 맞는 교과서적인 말을 골랐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
미래기획실장실.
오진원이 최 부회장에게 물었다.
“지혁이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오진원은 미래기획실장실로 오기 전에, 회장실에 들렸었다.
윤리경영위 회의 때 오 회장 안색이 안 좋은 걸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들렸던 것인데.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넌 연일 오 씨 아니냐?!’
회장실에서 최 부회장이 나온 직후에 오 회장의 일갈이 안에서 들렸다.
오진원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기에, 지혁이 걱정되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 이후로 고성 소리는 안 들렸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최 부회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설마 비서실장을 걱정하시는 건 아니죠?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
“지혁이 잘 알죠. 아버지 또한 잘 알아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둘 다 그렇게 무모한 사람들 아니니까.”
최 부회장은 오진원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은 좀 시끄럽지만, 접점을 찾을 겁니다.”
호로록.
오진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형님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이대로 넘어가진 않겠죠. 비서실장이 절대로 그렇게 두진 않을 테니까요.”
오진원은 윤리경영위 회의를 떠올렸다.
지혁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더 타격을 주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들던 그의 모습을.
“표면상 회장님이 결정권자이지만, 이 일의 칼자루는 비서실장이 잡고 있습니다.”
“······.”
“그걸 회장님이 모르지 않을 거고요.”
오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 일은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그다음은······.”
지혁의 목표. 선도그룹의 총수 자리를 약속받게 될 건지가 관건이었는데.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죠.”
“가능할까요?”
“쉽지는 않을 겁니다.”
“······.”
“비서실장도 알 거예요. 흐름이 끊겼어요.”
“······.”
최 부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지혁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비서실장이 여기서 어떤 수를 던질지······ 기대되네요.”
***
“다시 말하지만 그건 안 된다.”
회장 자리를 약속해달라는 지혁의 말에 오 회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될 얘기 자꾸 꺼내지 마라.”
“왜 안 됩니까? 제가 친아들이 아니라서요?”
“······.”
“친자관계 떼고 생각해 보십시오. 진양 형님이 그룹 총수로 정말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오 회장은 이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오 부회장은 아니니까.
오 회장은 멈칫해다가, 말했다.
“그래, 진양이가 그룹 총수로서 좀 부족하다고 해. 그럼? 너는?”
“······.”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혁은 가만히 오 회장의 말을 들었다.
“똑똑하고, 나이에 비해서 유능하고 통찰력도 있는 거, 그래 그건 인정한다. 그래서 뭐?”
“······.”
“너 이제 몇 살 됐냐? 서른 막 넘지 않았냐?”
“31살입니다.”
“그러니까! 31살이 선도그룹의 총수가 되겠다고?! 허! 참나.”
말하다 보니, 어이가 없는지 오 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여든 넘은 나도 기업 총수로 있으면서, 경험 부족으로 힘든 경우가 많은데, 나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거야.”
“그건 진양 형님도 같은 조건입니다. 사십 대면 젊죠.”
“······.”
“그리고 나이순으로 경영자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오 회장은 지금 말로는 지혁을 당할 수 없었다.
계급장 떼고 대화할 때는 상급자 혹은 연장자가 불리한 법이다.
“됐고. 어쨌든 넌 너무 어려. 차라리 진양이 다음을 생각하든지······.”
지혁은 정색한 얼굴로 오 회장의 말을 끊었다.
“진양 형님은 총수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게 모든 일의 선행 조건입니다.”
“······.”
“잘 되게 하긴 어려워도, 잘못되게 하긴 쉽다는 말 아시죠.”
지혁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협박했다.
“진양 형님 절대로 총수 못 됩니다. 제가 무슨 짓이든 할 거니까요.”
오 회장은 질린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진양이가 얘한테 무슨 큰 실수라도 했나. 왜 이렇게 난리야.’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미친개에 오 부회장이 물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형한테 왜 그러냐?”
“······.”
“그러지 말고 좀 잘 지낼 순 없는 거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잘 지낼게요. 평화적으로 저에게 후계 자리를 넘겨주시면요.”
“······.”
오 회장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대화는 끊겼다.
말을 하면 할수록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고.
접점은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난감하시겠지.’
지혁은 오 회장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의 이마 색깔도.
머리에 김이 올라선 지, 중절모를 벗고 있었다.
항상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자색’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자기 확신이 강한 그의 성향이 계속된 공격에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 날 뭘 보고 기업 총수를 시켜주겠어.’
지혁은 오 회장의 이마에 일렁이는 청자색을 보며 생각했다.
‘나라도 안 시켜주겠다. 진양 형님 일로 정신 놓고 실수해 주길 바랐는데.’
확실히 오 회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힘들고 혼란스러워도 자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자식을 지키려 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꽤 부성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또 힘든 길을 가야겠지. 어쩔 수 없어.’
오 회장 이마의 청자색이 한 단계 더 흐려졌을 때.
지혁은 승부수를 던졌다.
“회장님.”
“음?”
오 회장은 피곤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회장님 의향은 충분히 알겠고요. 저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서 제안 드립니다.”
“뭘?”
“제가 경영자로서 보여드린 게 아직 없죠.”
“······.”
“보여드릴 테니까, 기회를 주세요.”
오 회장의 눈이 커졌다.
“절 관계사 대표로 보내주십시오.”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한 목적이지만.
오 부회장 일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지혁은 더 이상 비서실장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갈 자리는 내가 정한다.’
“대, 대표?!”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지혁이 기업 총수를 말할 때처럼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진 않았다.
“경영자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 공정하게 평가해 주십시오.”
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기업 총수를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군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