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피하는 게 상책
“아······ 비서실장을······.”
오혜진은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상상도 못 했다. 한 전무에게 비서실장직을 시킬 줄은······.
‘얘가 정말 끝까지······.’
오혜진은 최측근인 한 전무를 선도물산에 10년 가까이 심어 놓았다. 그룹 총수를 향한 그녀의 오랜 의지였다.
한 전무는 자기 사람들로 주요 요직을 채우며 선도물산을 장악했으며, 그건 곧 오혜진의 영향력 아래에 완전히 들어와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한 전무를 빼겠다고.’
곰곰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지금처럼 정신없을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해내는 지혁의 전략이 대단했다.
“언제부터요?”
“인사발령은 이틀 내로 날 거랍니다. 바로 이동 준비를 해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와······.”
오혜진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선도본관에는 자기 사람 심으면서, 선도물산에서 다른 사람 힘은 빼겠다는 거잖아.’
지금 오혜진은 지혁의 편에 서 있다.
즉, 한 전무는 오혜진의 사람이기에 지혁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가 선도물산에 뻗쳐온 세력은 깊고 넓었다.
‘컨트롤 하기 어려운 건 없애겠다는 거지.’
한 전무를 이동시키려는 지혁의 수가, 오혜진에게는 보였다.
그렇게 볶아대고도, 여전히 오혜진을 견제하는 마음도 말이다.
‘집요하다. 집요해.’
오혜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고.
한 전무는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
오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에게 선택지가 있어요?”
“······.”
“따라야죠. 어차피 통보받은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쳇.”
오혜진은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기세 잡았다고 안하무인이야. 아주.”
“비서실장이 지금 정신없어 보이는데, 다른 생각을 해보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반격해 보지 않겠냐는 말.
이 물음에 오혜진은 기겁하여 손사랫짓했다.
“어휴, 그런 소리 마세요.”
그간 지혁은 오혜진의 심리를 착실히 잘 밟아놓았고, 지금 그 결과가 나타났다.
오혜진에게 기회일 수도 있는 상황인데, 다른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상상만 해도 질립니다. 걔를 직접 상대하고 싶지는 않네요.”
윤리경영위에서 풀 죽은 오 부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야.’
한 전무는 그런 오혜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네.’
오혜진은 한 전무에게 말했다.
“어쨌든, 축하해요. 그룹의 핵심 요직으로 발령받으신걸.”
“······네. 감사합니다.”
축하받아야 할 건지 모르겠지만, 한 전무는 일단 감사하다고 말했다.
후유-
오혜진을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앞으로 지혁이 더 잘 되길 바라야겠네.”
***
[인사발령]
1) 오진양 부회장 : 선도전자 대표이사 -> 선도SDS 대표이사
2) 한원철 전무 : 선도물산 부대표 -> 그룹 비서실장
오 부회장과 한 전무의 인사발령이 난 날.
선도전자 대표이사실에 추 이사와 오 부회장이 함께 있었다.
‘사직서.’
빈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장의 종이.
사직서를 받기 위해, 오 부회장은 추 이사를 인사팀이 아닌 대표이사실로 불렀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에, 이렇게라도 배려하고 싶었다.
추 이사는 웃으며 말했다.
“부회장님, 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되어 다행입니다.”
‘재벌 2세 마이너 갤러리’에 오 부회장 얘기는 더 보이지 않았으며.
그룹을 대표하는 선도전자 대표직을 내려놓기는 했지만,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지는 않게 되었다.
오 부회장은 평소와 다르게, 동갑내기인 추 이사에게 존대했다.
“추 이사님 덕분입니다.”
“······.”
벌어진 일이니, 누군가 책임은 져야 했고.
추 이사는 윤리경영위에서 본인이 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오 부회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큰 빚을 졌네요.”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을 겪으며, 오 부회장은 풀이 많이 죽었다.
추 이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진심으로 저에게 빚진 마음이 드신다면.”
추 이사는 오 부회장을 향해 웃었다.
“승리하신 뒤에 불러주십시오.”
“······.”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사사삭.
추 이사는 사직서에 서명한 후, 다시 웃었다.
“그리고 고개 드십시오. 부회장님답지 않습니다. 고개 빳빳하신 모습이 좋아서 부회장님을 따랐던 건데······.”
오 부회장은 추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 눈에는 당당해 보였습니다. 태생부터 가진 사람의 당당함. 전 그렇게 못 살아서 그런지, 참 멋져 보이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다 한결같진 않다.
간혹, 취향이 독특한 사람들이 있다.
“제 행동에 후회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고요. 시원하게 당했습니다.”
“······.”
“먼저 가서 죄송하지만, 전 좀 후련하네요. 하하.”
추 이사는 서명을 끝낸 사직서를 덮어 놓은 후.
진중한 눈빛으로 오 부회장을 바라봤다.
“비서실장은 아마 선도물산 대표로 가겠죠?”
“네, 거의 그렇게 결정된 거 같더군요.”
추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주회사이자, 매출 규모로도 선도전자, 선도생명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회사입니다.”
추 이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리고 비서실장이 그곳 출신이죠. 선도물산에 대해 잘 알 겁니다. 어떤 사람들을 써야 할 줄도 알 거고요.”
“······.”
“그 이후로 회장님 만나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추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회장님과의 관계로 비서실장직을 유지할 수 없어서 이동하는 게 아닐 겁니다.”
“······.”
“부회장님 일이 갑자기 잠잠해진 것도 그렇고요. 회장님과 비서실장 간에 뭔가 있었을 거라고 보여지거든요.”
추 이사도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돌아가는 상황을 읽고 있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이런 사람을 쳐낼 수 있었던 게, 지혁으로선 천운이기도 했다.
“회장님 시야에서 부회장님은 이제 비서실장과 같은 선상에 놓이신 겁니다. 앞으로 정말 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비교가 될 겁니다.”
오 부회장은 심각한 얼굴로 듣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추 이사님은 정말······ 가는 날까지도 절 신경 써주시는군요.”
추 이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주제넘지만······ 당부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당부’라는 걸 오 부회장은 아주 싫어하지만, 마지막 날이니만큼 추 이사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려 했다.
“다른 사람 말에 조금만 귀 기울여 주신다면, 훨씬 더 좋은 분으로 인정받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
“다른 사람 말대로 하라는 게 아닙니다. 부회장님 줏대대로 가셔도 되지만, 적어도 들어는 보라는 겁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사람들이 부회장님 주변에 모입니다.”
오 부회장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좋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경청해야 합니다.”
오 부회장은 건성으로라도 대답했다.
“네, 신경 쓸게요.”
추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
“내 것 뺏기는 것만큼, 이 세상에 멍청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 부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의 오 부회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추 이사도 가고······.’
그때, 갑자기 추 이사는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오진원.”
“네?”
“실차장님이 과연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오 부회장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추 이사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하하. 제 코가 석 자인데, 가는 날 말이 많았네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건승하시고, 건강히 지내십시오.”
***
이틀 뒤.
건장한 체격에. 짧은 스포츠 머리에 새치가 보이는 오십 대 남성이 선도본관 로비로 들어왔다.
어색한 듯, 쭈뼛거리며 게이트를 통과하는데.
그 누구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27층이라고 했지.”
엘리베이터를 탄 뒤, 혼자 중얼거리며 버튼을 눌렀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위로 올라갔다.
딩동!
27층에 도착하여, 그는 안내판에 따라서 걸었고.
‘비서실장실’에 도착했다.
똑똑.
“한원철 전무입니다.”
[들어오세요.]
덜컹.
‘비서실장 오지혁’
커다란 집무 책상 앞에 놓인 명판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앉은 남자.
차갑고 깊은 눈매를 가졌으며,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신비한 위압감을 풍기는 청년에게 한 전무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지혁도 일어서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비서실장님.”
지혁은 한 전무를 비서실장이라 불렀다.
“하하. 많이 놀라셨어요?”
“······.”
한 전무가 비서실장으로 발령받은 뒤, 첫 만남이었다.
“앉으시죠.”
“네.”
지혁은 커피를 내왔고.
한 전무는 그가 건넨 커피잔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대뜸 물었다.
“왜 접니까?”
서로 간 볼 필요는 없었다.
오래 전에 영업본부장 대 상품기획팀장으로 만났었고, 많은 일을 함께 겪어온 사이니까.
“제 사람이니까요.”
“······.”
“맞잖아요? 아닌가요?”
한 전무의 돌직구를 지혁은 그대로 받아쳤다.
대답이 곧 다짐이 되어야 하는 상황.
한 전무는 당황했지만, 그런 기색을 보여선 안 되었다.
“이상하다. 왜 대답을 바로 못 하시지?”
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는데, 그 모습이 참 잔인해 보였다.
한 전무는 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물어보셔서, 생각 좀 하느라요.”
“말 돌리지 마시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지혁은 안광을 쏟아내었고.
꿀꺽.
한 전무는 대답했다.
“비서실장님의 사람이죠.”
“네. 그게 이유입니다. 한 전무님을 부른 이유.”
“······.”
“그룹 비서실장으로서, 그리고 제 사람으로서, 지혜롭게 잘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한 전무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아주 괴물이 되었구나.’
원래도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의 지혁은 예전과는 또 달랐다.
“인수인계는 파일로 정리해 놨거든요. 그거 보시면 되고.”
“네.”
“비서실 직원들은 비서실장님이 원하시는 인물들로 채우시면 됩니다. 다만, 선도물산에 있는 사람들로 부탁드릴게요.”
“······.”
“물산 여러 요직에 박아놓은 사람들 있잖아요. 한 전무님 사람들이니까, 그분들 데려오면 딱 좋을 거 같네요.”
선도물산에서의 한 전무의 영향력을 없애려는 거였다.
“자리가 비워야 사람을 채우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한 전무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일 하시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셔도 돼요.”
한 전무는 생각했다.
‘절대로 안 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기 빨리는데.’
지혁은 이제 웬만하면 피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오늘 중에 빼겠습니다. 전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여기서 일 보시면 됩니다.”
“네? 아직은 좀······.”
책상 위에 놓인 ‘비서실장 오지혁’의 명판이 눈에 밟혔다.
과연, 본인이 그의 자리를 대신 해도 되는 건지도 아직 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혁 덕분에 비서실장의 무게감은 그룹 내에서 대단해졌으니까.
지혁은 자신의 명판을 치웠다.
“발령 났잖아요. 한 전무님이 그룹 비서실장입니다.”
“······.”
지혁은 인사한 후, 비서실장실을 나가려다가
“아, 비서실장님.”
“네?”
“우리 회장님 잘 모셔 주세요.”
또 무슨 의미일까 싶어서, 한 전무는 지혁의 표정을 살폈는데.
이번엔 아무런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 외에는.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