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물산의 희망
아지트.
비서실장실을 한 전무에게 넘긴 후, 지혁은 빈둥대다가 황 차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정신없이 회사생활 하다가, 이렇게 시간 보내니 참 어색하네요.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요.”
지혁의 말에 황 차장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게 정상입니다. 어느 회사원이 비서실장님처럼 일합니까?”
“······.”
“이렇게 동료와 여유도 갖고, 바깥바람도 쐬면서 일해야죠. 대부분 회사원은 관두라고 할 때까지 일할 텐데.”
황 차장은 쓸쓸한 얼굴로 빌딩 숲을 보며 말했다.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만 하며 보내기엔······ 인생이 너무 빡빡하잖아요. 이 정도 여유는 있어야죠.”
“······.”
“동료들과 노가리 까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때론 퇴근 후에 술 한잔하고.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이게 회사원들이 사는 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네요. 내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료들이니.”
황 차장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맞습니다. 전 아내보다 윤 팀장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저도 회장님과······.”
말을 끝낸 후,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동료라면, 특히 같은 팀에서 근무한다면, 온종일 붙어있으며 식사도 같이해야 할 때가 있다.
지혁은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비서 일 하시느라.”
“······.”
황 차장은 지혁과 함께 선도본관에 왔었다.
신입 시절부터 ‘의류 생산’만 하던 그가, 비서직을 맡게 된 건 순전히 지혁 탓이다.
처음에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하하. 어렵지 않았다고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이 말에 지혁은 빙그레 웃었다.
“비서실장님 덕분에 좋은 경험 했고요. 좋은 일도 많았습니다.”
선도본관에 근무하면서 황 차장은 승진했으며, 결혼도 했다.
흡- 휴우-
담배를 깊이 내뿜고 말했다.
“지나고 보니, 다 필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쓸모없는 일은 없었습니다.”
지혁은 황 과장을 곁눈질로 보다가 ‘풉-‘ 하고 웃었다.
황 차장이 궁금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성준이 형. 너무 도사처럼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들렸나요?”
“네.”
지혁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래도 세상 편하게 사는 인상이신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도인 같아요.”
“하하.”
황 차장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지혁을 바라보다가.
“여유가 생기셔서 그런가. 비서실장님이 농담을 다 하시네요.”
“······.”
“이렇게 지내시면 참 좋을 텐데.”
턱.
지혁은 황 차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빨리 끝낼게요.”
***
오후 5시.
퇴근 시간 전이지만, 지혁은 나갈 채비를 했다.
선도물산에서 이동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혼자 이동하는 거라 팀 동료들이 신경 쓰여서, 일부러 퇴근 시간 한참 지나 회사를 나섰었는데.
이번엔 비서실이 통째로 이동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비서실장님! 저희는 다 준비됐습니다.”
황 차장이 짐을 들고, 비서실 입구에서 말했고.
윤 팀장, 고 차장, 지원팀장도 그 옆에 있었다.
오 회장에게는 아침에 마지막 업무 보고했으며, 새로운 비서실장도 이미 와 있다.
좀 빨리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요. 가실까요.”
덜컹.
지혁이 비서실을 막 떠나려는데, 비서실장실 문이 열리며 한 전무가 나왔다.
“이제 가십니까.”
“안에서 지켜보고 계셨어요?”
“······.”
한 전무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지혁은 그와 악수하며 말했다.
“가보겠습니다.”
“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서실장님.”
지혁은 묵례하고 바로 뒤돌았다.
뚜벅. 뚜벅.
지혁을 선두로.
네 남자가 뒤따랐다.
선도그룹을 주무르던 그룹 비서실이 한꺼번에 나가고 있다.
27층의 미래기획실 사람들이 이들을 지켜봤다.
선도그룹의 핵심 요직인 그룹 비서실에서 다른 곳에 가는 경우는, 권력이 다했거나, 혹은 은퇴할 때가 되어서였다.
즉, 그룹 비서실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건, 안타깝게 보이기 마련인데, 이번엔 달랐다.
-비서실장님! 화이팅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룹 비서실 파이팅!
그 누구도 이들을 안타깝게 보지 않았다.
기대가 컸다. 이 대단한 사람들이 선도물산에 가서 어떤 일을 벌일지.
그룹에서 굵직한 결과를 만들어냈던 사람들이다.
특히, 전 직원 간담회를 통해 인사경영 체질을 바꾼 일은, 미래기획실 직원들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일.
지혁과 비서실은 그 문제를 단칼에 잘라버렸었고.
뿌리 깊은 사람을 단번에 뽑아 버렸다.
-어디 가든 잘하실 거야.
-당연하지. 메이저리그 올스타가 KBO 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것도 한창 전성기에 가시는 거잖아. 끝난 거지.
-선도물산 난리 나겠네.
선도물산 대표이사로서의 지혁의 성공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뭘 나오셨어요?”
엘리베이터 앞에 최 부회장과 오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야지. 우리 대장님 가시는데.”
“지혁아, 연락 자주 해.”
지혁은 차례대로 두 사람과 악수했고.
“갈게요. 일 보세요.”
현관까지 따라 나온다는 걸 지혁은 억지로 막은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생각보다 비서실장님 인기 많은데?”
윤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평소 직원들은 선도본관에서는 지혁이 보이면, 피해 다니면서 멀찍이 구경만 했었다.
“저 가는 게 좋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혁의 농담에 고 차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원래 사람은 본능적으로 진짜를 알아볼 줄 압니다.”
“······.”
“아쉬운 거죠. 하신 일이 있잖아요.”
딩동!
1층 도착.
드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짝짝짝.
큰 박수 소리가 들렸는데
1층 로비가 꽉 차도록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비서실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회사 다닐 맛 났었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선도물산 직원들이 부럽습니다!
엄청난 환송에 지혁과 비서들은 깜짝 놀랐다.
“와······ 이거 참.”
당황스럽지만, 모두 웃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본인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해서는 흥이 나지 않는다.
“하하. 감사합니다!”
“가서도 열심히 할게요!”
“여러분들도 모두 힘내세요!”
비서들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환송해 주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
선도물산 디자인실.
-그룹 비서실장님이 신임 대표로 오신대.
-그게 누군데?
-야! 너 선도 직원 맞아? 비서실장님이 누군지 몰라? 오지혁! 오지혁!
-어머! 예전 상품기획팀장님?! 그분이 비서실장이었어?
-얘, 휴직 갔다 왔잖아.
-휴직하였어도, 어떻게 그걸 몰라?
선도물산에서 비서실장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순 있어도, 전 상품기획 1팀의 오지혁 팀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근데 오 팀장님이 대표로 오신다고?
-팀장님 아니라니까. 비서실장님! 전무님이라고.
-대박······ 언제 그렇게 되셨대?
육아휴직 1년 갔다 온 직원이었는데, 그 1년 사이에 지혁에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팀장에서 비서실장이 되고, 이제 대표가 되어 돌아온다.
믿기 어려운 게 상식적이다.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받아들여.
-그래. 근데······ 그분 좀 빡세지 않아?
-빡세지.
-안 좋은 거 아니야?
일을 어떻게 하든 정해진 월급을 받는 회사원으로서는 당연할 만한 우려였다.
-글쎄······ 그래도 좋은 게 더 많지 않을까?
-왜?
-잘 되게 해주잖아. 그분 선도물산에 있을 때, 같이 일한 사람들 특진하고, 포상받았던 거 기억 안 나?
-아, 그랬었지.
-그런 분이 대표로 오시면······ 우리도 그분 아래 있는 거니까 잘되지 않겠어?
그때, 이승주 과장이 디자인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분 오시는 거, 우리한테 엄청난 행운이야.”
이승주 과장.
지혁이 회사에서 처음 두각을 보였던 ‘팍스버거’ 콜라보를 함께 했던 디자이너다.
이승주는 그 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포상’이란 걸 받아봤다.
어느덧 과장이 된 그녀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말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라고.”
한 후배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과장님이야 좋으시겠죠~ 인연 있는 분이 대표가 되어 돌아오셨으니.”
이승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런 마음도 전혀 없진 않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승주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회사가 이 꼴로 돌아가는 게 진짜 짜증 났었거든?”
후배들은 이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이승주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이제 일 좀 제대로 해보겠네.”
***
선도물산으로 출근하는 날.
어제 지혁의 특별승진 발표가 났다.
[특별승진]
1) 오지혁 비서실장 : 전무 -> 사장
인사발령을 위한 사전작업이었으며, 곧이어 인사발령 메일도 왔다.
[인사발령]
1) 오지혁 사장 : 그룹 비서실장 -> 선도물산 대표이사
아무리 오너일가라도, 대단한 인사라며 주변에서 난리가 났지만.
정작 당사자는 무덤덤했다.
임원이 된 이후부터는 월 급여를 얼마 받는지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었으니까.
이제 돈이 없어서가 못 쓰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못 쓰고 있었다.
“오 대표님. 이리 와봐.”
수아는 막 현관문을 나서려는 지혁을 잡아끌었고.
쪽-
가볍게 키스했다.
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부족했어? 지금 가야 하는데.”
“뭐래.”
수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냥 대견하고 멋져 보여서 찜하는 거야.”
“찜?”
“응. 오 대표님은 내꺼라고. 여직원들 눈독 들이지 말라고.”
“하하. 참나.”
지혁은 고개를 저었고.
수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어때?”
“고향에 돌아가는 기분이지 뭐.”
“······.”
“이렇게 다시 가게 될 줄은 몰랐어. 처음엔 그냥 그랬는데.”
지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막상 가려니까, 기분 좋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기분 좋아야지. 금의환향 아닌가?”
“뭐?”
“왕이 되어서 돌아가는 거잖아.”
“하하. 말을 해도.”
지혁은 수아의 말이 재밌었다.
한편으로는 남편 기 세워주려는 것 같아서, 고맙기도 했고.
“갈게. 늦지 않게 올게.”
“늦게 와도 돼. 화이팅!”
지혁은 수아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이젠 집이 바뀌어서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했지만.
‘강남역’
목적지는 같았다.
사회 초년 생활을 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8시 50분.’
지금 전철에서 내리면, 정확히 8시 55분에 사무실에 도착한다.
‘앞으로도 같은 시간에 나서면 되겠네.’
뚜벅. 뚜벅.
지혁은 힘찬 걸음으로 선도물산을 향해 걸었다.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는 선도물산 정문 바로 앞으로 연결되는데.
천천히 올라가며 위를 바라봤다.
수백 번도 더 드나들던 선도물산 정문이, 에스컬레이터 끝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음?’
현관 바로 위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
지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도물산의 자랑! 오지혁 대표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