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각자가 잘 되면 된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와아~!
-어서 오십시오!
정문에 모인 수많은 직원이, 환영하느라 난리였다.
지혁은 처음엔 황당했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금의환향을 환영합니다!
-대표님! 다시 봬서 너무 좋아요!
정문 가까이 다가가자, 마중 나온 직원들이 지혁의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였다.
한 직원이 목걸이 화환을 들고 다가왔는데.
지혁은 손사래 쳤다.
“아, 이건 좀 아닌 거 같고요.”
웃으며 말했다.
“마음만 받을게요.”
‘백 프로 자발적인 건 아닌 거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사실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지혁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 뒤,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 양반 짓이구만.’
어떻게 사람을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인사실장 짓이 분명해 보였다.
‘어휴, 왜 굳이 이런걸.’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표로서의 첫 출근날, 이런 환대가 기분 나쁠 리 없다.
그리고 지혁을 반기는 직원들의 표정 속에 다른 감정도 느껴졌는데.
‘많이 힘들었나 보네.’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한 간절함이 느껴졌다.
최근 선도물산은 후계 싸움에 껴서, 이리저리 터졌으며.
오프라인 경기가 안 좋은 영향도 직격으로 맞았다.
오지혁 대표이사.
역대급 매출을 기록했던 ‘팍스버거’ 콜라보 신화의 주인공.
그 매출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던 ‘홍썬라인’의 기획자.
그룹을 주무르는 비서실장이었으며, 선도그룹 총수에 정식으로 도전하는 대권주자.
그런 인물이 선도물산의 대표가 되어 돌아왔으니, 직원들로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혁은 마중 나온 직원들과 악수하며, 천천히 선도물산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트 바로 앞에 인사실장이 기다렸다.
“대표님, 사원증입니다. 왕의 귀환을 경배합니다.”
“······.”
지혁은 떨떠름한 얼굴로 사원증을 받으며 말했다.
“그런 용어는 어디서 배워오시는 거예요? 인사실장님의 단어 선택은 참······.”
왕의 귀환이라는 말은 아침에 수아에게도 들었는데, 지금 또 듣는다.
“하하. 배우다뇨. 대표님의 얼굴을 뵈면 절로 떠오르는 단어지요.”
지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말을 말자. 나한테 해 끼치는 건 아니니까.’
띡!
게이트에 사원증을 댄 후 들어갔다.
-화이팅입니다!
-선도물산 화이팅! 대표님 파이팅!
지혁은 어색한 미소로 게이트 밖에서 소리치는 직원들에게 화답한 후.
인사실장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중 나온 직원들은 뭡니까?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인사실장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별거 없습니다. 대표님 오늘 첫 출근이니까, 반갑게 맞아주면 좋겠다고 짧게 공지 메일 하나 날린 것뿐입니다.”
“······.”
“아무 강제성 없었고요. 다들 자발적으로 나온 거예요.”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는 지혁을 향해, 인사실장은 슬쩍 웃으며 한마디 더 했다.
“왕의 귀환이니까요.”
“하아······ 인제 그만 좀······.”
***
오전 11시.
새로운 대표이사와의 첫 대면을 위해.
패션부문, 상사부문, 건설부문.
선도물산의 각 부문장과 그 이하 본부장들까지 대회의실에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실장 허용호 이사입니다.”
인사실장은 앞에서 인사한 후, 지혁을 소개했다.
“선도물산의 새로운 대표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약력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어차피 다들 잘 아실 테니까요.”
소개하면, 지혁의 연차가 짧다는 걸 강조하게 된다. 그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룹 비서실장을 역임하다가 부임하신, 오지혁 대표님이십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도물산의 임원들은 큰 박수로 지혁을 맞이했다.
이 중에 지혁보다 어린 사람은커녕, 비슷한 연배도 없다.
새파랗게 젊은 대표이사는 당당히 일어서서 말했다.
“모두 앉으십시오. 그래야 제 얼굴이 잘 보일 테니까요.”
대회의실에 모인 40여 명의 임원은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취임식 전인데, 주요 임원들과 먼저 자리를 가진 것이다.
양해를 구해야 할 일도 있고.
“건설과 상사에 계신 분들은 절 잘 모르실 거고.”
선도물산의 패션, 건설, 상사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비서실장으로서의 지혁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선도물산 시절의 지혁은 잘 몰랐다.
“패션 분들은 잘 아시겠죠.”
패션부문 임원들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제가 어느 사업부 출신인지는 지금부터 모두 잊으시기를 바랍니다. 전 그냥 선도물산 대표입니다.”
“······.”
“본대로 필요한 대로 조치하며 일합니다. 전 심플하고 단호한 걸 좋아합니다.”
지혁은 선도물산의 임원들을 돌아보았다.
“우선, 조직개편이 있을 예정인데요. 어느 정도 윤곽은 나왔고. 현재 인사안 정리 중입니다.”
꿀꺽.
임원들은 긴장했다.
‘시작부터 칼바람이야?’
‘이건 칼바람 예고가 분명한데.’
“우선 큰 변화만 말씀드리자면, 지금 리조트가 상사부문 안에 들어가 있는데요. 리조트를 분리하고, 상사는 패션과 합칠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지?
-리조트를 키우겠다는 거 같은데.
-상사 파워가 너무 약해지잖아······.
상사부문 임원들 표정이 굳었다.
상사에 있던 걸 떼어내고, 상사와 패션을 합치겠다는 것.
대표이사가 패션 출신이니, 패션과 상사가 합쳤을 때 어디가 우위가 될 줄은 뻔해 보였다.
“상사와 패션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단순히 무역만 따지더라도 패션과 상사 모두 해외 비즈니스 비중이 커졌죠.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라고 보시면 되고요. 리조트는 네버랜드를 확장하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풀어서 설명했지만, 인사 정리를 예고하는 건 분명했다.
“회사원, 특히 임원은 성과로 평가받는 게 당연하다고 봅니다.”
“······.”
“각 부문장과 본부장님들. 어떤 인사 조치당하셔도 불만은 없을 거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지금 물산 상황을 다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지혁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만약 앞으로 있을 인사명령에 불만이 있으시면, 윤리경영위에 신고하시면 됩니다. 전 그런 거 좋아하니까요.”
꿀꺽.
신임 대표가 신고를 좋아한다는 말이 참 섬뜩하게 들렸다.
“혹시 질문 있습니까?”
“······.”
대회의실에는 싸늘한 정적만 흘렀다.
지혁은 인사실장에게 말했다.
“인사실장님. 전 할 얘기 다 했고, 질문은 없는 것 같네요.”
“네?”
인사실장은 시계를 봤다. 시작한 지 이제 10분 지났다.
“아 네. 이상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대표이사실.
“대표님, 너무 셌습니다.”
“그래요?”
지혁은 인사실장의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별말 안 한 거 같은데.”
“뉘앙스가 전해지잖아요.”
지혁은 피식 웃었다.
“예방주사는 원래 좀 따끔한 법이죠. 어차피 벌어질 일이니까.”
지혁은 조직과 인사를 완전히 뒤집을 생각이다.
처음엔 눈치를 좀 봐야 할까 싶었는데.
좀 더 고민해본 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과를 내려면, 그에 맞는 토양으로 가야 해.’
지금 선도물산의 경영진은 오래된 고인물이라고 판단했다.
뒤집고 바꾸는 게 처음엔 좀 시끄러워도, 결국엔, 그게 더 성과 내기 쉬운 방법이다.
똑똑.
[윤 부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윤 부장은 지혁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젠, 지혁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대표이사니까.
지혁은 인사실장과 윤 부장을 향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이 앉자마자 지혁은 말했다.
“두 분께 상의드릴 게 있는데.”
‘지혁라인’의 핵심인 두 사람.
완전 초기 단계의 계획을 그들에게 공유한 후,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다.
“건설을 제외한 부문장들은 싹 다 바꿀 생각입니다.”
“······.”
“그리고 선도물산에 그룹 미래기획실과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으면 해요.”
“아······.”
인사실장은 탄식 소리를 냈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측근들로 주무르겠다는 거잖아.’
인사실장의 예상이 맞았다.
“인사실장님, 부문장 후보 준비하라고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언제쯤 완료될까요?”
“거의 끝났습니다. 요청하신 부분 참고해서 추리고 있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후보자들 중 제가 모르는 분들은 미팅 자리 만들어주세요. 참석자는 이마를 꼭 드러내라고 하시고요.”
“이마는 왜요?”
“이마를 봐야 인상을 제대로 살피죠.”
색을 보기 위함이었으나, 이렇게 둘러대었다.
“알겠습니다.”
“윤 부장님.”
지혁의 부름에 윤 부장은 긴장하여 그를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기존에 있던 선도물산 전략실에 좀 더 힘을 실을 생각이거든요?”
“네.”
“인원을 늘릴 거고요. 고 차장님과 황 차장님도 그쪽으로 배치할 생각입니다.”
“네······.”
“전략실은 각 사업부문과 상관없이 굵직한 일에는 모두 관여할 겁니다. 제 직속이고, 각 사업부문장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미래기획실과 똑같네요.”
대답하면서도, 윤 부장은 불안했다.
‘그 얘길 왜 나한테 할까······.’
이미 지혁과 논의를 거친 인사실장은 이 내용을 알고 있었고, 옆에서 웃고 있었다.
지혁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윤 부장에게 말했다.
“새롭게 바뀐 초대 전략실장은 윤 부장님입니다.”
“네?!”
윤 부장은 부담감에 사색이 되어, 뭐라도 거절할 이유를 찾고 있는데.
“아, 물론 그냥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지혁은 윤 부장과 악수하며 말했다.
“임원 승진 미리 축하드립니다.”
***
새로운 경영진과 주요 직책자들 인선을 먼저 정리하고.
첫 출근 후 4일이 지난 뒤에야 취임식을 했다.
공식 인사발령을 내기 전이라, 아직 큰 혼란은 없었고.
취임식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오지혁 대표님의 취임사 듣겠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
휙-
임원들은 영혼 없이 박수 쳤지만, 직원들은 큰 박수와 환호로 지혁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오지혁입니다. 반갑습니다.”
-꺅~! 대표님 멋있어요!
-오지혁! 오지혁!
일부 극성팬도 있었다.
지혁은 살짝 미소 짓고는 말했다.
“아마······소문 들으셔서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혁은 직원들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
“전 목표가 있고요. 그를 위해서 선도물산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어야 합니다.”
대강당은 지혁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정적이 흘렀다.
“혹시 저를 돕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대표님 같은 분이 선도그룹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선도물산 파이팅!
지혁과 오 부회장이 후계 경쟁하고 있다는 건 전사에 소문이 나 있었고.
솔직하게 말한 이상, 그를 지지하는 직원들은 열렬히 응원했다.
“각자가 잘되시면 됩니다. 그게 절 돕는 겁니다.”
“······.”
“성과 내고 승진하시고, 포상받으시고. 그게 제대로 도와주시는 겁니다.”
지혁은 직원들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지만 힘차게 말했다.
“모두 회사에서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보상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
지혁은 전 직원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짓고는 마무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