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조직개편 (2)
“뭘 그렇게 멀뚱히 서 계세요. 어서 앉으세요.”
지혁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고.
세 사람은 엉거주춤 앉았다.
대표이사실에는 전략실장이 된 윤 실장도 함께 있었다.
“각자 인사들 나누시죠.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윤 실장과 경영자 세 사람은 서로 번갈아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지혁이 시키는 대로 하는 모습이 참 기계적이었다.
그만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얼떨떨했다.
인사를 나눈 뒤, 다섯 명은 마주 보고 앉았고.
지혁은 웃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얼어 있었다.
“건설은 일단 그대로 두었습니다.”
지혁은 대뜸 입을 열었다.
“앞으로 인물들 좀 관찰해보려고요. 그러니까, 건설은 제가 직접 챙길 거라는 의미입니다.”
지혁은 패션상사 부문장, 리조트 부문장, 상품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에게 맡긴 영역에 대해서는 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
“그동안 봐 온 분들이고, 제 눈엔 인증된 분들을 모셨으니까요.”
유 부문장이나 김 부문장은 지혁 입장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유 부문장은 상급자를 배신한 이력이 있는 사람이고, 김 부문장은 잘 아는 사람은 아니며 한 전무와도 가까운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이들을 선택한 건 성공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제3의 눈’
지혁만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고유의 색 안에 보이는 환한 빛.’
그 ‘빛’은 성공 의지가 있으며, 행운이 따르는 사람에게 보인다.
지혁은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김 부문장님.”
“네!”
리조트 부문장 김종식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크게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지혁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리조트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전혀 모릅니다.”
김 부문장은 리조트 부문장으로 지명받은 게 참 황당했다.
리조트는커녕, 회사 일 하느라 바빠서 가족 여행도 몇 번 못 가봤다.
‘뭘 잘못 알고 계신 게 아닐까?’
승진하고, 직책도 높아진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기쁨보단 불안감이 더 컸다.
만약 실수였다며 인사명령을 번복하더라도, 아쉬울 것 같지 않았다.
“그렇군요. 뭐, 모르실 수 있죠. 저와 윤 실장님도 비서 일 생판 모르고 시작한 거였는데요.”
옆에 앉은 윤 실장이 피식 웃었다.
“잘 알면 유리할 수야 있지만, 그게 필수 성공 조건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
“혼자 일하시는 거 아니니까요. 김 부문장님 성격이라면 리조트 직원들이 금방 따를 것 같은데요.”
리조트에는 활발한 듯하면서도 소극적인 직원들이 많다.
친화력 좋은 ‘연두색’의 성향인 김 부문장이라면 직원들과 잘 어울릴 것이다.
“사전에 필요한 정보는 전략실장님이 주실 거예요. 그 외에도 일하시면서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전략실장님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실 거니까요. 이건 유 부문장님과 상품본부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세 사람은 안도하는 표정으로 대답했고.
끙······.
윤 실장은 입맛을 다셨다.
***
“상품본부장님.”
“네!”
정민경 상무. 선도물산에 와서 수년간 디자인만 했다.
그동안 대표이사와 상품본부장이 여러 번 바뀌는 와중에도, 그녀는 디자인 실장 직책을 유지했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 정도로 회사 매출과 상관없이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다.
선도물산은 패션부문은 매출은 안 좋아도, 제품 디자인에 있어서는 여전히 호평받는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원하시던 자리 아니십니까?”
“······.”
정민경 상무는 자신이 상품본부장이라면, 이런 식으로 상품 전개를 안 할 거라는 말을 공공연히 해왔다.
하지만, 상품본부장이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되었던 전례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상품본부장이 대답을 못 하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발령이 났는데, 마음 놓고 좋아하셔도 됩니다. 뭘 눈치를 보십니까.”
“······.”
상품본부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혁을 힐끔 보고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는 하겠습니다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잘할 수 있죠.”
“······.”
“불만 많은 사람이 역사를 이룬다는 얘기 못 들어보셨습니까?”
“······.”
“그간 디자인 실장으로 있으면서 답답했던 거, 상품본부장 되셨으니 마음껏 풀어 보시죠.”
지혁은 상품본부장의 불안한 눈빛을 마주하며, 힘주어 말했다.
“발령 낸 사람은 접니다. 눈치 보지 마시고, 본부장님 스타일로 밀고 나가시면 돼요. 인사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는 거니까.”
이 말에 상품본부장 입가에 옅은 미소를 보였고.
그녀는 지혁을 향해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상품본부 일은 제가 책임져야죠. 본부장인데.”
지혁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품본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
“제가 몸담았던 곳이라서 잘 알거든요.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인재를 모셨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껏 일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상품본부장은 디자인 실장일 때, 제품 퀄리티에 대한 의견을 많이 냈었다.
아무리 유통이 패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패션의 근간은 디자인과 퀄리티라는 생각.
당시에 지혁은 그녀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했었다.
특히, SPA가 줄어들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그 관점으로 적극적인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지혁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고민과 공부는 최대한 짧게 하시고, 움직여 주십시오.”
“······.”
“여러분의 성향을 보고 발탁한 겁니다. 인제 와서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마시고, 본인 스타일대로 가주십시오.”
세 사람은 눈을 빛내며 지혁의 입을 바라봤다.
“과감하셔도 괜찮다는 겁니다.”
“······.”
“여러 번 실패 하셔도 됩니다.”
“······.”
“단기 성과 내려고 급하게 마음 같지 마시고, 큰 걸 노려주십시오. 그렇다고 천천히 성과 내달라는 말씀으로 드리는 건 아니고요.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혁은 일어나서,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상상 초월’
이 단어를 적은 뒤.
“제가 바라는 건, 일회성적인 자잘한 성공이 아닙니다.”
“······.”
“모든 이들이 ‘헉’하고 놀랄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도 딴지를 걸 수 없는 업적으로요.”
지혁은 성과를 내는 것 또한 경쟁자의 숨통을 끊는 거로 생각했다.
자잘한 상처는 굳은살만 박이게 하고, 경쟁자들을 학습시킬 뿐이다.
따라오지 못할 만큼 치고 나가야 한다.
‘뭐든 상관없음.’
지혁은 한 문장을 더 적은 뒤 말했다.
“성과는 꼭 매출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
“성과 얘기할 때 ‘매출’을 드는 건 측정하기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돈 많이 버는 회사인데, 100억에서 120억으로 버는 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임 경영자들은 지혁만의 희한한 통찰력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매출로 성과 내려면 그냥 매출이 아니라, ‘압도적인 매출’로 성과 내주셔야 합니다.”
“그럼 매출이 아니면 뭐로······.”
유 부문장은 매출 외에 다른 성과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되어, 물었다.
“시스템 혹은 가능성이어도 좋습니다.”
“······.”
“미래에 그룹을 변화시킬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것들을 준비해 내신다면.”
지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또한 압도적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실은 100억이 1조가 되어 돌아오는 것일 테니까요.”
“······.”
세 사람은 지혁의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생각하는 수준이······.’
‘확실히 범인은 아니구나.’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대표님은 우주에 사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부담 느끼신 건 아니죠?”
“······.”
말하나 마나다. 부담을 안 가질 수가 없다.
“우리 재밌게 한번 일해보죠. 아시겠죠?”
“네!”
세 사람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얼추 미팅이 끝나는 것 같았는데······.
“유 부문장님은 남아 주시고요. 두 분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김 부문장과 상품본부장은 인사 후 대표이사실을 나갔고.
지혁의 오랜 직속 상사.
유 부문장만 남았다.
***
부문장이라는 직책이 주는 무게가 아주 무거운데, 유 부문장은 딱 그 두 배였다.
패션상사 부문장.
선도물산은 3개의 회사가 합쳐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유 부문장은 그 중 패션과 상사를 합친 회사의 수장이 된 것이다.
어제까지 상품본부장을 하던 그로서는 어깨가 참 무거웠다.
“기분이 어때요?”
“죽을 것 같습니다.”
유 부문장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대답했고, 지혁은 그 모습이 재밌었다.
“하하, 엄살은.”
“엄살 아니에요.”
유 부문장은 퀭한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왜 이런 시련을 저에게······.”
“유남혁 전무님이 적임자시니까요.”
“······.”
“일 잘하시지 않습니까.”
명실상부한 패션 전문가.
상품기획부터 생산, 디자인, 무역 등 업무 플로어에서 모르는 게 없으며.
중간관리자일 때 전략실 경험이 있어서, 아이디어도 좋다.
지혁의 이름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던 팍스버거 콜라보 프로젝트의 시작 또한 유 부문장의 아이디어였다.
“하······ 제가 상사는 잘 모르는데.”
유 부문장의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며, 지혁이 말했다.
“야성을 보여주십시오.”
“······.”
“최근 움츠려 계시지 않았습니까. 목 내밀면 날아가는 분위기였으니까요.”
유 본부장은 굳은 얼굴로 들었다.
“함께 일해봐서, 부문장님이 얼마나 진취적인 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혁이 대리, 팀장으로 실무급에서 한창 난리 치고 다닐 때, 유 부문장과 많이 부딪히며 함께 일하고 겨뤘었다.
지혁과 유 부문장은 그때를 떠올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난세에는 공격형 인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통상 조직의 안정 때문에 그 반대로 생각하는데, 지혁은 달랐다.
“활개 치시고, 장악하셔서, 패션과 상사의 시너지를 만들어 주십시오.”
유 부문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알아서 하시겠지만, 패션 쪽은 상품본부장님께 맡기셔도 될 겁니다.”
“네, 잘 압니다. 저와 오래 함께 일한 사람인데요.”
유 부문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몇 마디 덕담을 더 나눈 뒤, 유 부문장은 묵례 후 나갔고.
“대표님, 유 부문장 괜찮겠어요?”
윤 실장은 지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걸 어떻게 확실하실까······.”
이마를 보고 확신한다. 유 부문장에게서 뒤통수 치는 기운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표 자리로 오니, ‘색’을 보는 눈이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었다.
“근데, 굳이 제 책상을 대표이사실 안에 둬야 해요?”
“제가 혼자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외롭게 지냈어서.”
“······.”
‘그 세계’의 경험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지만, 윤 실장은 부부관계가 좋지 않은 걸로 오해했다.
‘하긴, 이렇게 일만 하는데.’
윤 실장은 자리에 앉아서 이메일을 확인하다가.
“어?!”
윤 실장의 눈이 커졌다.
지혁이 바라보자, 윤 실장이 물었다.
“대표님, 알고 계셨어요?”
“뭔데요?”
다가온 지혁에게 윤 실장은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었다.
[인사발령]
오진원 사장 : 미래기획실 실차장 -> 선도전자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