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어떤 의미?
윤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거 잘 된 건가?”
오진원과 지혁이 한배를 타고 있다는 걸 그룹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혁과 손잡은 사람을 그룹 최고 회사의 대표이사로 세웠다는 것.
이 사실만 본다면 지혁에게 좋은 일처럼 보였는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오 회장이 지혁에게 힘을 실어주는 인사를 할 리가 없다.
“대표님, 알고 있었어요?”
윤 실장이 물었다.
만약, 지혁이 알았다면 이상 없는 일이다.
“아니요. 전혀, 몰랐어요.”
“아······.”
윤 실장은 인사발령 메일을 다시 한번 읽었고.
지혁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똑똑.
[비서실장입니다.]
“들어오세요.”
덜컹.
장 실장이 들어와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네, 앉으세요.”
장 실장은 소파에 앉자마자 말했다.
“인사발령 메일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지혁은 선도물산 외의 그룹 이슈에 대해서는 장 실장에게 맡기고 있다.
“인사발령 메일 보고, 좀 이상해서 알아봤는데요.”
“······.”
“깜짝 인사입니다.”
“깜짝인사요?”
“네.”
장 실장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미래기획실 인사지원팀에 확인해봤습니다. 선도전자 대표이사를 선임하기 전에 사전 인선도 없었다고 하고요. 갑자기 위에서 내려왔답니다.”
“······.”
지혁의 얼굴이 심각해졌고, 장 실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오 회장님 의지인 거 같은데······.”
선도전자 대표이사직을 위에서 꽂을 사람은 오 회장 말고는 없다.
“관건은 오진원 실차장님이 이를 알고 계셨는가입니다.”
“······.”
“최 부회장님도 어떠실지 모르겠고요.”
지혁이 선도본관을 떠난 지 이제 일주일이 좀 더 지났다.
옆에서 가만히 듣던 윤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 실장님. 걱정이 너무 많으시네. 실차장님이 어떤 분인지 아시면서.”
“······.”
“설마 그분이 뒤통수칠 거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지혁은 굳은 얼굴로 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윤 실장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어라? 진짜 그렇게 생각하시나 보네?”
벌떡.
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데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특히, 권력의 유혹이란 무섭다.
장 실장이 말했다.
“대표님, 제가 선도본관 가서 분위기 좀 보고 올까요?”
지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 회장님이 진원 형님을······.’
오 회장과 오진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 부회장도.
‘장남이 어렵다면, 차라리 친아들을 선택하겠다는 건가.’
선도전자 대표이사 인사발령.
절대로 좋은 신호로 느껴지지 않았다.
‘진원 형님이······ 설마······.’
위이잉-
핸드폰 진동음이 들렸다.
***
‘오진원.’
지혁은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지혁아.]
오진원이 밝은 목소리로 지혁을 불렀다.
[잘 지냈어?]
“뭐 정신없죠. 형님은요?”
[어? 어~ 나도. 지혁아, 나 할 얘기가 있는데.]
오진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발령 메일 봤어?]
“봤죠~”
[그게, 나도 모르는 일이야.]
오진원은 갑자기 변명하기 시작했다.
[하, 참나. 갑자기 날 왜······ 아니, 선도전자 대표이사가 말이 되냐고. 왜 갑자기 그런 발령을······ 누가 하고 싶다 그랬어? 왜들 이래. 진짜. 나 지금 자리가 딱 좋은데, 최 부회장님이 다 알아서 일하고 난 뒤에서만······.]
지혁은 내용보다는 오진원의 말하는 속도, 숨소리에 집중했는데.
확실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만약 연기라면······.’
이 정도 연기력은 ‘그 세계’의 첩자에게서도 본적 없다. 그리고 평소 오진원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연기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진짜, 미치겠어!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가지고, 머리 아픈 일 하기 싫은데. 그러게, 지혁이 너는 왜 나 자리 물러나겠다고 했을 때, 굳이 옆에 있으라고 해서는······.]
‘음?’
지혁은 방금 말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형님, 똑바로 말씀하셔야죠. 전 옆이 아니라, 아래에 있으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응? 어, 어. 그래. 아래에. 어쨌든, 회사 나가지 말고 있으라며. 내가 왜 두 사람 싸움에 껴서 이래야 하냐고. 눈치나 보게 하고 말이야.]
오진원은 불만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지혁을 향한 거였다.
“누굽니까?”
[응?]
“이 인사발령 낸 주체가요.”
[누구겠어. 회장님이지.]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발령내기 전에 형님과 사전 접촉은 없었고요?”
[전혀.]
“······.”
오진원은 믿지만, 이 상황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내가 지금 선도본관에 있다면 알 텐데.’
오 회장이 오진원을 만났든 안 만났든, 그가 이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견제를 하겠다는 거지.’
그 견제가 오 부회장을 위한 것인지, 혹은 오진원을 위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견제’인 건 확실해 보였다.
“형님, 회장님이 곧 만나자고 하시겠네요.”
[응? 아마, 그렇겠지.]
“만나신 후에 바로 저한테 보고하세요.”
[보······고?]
오진원이 목소리가 좀 낮아졌는데.
지혁은 다시 한번 강조하여 얘기했다.
“네. 보고하시라고요.”
[······ 그래.]
지혁은 한마디 한 후 끊었다.
“그럼 지금 미팅 중이라, 이만 끊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래, 지혁아. 수고.]
뚝.
전화를 끊은 뒤, 지혁은 윤 실장과 장 실장을 돌아봤는데.
두 사람 모두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통화 소리가 좀 컸나요.”
지혁은 살짝 미소 지은 뒤 말했다.
“좀 두고 보죠. 어쨌든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장 실장은 인사한 후 먼저 대표이사실을 나갔고.
그가 나가자마자, 윤 실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네.”
“너무 심해요.”
“뭐가요?”
“실차장님······ 아니, 이제 선도전자 대표님이라고 해야 하나.”
“······.”
“그렇게까지 압박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떤 분인지 잘 아시면서.”
지혁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윤 실장님은 진원 형님을 믿으시나 보네요.”
“믿어야죠. 믿을만한 분이잖아요.”
“······.”
“오진원 대표님은 직원들에게 신망이 높은 분이라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 부회장님과는 달라요.”
지혁은 윤 실장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진원 형님을 너무 함부로 대하면 직원들의 반감을 살 거라는 거잖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윤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주제 넘었나요?”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지혁을 보았는데.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니요. 그런 얘기는 언제든 해주세요.”
“······.”
“고맙습니다.”
지혁과 오 부회장의 가장 큰 차이다.
성격이 강한 건 둘이 비슷하지만, 지혁은 들을 줄 알았다.
***
일주일이 더 지났다.
아무래도 대표이사로 막 취임된 시기라 정신없었지만.
지혁의 리더쉽 하에 조직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그룹의 실력자이자, 유명 인사.
그가 그룹 비서실장이었다는 점은 조직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직원들은 지혁의 경영방침에 큰 반발 없이, 잘 따라주었다.
월요일 아침.
윤 실장이 업무보고를 했고.
회의실에는 지혁 외에 비서실장과 전략실 팀원들이 있었다.
“이상으로 보고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윤 실장은 지혁의 대표이사 취임 후, 약 2주 동안 전체 전략을 그리는 데 많은 수고를 했다.
물론, 지혁 및 전략팀원들과 함께했지만, 아무래도 전략실의 수장인 윤 실장이 역할이 컸다.
“고생하셨습니다. 전략실장님.”
윤 실장은 고개를 숙이며 답례했고.
지혁은 이어서 말했다.
“자, 그러면. 선도물산에서 가장 파이가 큰 건설부문을 건드려봐야겠는데.”
“······.”
“윤 실장님. 큰 그림은 알겠고요. 세부 전략을 짜야겠죠.”
윤 실장은 쩔은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선도물산 전략실장으로 부임한 뒤, 일복이 터져서 본인 특기인 칼퇴를 못 한 지가 2주나 지났다.
“대표님,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있는데······.”
전략 실장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본인 라이프 스타일과 너무 안 맞게 생활하다 보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하. 전략을 전략 실장님이 짜지, 누가 짭니까?”
윤 실장은 비서실장을 살짝 본 후 말했다.
“대표님도 그룹 비서실장이실 때 여러 가지 일 하셨잖아요.”
대놓고 센터링은 못 하겠고, 은근슬쩍 넘겨보려 했는데.
지혁은 웃으며 대꾸했다.
“장 실장님은 바깥 살림. 윤 실장님은 안 살림. 전 딱 이렇게 정했습니다.”
장 실장의 역할은 선도물산 내부보다는 그룹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거였는데.
“그 반대로 하시면 안 됩니까?”
누가 봐도 지금은 안 살림이 훨씬 할 게 많아 보였다.
“안 됩니다.”
지혁은 짧게 말한 뒤, 윤 실장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업무보고를 마무리했다.
“세부 전략 초안 짜시고. 이번 주 내에 건설부문 수뇌부와 미팅 일정 잡으세요.”
“······ 알겠습니다.”
***
선도물산 건설부문.
선도물산의 주력 회사다.
전년에 선도물산의 전체 영업이익이 약 1조 1천억 원 중 건설부문이 7천억 원을 넘게 했다.
즉, 영업이익액으로 건설부문은 선도물산에서 약 70% 비중을 차지한다. 매출 규모로는 이보다 더 크다.
선도물산의 성공을 위해서는 건설에서 이익을 내어야 한다.
‘가장 큰 걸 건드려야 한다.’
지혁은 선도물산 대표로 취임한 후, 건설과 관련된 각종 보고서를 섭렵했다.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다 거대해 보이지만.
경영자에게는 큰 것만 보인다.
자잘한 거 10개 실패하더라도, 큰 거 1개가 제대로 터지면 되는 것이다.
선택과 집중은 경영자에게 선택이 아닌 생존이기에, 건설부문은 지금 지혁에게 매우 중요했다.
건설부문의 헤드 타워가 있는 선도 빌리지 B동.
뚜벅. 뚜벅.
지혁과 전략실은 함께 로비로 들어갔는데.
패션상사 부문과 리조트 부문이 있는 A동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다지 우호적이지도 않은 분위기.
그래도 지혁은 대부분 알아보긴 했다.
‘만약 내가 비서실장을 안 했었다면.’
처음에 참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건설부문 대회의실 도착.
지혁은 중앙에 선 남자를 살폈다.
손목에 굵은 금시계를 둘렀으며.
두꺼운 체격에, 올백으로 넘긴 헤어스타일.
눈에서는 형형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양은철이군.’
선도물산 건설부문 부문장 양은철 사장.
“네, 안녕하세요.”
한눈에 봐도 그의 인상은 꽤 강렬했다.
“취임식 때 뵙고, 두 번째네요.”
양 부문장은 웃으며 말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양 부문장을 제외한 기존 부문장은 모두 교체됐다.
대표를 막 만난 자리.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 건 결례다.
양 부문장 나름으로는 기선제압을 위한 줄타기를 하려는 거였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하. 감사는요. 벌써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시한부라는 게 있잖아요.”
“······.”
“살아도 사는 게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