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관찰과 진단 (2)
“네? 갑자기요?”
양 부문장은 놀라서 바라봤고, 윤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오 부회장 지시라고 해서 그런 건가?’
자세히 지혁의 표정을 살폈는데.
급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 지혁이가 기분파는 아니잖아.’
윤 실장은 지혁이 뭔가 생각이 있어서 이럴 거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인가요?”
하지만, 양 부문장은 윤 실장만큼 지혁을 알지 못했고, 곧바로 날카로워졌다.
영업본부 부활.
단 몇 마디 듣고서 이런 지시를 내리는 건 급해 보였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지혁은 양 부문장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는 맞는 일이 지금은 틀릴 수 있는 거죠.”
“······.”
“어느 조직이든 리더에 따라서 기조가 바뀔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혁은 양 부문장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오 부회장님이 그 지시를 내렸을 때가 4년 전이라면, 양은철 사장님께서 부문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죠.”
양은철 부문장은 꽤 오랫동안 부문장 자리를 유지했다. 선도물산에서 가장 오래된 경영자였다.
“아마, 부임 초기고 상대가 부회장님이라서 부문장님 생각을 반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
“게다가 부회장님 의견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니까요.”
얘기를 들으면서 약간 흥분했던 양 부문장의 표정이 잠잠해졌다.
“오래전 부회장님의 지시는 접어두고요.”
“······.”
“선도물산 대표로서 말합니다.”
지혁은 또박또박 말했다.
“건설부문의 지금 기조를 반대합니다.”
꿀꺽.
양 부문장은 지혁의 말과 함께 뜨거운 공기가 확 하고 몰려오는 것 같았다.
“수주잔고는 늘려야 합니다.”
지혁은 ‘그 세계’를 생각했다. 세상이 끝난다고 생각한다면, 뭘 해봐야 의미 없는 거지만.
영감님이 해줬던 얘기.
‘그 세계’가 도래할 때까지 별의별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었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만 봐도 그렇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도적같이 다가온다.
‘망할 때까지는 잘 먹고 잘살아야지.’
“전 지침을 드린 거고요. 부문장님도 생각해 보시죠.”
“······.”
“앞으로를 생각할 때, 좋은 프로젝트만 받아서 수주잔고를 타이트하게 가져가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양 부문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최근 국제 정세를 생각하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긴 했다.
더군다나 세계적으로 긴축재정을 벌이는 추세이니······.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암산해본 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네, 대표님의 지침.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혁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양 부문장이 말했다.
“다만, 영업본부 신설이 간단한 일은 아니니, 좀 더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더 얘기해 볼까요?”
양 부문장은 전략팀장에게 지시했다.
“지난 4년간 수주잔고 변화추이 스크린에 띄어봐.”
***
“아······.”
현재 수주잔고는 15조 원.
4년 전만 해도 수주잔고가 40조 원을 넘었었다.
지혁은 그래프를 보며 말했다.
“차이가 꽤 많이 나네요?”
“네.”
양 부문장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고, 지혁은 다시 질문했다.
“수주잔고 40조 원이면 어떻습니까?”
“많은 거죠. 원자재 값이 폭등이라도 하면 꽤 낭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40조 원 다 받고, 연간 생산량을 늘려서 빨리 쳐낸다면요?”
“그게······ 현재 인력과 장비로 가능할지가······ 전략팀장, 바로 계산 가능해?”
“네.”
건설 전략팀장은 잠시 후 말했다.
“산술적으로는 불가능하진 않지만, 버거운 측면이 있어서 안정적으로 소화 가능하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외주도 쓰나요?”
“외주라기보다는, 오랜 협력사들이 있습니다. 거의 한 회사 같은 사이죠.”
지혁은 전략팀장에게 물었다.
“방금 계산하실 때 협력사도 넣으셨고요?”
“네.”
“흠, 그러면 협력사를 더 늘리면 되겠네.”
지혁은 참 간단하게 대답했다.
양 부문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협력사 늘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도물산의 협력사 평가 기준이 있고요. 기준에 충족하는 협력사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협력사 평가 기준이 과한 부분은 없고요?”
“그건······.”
양 부문장이 말하려는데, 지혁은 손으로 막고 전략팀장을 바라봤다.
“이건, 전략팀장님께 묻는 겁니다.”
“네? 아, 네.”
전략팀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나한테.’
“처음부터 전략실은 아니셨을 거 아닌가요? 실무 경험했던 거 떠올리고 말씀해주십시오.”
“아······.”
전략팀장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양 부문장의 눈썹이 올라갔지만, 지혁은 괜찮다며 어서 말하라고 손짓했고.
전략팀장은 얘기를 이어갔다.
“현재 협력사 평가 기준이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거라.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꽤 있습니다. 특히, 협력사 자격으로서의 매출 규모 기준이······ 그에 맞는 협력사 찾기 힘들거든요.”
막상 입이 열리자 전략팀장은 술술 얘기했다.
“만약 사고가 터졌을 때, 클레임을 받을 수 있는 여력이 있어야 하므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협력사를 선정하는 것.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닌데요. 요즘엔 보험도 잘 되어 있고, 굳이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울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
“실력 좋은 소규모 건설사도 꽤 많습니다. 우리 회사가 협력사 선정에 상당히 방어적인 건 사실입니다.”
양 부문장은 무거운 얼굴로 얘기를 들었다.
지혁은 전략팀장의 얘기를 다 들은 후 양 부문장을 봤다.
“이 얘기 들으신 적 있습니까?”
“처음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물음에 양 부문장은 전략팀장을 바라봤다.
“왜 그랬어? 왜 얘기 안 했어?”
전략팀장은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 기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양 부문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기준?”
“네. 기준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양 부문장은 말을 끓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답답한 사람아. 기준을 누가 만들었나? 어?”
“······.”
“사람이 만든 거 아니야? 현실에 맞지 않으면 바꿔야지. 그걸 왜 가만히 있어?!”
“······.”
전략팀장은 할 말은 있지만, 하지 않았다.
‘기준’이라는 건 바꾸려면 상당히 번거로우며, 직원에게 좋을 게 없다.
일하는 방식 바뀌면, 혼란이 생기고, 적응하는 데 시간 걸릴 뿐.
내 회사라고 여기며 다니는 몇몇 별종 회사원 말고는, 굳이 회사 기준을 바꾸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월급 받는 회사원으로서는 그게 당연하다.
“기준은 리더가 알아채고 바꿔야죠. 그걸 왜 직원 탓을 합니까? 하하.”
지혁은 가볍게 양 부문장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는 지금 선도물산의 대표이사지만,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실무자급에서 일했었다.
일할 때 협력사들 많이 상대해봤고, 신규 협력사 개발에 어려움을 느껴서, 팀장 시절 상품본부에 보고하여 기준을 확 다 바꿔버렸다.
그렇다고 기준을 무조건 다 낮춘 게 아니며, 불량률 평가 등의 꼭 필요한 기준은 올리기도 했다.
‘실무 경험이 효과가 있네.’
오랜 기간 경영자급에서만 일했던 양 부문장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었다.
***
“전략팀장, 협력사 평가 기준 변경안 준비해. 이번 기회에 바꾸자고.”
“네, 알겠습니다.”
전략팀장은 양 부문장의 지시를 받았고, 지혁은 미팅을 마무리하려 했다.
“수주잔고 4년 전 수준으로 높이는 걸로 기준 잡겠습니다.”
양 부문장은 묵묵히 지혁의 말을 들었다.
“저 무리한 얘기 안 합니다. 규모는 늘리면서 수주받을 프로젝트의 수익성까지 지금 수준으로 맞추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는 안 해요.”
이 말에 양 부문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이상주의자는 아니구나.’
최상위 꼭대기에 있는 경영자는 이상주의자가 많다. 예를 들어, 말도 안 되는 낮은 판매가를 타겟으로 잡고, 원가율은 낮추라는 것처럼 말이다.
말로 지시하는 건 쉽지만, 실무자는 죽어나는 거다.
‘불가능이 없다’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불가능은 있다.
“다만 수익성도 포기하지 마시고, 좋은 프로젝트를 수주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세요. 우선순위는 수주잔고 규모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네, 알겠습니다.”
“영업본부는 빌딩, 토목, 플랜트 사업부와 동등한 위치로 만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역할이 클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 부문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오늘 아주 유익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양 부문장은 환한 미소로 지혁과 악수했다.
‘괜한 소문이 아니구나.’
약 90분 남짓.
지혁과 시간을 보내며, 양 부문장은 그에게 완벽히 탄복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인재.’
처음엔 그 소문이 부정적으로 들렸었는데.
만나보니, 그건 하늘이 내린 사람 같다는 뜻이었다.
“대표님과 함께할 시간이 아주 기대됩니다.”
지혁은 싱긋 웃으며, 잡은 양 부문장의 손등을 왼손으로 두들기며 말했다.
“네, 기대하십시오.”
***
돌아가는 길.
수행원들 먼저 보내고, 지혁은 윤 실장과 함께 아지트에 들렸다.
선도물산과는 좀 떨어진 곳.
지혁은 윤 실장에게 말했다.
“담배 태우셔도 돼요.”
“정말요?”
“네, 한숨 돌리고 가려고 들린 건데. 눈치 보지 말고 어서 펴요.”
윤 실장은 망설이다가 담배를 물었고, 지혁은 캔 커피를 땄다.
후유-
윤 실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물었다.
“대표님.”
“여기선 그냥 편하게 얘기해요.”
“그게 더 어색해요. 그냥 하나로 통일할게요.”
지혁은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아까 오 부회장 흔적 지우기 의도도 없진 않았죠?”
윤 실장이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것도 있죠.”
“역시, 시원시원하셔.”
쉽게 긍정하는 지혁을 보며, 윤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혁이 말했다.
“오 부회장의 기조도 나쁘진 않잖아요. 양보단 질에 집중하자는 건데.”
“······.”
“하지만 의도가 불순해요. 내가 부회장님을 아니까.”
지혁은 본인이 봤던 오 부회장을 떠올렸다.
“분명 선도전자가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강했을 거예요.”
“굳이 그 목적 때문에?”
윤 실장은 의구심을 표했지만.
지혁은 확신하여 말했다.
“우리 회사 건설부문은 가능성이 아주 커요.”
“······.”
“오 부회장도 그걸 보고 견제하려 했을 거예요.”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잘 만하면 머지않아서 선도물산이 선도생명은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
선도그룹 매출 규모로 선도생명이 2위, 선도물산이 3위다.
이 순위는 꽤 오랜 시간 굳어졌으며, 2위와 3위 차이도 꽤 난다.
윤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네, 목표는 크게 갖는 게 좋죠.”
지혁은 하늘을 봤다.
구름이 먹먹한 하늘.
습기 찬 공기에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후 4시.’
지혁은 빌딩 숲 사이로 흐린 하늘을 보다가.
“윤 실장님.”
“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일 시키려고?”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술 땅기는 날씨네요.”
“오호~!”
윤 실장은 좋아서 바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간 되죠!”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상품기획 1팀 불러서, 자리 한번 가질까요?”
윤 실장은 대답 대신 재빨리 핸드폰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