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01화 (201/301)

201. 뭐가 문제야

“위하여~!”

룸으로 된 술집.

지혁과 윤 실장. 그리고 상품기획 1팀의 4명은 일제히 잔을 부딪쳤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아~ 이 시간을 기다렸어요.

-영광입니다!

지혁은 항상 단골 순댓국집을 가고 싶었다.

순댓국집은 회사 근처인데, 대표이사가 특정팀과 자리를 갖는 걸 다른 직원들에게 보이는 건 좋지 않다며 윤 실장이 말렸다.

“윤 실장님 말씀 듣길 잘했네요.”

룸 형태로 된 술집에서 만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순댓국집에서 만났다면 지혁도 그렇지만, 상품기획 1팀원들이 더 불편해했을 것이다.

팀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뻘쭘하게 앉아 있는 한 여성에 말을 걸었다.

“배해윤 씨도 많이 들어요.”

“네! 대표님!”

그녀가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대답했고.

지혁은 손 대리를 웃으며 바라봤다.

“이야~ 손정진이 막내를 벗어났단 말이야?”

“아유~ 대표님. 저 막내 생활 오래 했어요. 이젠 받을 때도 됐죠.”

손 대리의 목소리 볼륨이 예전과 다르다. 어깨도 예전에 비해 좀 올라간 듯했다.

지혁은 눈을 흘기며 손 대리에게 말했다.

“여기선 그냥 형, 동생 하자. 뭔 대표야.”

“아~ 싫습니다.”

술자리 시작한 이후 몇 번째 듣는 얘기였지만, 손 대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쳇. 배해윤 씨 집은 어디에요?”

“도봉동입니다!”

“와~ 멀리 사네. 출퇴근하기 힘들겠어요.”

“아닙니다!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지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물었다.

“다닐 수 있는 회사가 있어서 감사한 거예요? 선도물산이라서가 아니고요?”

순간.

배해윤은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술자리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야? 농담도 못 하겠네?’

지혁답지 않게 상당히 당황했고, 손사랫짓하며 다급하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배해윤 씨. 진짜 농담이야.”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말할 때 좀 더 조심을······.”

정 팀장이 옆에서 타박을 줬다.

“어디 대표님 앞에서······ 말 똑바로 안 할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지혁은 정 팀장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에헤이~ 그러지 마요! 아, 농담이라니까.”

배해윤은 고개를 푹 숙였고, 옆에서 윤 실장이 낄낄거렸다.

“대표님이 잘못했네.”

지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뒤, 정 팀장을 불렀다.

“선배님!”

“네?!”

‘선배’라는 호칭에 정 팀장이 놀라서 바라보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계급장 떼죠. 술자리 끝날 때까지 선배님들은 저한테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벌주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부릅니까?”

“지혁이.”

“······.”

“존댓말도 벌주에요.”

다들 머뭇거리고 있는데, 윤 실장이 스타트를 끊어줬다.

“그러지 뭐! 우리 오지혁이 많이 출세했다. 그치?!”

“······.”

순간 싸늘해졌다가.

하하하.

다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

얼굴이 불콰해지고.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던 중.

지혁은 알딸딸한 기분에 손 대리를 불렀다.

“정진아.”

“네!”

“문제가 뭐냐?”

“네?”

“에이~ 있잖아.”

지혁은 옆에 앉은 손 대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나 대표되고 상품기획팀 들어왔을 때, 네 눈빛 읽었거든?”

“······.”

“일하면서 어려운 거 있잖아. 얘기해 봐.”

윤 실장이 옆에서 말렸다.

“지혁아, 여기서 일 얘기 할래? 너 대표인 거 티 내고 싶은 거야?”

이제 윤 실장과 정 팀장은 지혁을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지혁은 윤 실장의 말을 무시하고 손 대리에게 다시 말했다.

“대표가 아니라, 오랜만에 돌아온 팀원이라 생각하고 얘기해 봐. 여기 상품기획 1팀으로 모인 거잖아.”

술 취한 와중에도, 손 대리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정 팀장의 눈치를 살짝 봤는데.

“괜찮아. 얘기하라잖아. 편하게 해.”

손 대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흠! 그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이해해주시고.”

“사설이 길다. 그냥 얘기해.”

“네.”

손 대리는 지혁이 떠난 뒤, 상품기획팀이 가졌던 고충에 관해 얘기했다.

“우선 방향성이 너무 뚜렷했습니다.”

“방향성?”

“네. 전 대표이사님이 연구원 출신인 거 아시죠?”

“어, 알아.”

“게다가, 패션의 주요 임원은 영업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고요.”

손 대리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무조건 수치에만 집중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유통에 치중하고, 판매가 낮춰서 잘 팔릴 수 있는 제품만 생산하는 방향으로 간 거죠. 아주 뚜렷한 방향으로요.”

“흠······.”

“옷을 만드는 건지, 식료품을 만드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제품 특색은 없어지고,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갈수록 희미해져서······ 오랫동안 스타덕을 아껴주시는 고정 고객층에게 욕 많이 먹었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상품본부장님이 꽤 방어했다고 들었는데.”

“네, 방어해 주셨지만, 한계가 있었죠. 그분도 어쨌든 자리를 지켜야 하니까요.”

지혁은 손 대리를 얘기를 유심히 들으면서, 내심 그가 대견하기도 했다.

‘많이 컸네. 예전과는 생각 수준이 달라.’

“아무리 시키는 대로 하는 회사원이라지만, 상품기획 하는 사람은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하는데. 어차피 찍어내듯 상품 만들어 내는 거 판관비라도 줄여야 한다며 외근도 중지시키고, 새로운 거 좀 해보려 하면 중간에 막고.”

“······.”

“정말 답답했습니다.”

지혁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분들은 창의성을 이해 못 해요. 연구하고, 물건만 팔던 분들이라.”

약간 말이 격정적이었지만, 어차피 그들끼리 술 마시는 자리라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지혁 팀장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

“이 상황을 보셨다면, 가만히 안 계셨을 것 같아서요.”

지혁은 정 팀장이 기분 나빠할 소리 같아서, 눈치를 봤는데.

“아, 난 괜찮아. 지혁아. 틀린 소리 아니니까.”

“······.”

“다르잖아. 넌 비교 대상이 아니야.”

정 팀장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네가 와서, 우리 기대 많이 하고 있어.”

“······.”

“상품기획 잘 아는 사람이 대표로 왔잖아. 예전에 활발했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리고 지혁을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대표님이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기 어렵다는 거 알아.”

“지금 시간이······.”

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

‘뭐야? 갑자기?’

정 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혁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그의 성향을 잘 아는 상품기획 사람들은 왠지 불안했다.

“여보세요? 아, 본부장님. 접니다.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상품본부장님?!’

팀원들이 놀라서 눈이 커지자.

지혁은 짓궂은 얼굴로 조용히 하라며, 입 앞에 검지를 갖다 댄 뒤.

스피커 통화로 전환 시켰다.

술집이어도 룸으로 된 공간이라 조용했다.

[아, 네.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퇴근하셨어요?”

[아닙니다. 아직 회사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미안할 뻔했는데.”

[뭐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지금 대표님 실로 갈까요?]

“아, 아닙니다. 전 퇴근했습니다.

지금 저녁 8시쯤 되었다.

“제가 오늘 회사에서 얘기를 좀 들었는데요. 반영이 가능하실까 해서요.”

[네, 말씀하십시오.]

“상품기획 직원들을 너무 사무실에 가둬둔다는 말이 있거든요? 본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시장을 많이 보고 고객 조사를 해야 인사이트가 생기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직원들이 자유롭게 외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품본부장은 쿨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그 부분 고려하고 있었고요. 일부 직원은 외근 나가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어떻게 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지혁은 잠자코 듣고 있는 상품기획 팀원들을 돌아본 뒤,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경비 한도를 너무 낮게 책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네?]

“외근 시에 경비 사용 범위와 한도 금액을 올려주시면, 직원들이 서로 나가려 할 것 같은데요.”

[······.]

“외근 보고서 양식도 간략하게 줄이고요. 보고서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결과가 중요하죠.”

상품본부장은 이 요청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경비 사용 범위와 한도는 인사실과도 상의해야 하며, 아무리 상품본부장이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혁은 직접 밀어붙여도 되지만, 상품 팀원들 듣는 앞에서 상품본부장의 멋진 모습을 끌어내고 싶었다.

“에이~ 본부장님. 하실 수 있잖아요. 쿨하게 승낙해 주시죠.”

지혁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상품본부장은 어쩔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혁은 상품 팀원들을 향해 활짝 웃었고.

팀원들은 소리는 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늦은 시간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늦게까지 일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네, 대표님. 좋은 밤 되십시오.]

뚝.

전화를 끊은 뒤.

-오지혁! 오지혁!

팀원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큰 소리로 지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아~ 화끈해. 이래야 오지혁이지!

-대표님~ 여전히 멋지십니다~

오랜만에 지혁의 퍼포먼스를 본 팀원들은 좋아하는 걸 넘어서, 감격스러워 했다.

지혁은 진정하라는 듯 손으로 바닥을 누르는 시늉을 하다가.

“그다음 얘기는 안 해도 알죠?”

상품 팀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결과는 꼭 내겠습니다!”

***

선도전자 화성 캠퍼스.

검은색 세단 3대가 도착했고.

현관 앞에는 오진원과 대표이사실 수행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덜컹.

뒷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을 보자.

오진원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손을 마주 잡았다.

“부회장님!”

미래기획실 최재훈 부회장.

참모들과 함께 선도전자를 방문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 반갑네요.”

오진원이 선도전자 대표이사로 발령받은 지 약 2주, 지혁이 선도본관을 떠난 지는 한 달이 되었다.

“너무 친한 척하지 마세요? 저 오늘 점검하러 온 겁니다.”

“어이쿠.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오진원은 마냥 최 부회장이 반가웠다.

미래기획실은 대표이사가 바뀌고 나면, 해당 관계사를 방문하여 경영점검 및 컨설팅한다.

새로운 대표이사가 방향성을 잘 잡고 있는지, 그룹 총수의 경영 방침과 일치하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본다.

약 2시간가량의 컨설팅을 끝난 뒤.

선도전자 대표이사실에 최 부회장과 오진원 단둘이 마주 앉았다.

“와~ 부회장님. 얄짤 없네. 너무 빡세게 보시는 거 아니에요?”

“원래 같은 팀끼리는 그래야 하는 겁니다. 하하. 오진원 사장님이 잘돼야, 선도물산 대표님께도 힘이 실리지 않겠습니까.”

한배를 타고 있는 사이.

최 부회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는데.

오진원의 얼굴에 살짝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선도물산은 어때요? 거긴 컨설팅 잘 받았나요?”

“아직 안 갔어요.”

“네?”

오진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보다 지혁이가 먼저 취임했는데요.”

“그게······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지네요.”

말을 마치고 최 부회장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지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최 부회장도 방문하는 것에 쉽게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이다.

“아, 말 나온 김에.”

최 부회장은 오진원을 향해 말했다.

“다음 주에 저랑 함께 갑시다. 스케줄 잡을 테니까.”

“······.”

대답이 없어서, 최 부회장이 한 번 더 불렀으나.

“대표이사님?”

오진원은 못 들은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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