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그날 이후
오진원은 눈을 끔뻑였고.
지혁도 대답을 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어······ 우리 아빠지.”
“그래서 묻잖아요. 뭘 그렇게 당황해요?”
오진원은 지금 당황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일 거로 생각했다.
“아니야~ 나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도 당황하신 거 같은데?”
“하하. 얘가 참. 놀리지 마~”
확실히 오진원은 당황했다.
‘눈빛이 참······.’
지금 지혁이 자신을 세밀히 관찰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 쓰였으며, 방심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그 얘긴 됐고. 회장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
처음엔 오해받을까 봐, 왜 자신에게 묻냐며 받아쳤었지만.
“진짜 몰라.”
실제로도 잘 몰랐다.
오 회장은 오진원을 은근히 피하며 지냈다.
“굳이 얘기하자면······ 그날 이후로 말수 적어지시고, 행동반경이 좁아지신 거?”
“······.”
“원래도 은둔자 성향이 있으셨지만, 더 심해지셨지. 집에서도 얼굴 보기 힘들 정도니까.”
오진원은 아직 결혼 전이며, 본가에서 함께 살고 있다.
돌싱인 오진양 부회장만 분가하여 산다.
지혁은 최 부회장을 바라봤다.
“선도본관에서는 어때요?”
“얼굴도 잘 못 봐.”
이제 오 회장은 선도본관에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원래도 집무실에 자주 나오는 편은 아니셨지만, 이젠 뭐 손에 꼽을 정도지.”
“나오시면 최 부회장님은 만나세요?”
“아니.”
최 부회장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오진원 대표와 똑같아. 그날 이후로 피하는 느낌이야.”
“그래도 최 부회장님은 중재했으니,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윤리경영위에서 지혁이 사정없이 몰아칠 때, 최 부회장이 말렸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뭐, 윤리경영위에서 벌어질 일을 알면서, 아무런 정보를 안 줬잖아.”
“······.”
“뒤통수치는 데 한몫을 한 건 사실이지.”
지혁은 꺼림칙했다.
그들이 숨죽이고 있는 건지, 혹은 다른 꿍꿍이를 준비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두는 건 위험한 일이다.
“뭐라도 생각해 보세요. 굳이 회장님 본인이 아니어도, 주변에 뭐 달라진 거 없는지.”
지혁은 남의 눈을 빌려, 중요 사항을 확인하려니 답답했다.
‘분명 뭔가 변화가 있긴 할 텐데.’
“아.”
최 부회장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요즘 혜빈이가 좀 드나들긴 하더라.”
“혜빈 누나요?”
오 회장의 막내딸. 오혜빈을 말하는 거였다.
“어. 그 친구가 회사 방문은 잘 안 했었는데. 요즘 왔다 갔다 하더라고. 회장님 안 계실 때도.”
“······.”
오혜빈은 형제 중에서 오 회장과 가장 가깝다.
막내딸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덕분이다.
‘아······ 이런.’
오혜빈의 이름을 떠올리니, 아차 싶었다.
***
“얼마나 자주 들락거리는데요?”
“글쎄······ 내가 뭐 현관 앞에서 지키고 있는 건 아니니까.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대략으로라도요.”
지혁의 눈빛이 변했다.
최 부회장은 부담스러워서, 눈을 피하며 말했다.
“몰라. 그냥 오다가다 봤어.”
잠자코 듣던 오진원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나 나갈 때 자주 같이 나갔었네.”
“같이 나가면서, 어디 가는지 묻지도 않아요?”
“형제 사이엔 그런 거 안 물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짧게 말했다.
“앞으로는 좀 물으세요.”
“알았어.”
지혁은 곰곰이 생각했다.
‘혜빈 누나가 꽤 효녀인데······ 형제 중에서 가장 오 회장을 챙기잖아.’
쉴 새 없는 공격으로 오 회장과 오 부회장에게 좌절을 안겨줬었다.
지금쯤이면 오혜빈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오혜빈이 내 편에 서기로 했지만······.’
오 회장과 지혁이 적대관계로 보인다면, 그녀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오혜빈을 형제 중에 오진원 다음가는 인재로 여기고 있다.
“혜빈 누나 미국에서 완전히 들어온 거예요?”
“어, 그런 거 같더라.”
“그런 거 같더라는 뭐예요?”
“형제들 간에는 그런 자세한 얘기 안 한다니깐.”
지혁은 형제가 없으니, 잘 모른다.
아주 우애 좋은 형제 사이가 아니면, 그냥 남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이라는 걸.
생각에 이르면 망설이지 않는다.
지혁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혜빈 누나 아직 안 자겠죠?”
“아직 9시도 안 됐어.”
지혁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 뚜- 찰칵.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어?”
지혁은 안내메시지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신호음 두 번 가고, 안내메시지 나오는 거면······ 수신 차단 아닌가?”
“······.”
한 번 더 걸어봤는데. 똑같았다.
최 부회장과 오진원은 씁쓸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와······ 이 누나. 재밌네?”
지혁은 황당해서 웃다가 오진원에게 물었다.
“형님, 이거 수신 차단 맞죠?”
“글쎄, 내 생각엔 수신 차단까지는 아니고······.”
오진원은 달래는 눈길로 지혁에게 말했다.
“전화 거절 메시지인 거 같아.”
지혁이 대꾸할 말을 최 부회장이 대신해 주었다.
“그게 수신 차단이지 뭐야.”
“조금 다르죠.”
오진원을 선도전자 대표이사로 보냈고, 오혜빈을 회사로 불러들이고 있다.
오혜빈의 수신 차단에서 지혁은 느낌이 왔다.
‘회장님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야.’
***
“뭐, 바쁜 일이 있나 보지.”
오진원은 지혁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했지만.
골똘히 생각하느라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님.”
한동안 생각하던 지혁이 불쑥 오진원을 불렀다.
“응?”
“제가 큰집에 한번 가도 될까요?”
“미쳤어?”
오진원답지 않게 대뜸 거친 말이 나왔다.
“네가 가긴 어딜 가?”
말을 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집 안에서 지혁 욕을 많이 하고 있었다.
특히 큰어머니께서.
“왜요? 큰어머니께 인사드린 지도 오래됐고.”
“안 해도 돼. 지금은 인사드리는 게 민폐야.”
“하하.”
지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젠 꽤 상대해봐서, 오진원은 그가 빈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결사적으로 말렸다.
“지혁아, 아서라. 진짜 큰일 난다.”
“······.”
“제발, 우리 집 평화를 깨지 말아줘.”
평화라고 하기도 뭐 했지만.
어쨌든 지금 큰집은 살얼음 걷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 지내고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 무너졌으니, 분위기가 정상적일 리 만무했다.
“마침, 타이밍이 맞아요.”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결심이 든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괜찮겠지, 싶다가, 모가지 날아가는 경우를 ‘그 세계’에서 많이 봤다.
축구 경기에서도 골 넣은 직후 5분이 가장 위험하다고 하지 않던가.
‘좀 따가운 시선이야 받고 마는 게 낫지. 불안한 여지를 둘 순 없어.’
“타이밍이 맡긴 뭐가 맞아. 문전박대당하면 어쩌려고?”
“설마, 명절 인사드리러 온 조카를 문전박대하겠어요?”
“아······.”
지혁이 말한 타이밍은 ‘명절’이었는데.
마침, 추석이 2주 뒤였다.
“명절 인사드리러 갈 거니까, 형님이 운만 잘 띄어줘요.”
“뭘 어떻게?”
“식사할 때라든지, 가족들 함께 모일 때. 동생네가 인사하러 오려나?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하······ 참나.”
‘이젠 별걸 다 시키네.’
오진원은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알았다. 그 정도야 뭐. 근데 괜히 욕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 정도로 욕먹겠어요.”
“몰라서 그래. 요즘 우리 집에서 네 이름은 금기어야.”
“하하.”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로 관심 가져 주신다니 고맙네요.”
최 부회장은 그런 지혁을 질린 눈으로 보았다.
‘말하는 거하고는······ 하여간 별종이야.’
오진원이 말했다.
“집에는 어떻게 오려고? 과일 상자 하나 들고, 밀고 들어오려는 생각은 아니지?”
지혁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어머니께 연락드리라고 하려고요.”
“아······.”
이제야 오진원은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혁은 살짝 미소 지었다.
‘엄마 찬스.’
***
다음날 회사.
선도물산의 경영방침은 부문별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이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큰 걸 건드려야 해.’
지혁은 각 부문장의 비즈니스 성과를 기다리면서, 회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큰 프로젝트를 그리고 있었다.
선도물산을 넘어 선도그룹을 흔들 수 있는 프로젝트.
어쩌면 국가적으로도 이슈가 될 만한 걸 말이다.
대표이사여도 팀장 때처럼 지혁은 반나절 이상은 사무실 밖으로 나갔고.
계속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보고 들었다.
회사 밖을 나가지 않을 때는, 회사 안이라도 돌아다녔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대표이사다 보니, 알아보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지혁에게는 은밀하게 움직이는 방법을 ‘그 세계’에서 터득했다.
직원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퇴근이 가까워진 시간.
평소 직원들이 잘 다니지 않는 복도로 숨소리와 발소리까지 극도로 죽이고 움직인다.
인기척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팀장부터 비서실장 때까지.
지혁은 이렇게 움직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동태를 살폈었다.
대표이사가 돼서는 주로 직원들의 분위기를 살필 때 은밀하게 움직였는데.
‘생산팀에 한번 가볼까.’
황 차장이 생산팀장이 된 이후로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지혁도 바빴지만, 황 팀장도 오랜만에 생산 업무를 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잘 지내고 있겠지.’
지혁은 은밀히 생산본부를 향해 움직였다.
‘생산 1팀.’
슬금슬금.
파티션 너머 황 팀장이 얼굴이 보였다.
얼굴만 봐도 반가웠다.
들어가서 아는 척을 할까 하다가······.
‘아니다. 일하는데 괜히 방해되지. 마실 나온 거니까, 조용히 있다가 가자.’
생산 1팀을 잠시 더 지켜본 뒤, 돌아가려는데.
“팀장님, 원가견적서 다시 가져왔습니다.”
“흠······.”
황 팀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김 과장.”
“네, 팀장님.”
“자네는 어떻게 된 게, 하라는 것만 딱 해오나?”
“공임이 잘 못 되었다고 말씀하셔서 수정해 왔는데요.”
황 팀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전에 원가견적서를 다시 살피라고 했지. 잘못 들어간 게 있으니 전체적으로 살피라고. 공임은 예시로 든 거고.”
김 과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예시를 구체적으로 들어주시던가요.”
“뭐라고?”
김 과장의 태도는 굉장히 불순했고.
아무리 착한 황 팀장이라고 목소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께서 생산 업무를 오랜만에 하셔서 잘 모르시는 거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요. 비딩으로 낙찰된 완사입 오더 건은 저희가 세부 사항을 손대지 않습니다.”
“내가 얘기했지. 협력사와 네고단가 낮추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입찰단가는 그대로 가되,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협력사 평가가 될 것이고, A급부터 C급을 가려내지.”
지혁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황 팀장님이 틀린 소리 하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짓을 뭐 하려 하냐고요.”
“짓?!”
황 팀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김 과장이 언성을 높이니, 순한 사람이라 당황한 것이다.
“비서실에 계시던 분이 생산팀장으로 온 것도 어이가 없는데.”
혼잣말이었으나,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다 들릴 정도였다.
“······.”
황 팀장은 입이 굳어 버려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대표이사는요?”
사무실 입구에서 지혁이 나타났다.
“비서질이나 하다 왔는데.”
김 과장은 놀라서 동공이 흔들렸고.
지혁은 입꼬리만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자격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