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악재 혹은 기회 (2)
“허이고······ 피곤해지겠네.”
윤실장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지혁의 눈빛만 봐도 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것이다.
양 부문장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 네. 출장 얘기는 없었습니다.”
“큰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보이는데······ 간다는 얘기는 없다고요?”
양 부문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리스크가 아직 표면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니까요.”
“······.”
“지금 요르단을 가는 건, 딴생각하지 말라며 단도리 하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모양새 따지는 국전에서 무리수는 안 두려고 할 겁니다.”
쳇.
지혁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그럼 손 놓고 가만히 있어요? 뭐라도 해야지?”
“······.”
“기업 경영자들 불러서 정보 공유할 정도면, 꽤 가능성 있는 일이라는 거 아니에요?”
양 부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요, 아니면 만약 안 좋은 결과가 발생했을 때, 책임회피를 위해 약 치는 걸 수도 있습니다.”
지혁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가능성이 적은 일을 책임회피를 위해 밑밥부터 깐다?”
양 부문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종종 그럽니다. 국전도 공무원에 가깝지 않습니까. 좀 방어적이죠.”
그건 회사원들에게도 있는 모습이기에, 전혀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사안은 그러기엔 많이 컸다.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윤 실장님은 단독 수주가 부분 수주로 바뀔 가능성이 정말 있는 건지 확인해보세요. 국전 말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요.”
윤 실장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양 부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부문장님은 국전 쪽에 부분 수주로 바뀐다는 가정하에 접근해 주시고요.”
“네.”
“요르단 출장계획이 있는지, 없다면 이른 시일 내로 출장계획을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해주세요.”
양 부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사항을 받아 적었다.
“만약 출장계획이 없다면, 우리끼리라도 갑시다.”
“네? 아, 그건 좀 곤란합니다.”
잠자코 지혁의 지시를 듣기만 하던 양 부문장이 처음으로 반대의견을 냈다.
“요르단과의 주계약자는 국전입니다. 협력기업이 주계약자를 건너뛰고,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네, 대표님. 그건 좀 위험합니다.”
윤 실장도 양 부문장의 의견을 거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지혁은 짜증 섞인 말투로 얘기했다.
“큰 사업 날리게 생겼는데, 굼뜬 이만 기다리고 있자고요? 전 그렇게 못합니다.”
“······.”
“이게 자잘한 사업도 아니고 말이야.”
지혁은 상기된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선장이 제 역할 못하면, 밀어내고 키 잡아야죠.”
***
선도전자 화성 캠퍼스.
오진원은 전략실장과 정문에서 대기 중이었다.
“선도전자가 이게 안 좋네요. 찾아오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오진원의 투정 섞인 말에 선도전자 전략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방문은 으레 있는 일입니다. 선도전자만 유독 더 챙기시죠.”
“그러니까요. 이래서 선도전자 대표이사 되기 싫었는데.”
“······.”
말을 뱉은 후, 오진원은 아차 싶었고.
초승달 눈매로 전략실장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 선도전자 좋아합니다. 그냥 부담스러운 거 싫어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하하. 알고 있습니다.”
선도전자의 대표이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참 격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 오 부회장을 모셨던 전략실장은 이런 오진원 대표가 신선했다.
“아, 오시네요.”
검은색 세단 3대가 선도 캠퍼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섰고.
오진원과 대표이사실 수행원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덜컹.
차 문이 열리고 오 회장이 모습이 드러내자, 일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일행 중 가장 앞에 오진원이 서 있었고.
오 회장은 그에게 다가와 악수하며 말했다.
“오 대표. 수고가 많아.”
“회장님,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집에서 본 사이지만, 둘은 업무적으로 대했다.
오너일가라 온 가족이 회사 곳곳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오 회장은 공사 구분을 매우 중시한다.
오진원은 어릴 적부터 교육받으며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잘 알고 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오 회장은 오진원을 따라 선도전자 본관으로 들어가며, 계속 관찰했다.
특히 사무 공간을 시찰할 때 직원들 표정을 유심히 살폈는데.
‘좋아 보이는군.’
6개월 전에 방문했을 때와 달랐다.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으며, 사무실 분위기도 좋아졌다.
오진원이 잘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진양이로 밀어붙였던 게 실수였던 걸까.’
이미 오래전 얘기지만.
모든 참모가 오진원을 지지했을 때, 다 무시하고 장남을 밀어붙였던 일. 그게 윤리경영위 이후로 자꾸 떠올랐다.
선도 캠퍼스 시찰 후.
오 회장은 오진원 대표이사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차 한 잔 드릴까요?”
집무실에는 참모들도 있었는데.
오 회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 대표와 단둘이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오진원은 얼굴이 하얘졌다.
‘아, 왜요······.’
하지만, 누구 지시인가.
오진원의 대답도 듣지않고, 참모들은 순식간에 자리를 비워줬으며.
덜컹.
문소리와 함께 집무실에는 단둘만 남았다.
오 회장은 찻잔을 만지다가, 불쑥 말했다.
“잘 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감사합니다.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게 한마디 나눈 후 침묵이 이어졌다.
오 회장은 과묵한데다 말을 아끼는 타입이고.
오진원은 아버지가 어려웠다.
‘왜 둘이 있자고 하신 거야.’
아버지가 어렵지만, 침묵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뭐라도 얘기해 보려고 입을 떼려는데.
“내가 널 왜 선도전자 대표이사로 보낸 줄 아냐?”
“······.”
묵직한 말이 나왔다.
알 것 같았으나, 알고 싶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
“회사에 소속된 직원으로서 발령받은 직책에 걸맞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 부회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실수하지 않고 있는 힘껏 능력을 짜내어······.”
횡설수설.
오진원은 판에 박힌 얘기를 계속했다.
심각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오 회장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게 않게 막아야 했다.
“만약, 진양이가 아니라면.”
그러나, 오 회장은 한마디 말로 오진원이 입을 다물게 했다.
“그다음은 누구겠냐?”
***
몰랐던 얘기가 아니다.
알고 싶지 않았을 뿐.
오 회장이 속내를 밝혔으니, 오진원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전 싫습니다.”
“······.”
“회사에 뜻이 없습니다.”
오 회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맞받아쳤다.
“뭔 뜻이 없어. 회사 잘만 다니고 있구만.”
오진원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순전히 지혁이랑 약속한 것 때문에 다니고 있는 겁니다.”
빠직.
사무실 안이 너무 조용해서일까.
이빨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오지혁이 왜 나와?”
“······.”
오진원은 오 회장의 눈빛을 살폈다.
‘적의.’
그는 지혁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명절에 지혁을 만났어도 한번을 보이지 않던 걸, 오진원 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오진원은 놀라서 바라봤고.
오 회장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 녀석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중요치 않다. 관심도 없고.”
“······.”
“어쨌든 넌 내 아들이고, 나는 네 아비다.”
오 회장은 물끄러미 오진원을 바라봤다.
“나한테 서운한 게 많았냐?”
오진원은 어릴 적에 아버지의 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오 회장은 그를 큰형과 비교될 정도로 모질게 대했는데.
오로지 장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 때문이었다.
장남 외의 아들에게서 특출남이 보여지면, 오 부회장의 위치가 불안해질 거로 생각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일들이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일까, 오 회장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선도그룹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내 핏줄이어야만 한다. 내 아들로 태어난 이상 그 의무를 피하려고 하지 마라.”
“······.”
“단순히 내 욕심만 생각하는 게 아니야. 20만 명의 생계가 걸린 일. 난 그 녀석한테 못 맡긴다.”
간혹, 부적격한 모습을 보일지라도, 40년을 같이 살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 부회장이 훨씬 미더웠다.
‘참 한결같으시네.’
오진원은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니까.
***
선도물산 대표이사실.
똑똑.
[양 부문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오늘 두 번째 본다.
원래 부문장과 대표이사는 만날 일이 잘 없는데.
지금은 그만큼 사안이 중요했다.
“국전(국가전력)과 최종 확인된 내용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전략실장 시키시던가, 전화로 말씀하셔도 되는데.”
양 부문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건설부문만이 아니라, 선도물산에 타격이 갈만한 일입니다. 추가 논의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직접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지혁은 이런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네, 앉으시죠.”
양 부문장은 앉자마자, 바로 보고 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르단에 갈 계획은 없다고 합니다.”
“그럼 무슨 계획이 있다고 하던가요?”
“국전에서는 일단 상황을 좀 지켜보자고 합니다.”
“참나.”
지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지켜봐도 될만한 일이면, 말을 말던가. 명절 전에 기업들 긴급 소집해서 전파한 건 뭐야?’
“그럼 선도물산에서 현장에 직접 가보겠다는 얘기도 해보셨어요?”
“네. 섣부른 짓 하지 말랍니다.”
지혁의 표정이 굳자, 양 부문장은 손사랫짓한 후 재빨리 말했다.
“이런 뉘앙스를 풍겼다는 거지, 이렇게 말한 건 아닙니다.”
지혁은 분한 얼굴이었으나, 양 부문장이 달래듯 말했다.
“주계약자는 국전이라서요. 그들의 재가 없이 저희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못마땅하셔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됐고요.”
지혁은 그의 말을 끊었다.
“국전 본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네? 아······ 전남 나주에 있습니다.”
“멀리도 있네요.”
“그들이 원해서 간 건 아니고요. 국가 정책 일환으로 공기업들 혁신도시로 가라고 해서······.”
지혁은 바로 비서실장에게 전화했다.
“장 실장님, 접니다.”
지혁은 핏발 어린 눈으로 말했다.
“내일 나주 출장 스케줄 좀 알아봐 주세요.”
***
다음 날 정오.
지혁, 장 실장, 윤 실장, 양 부문장 외 건설부문 임원 4명.
나주시의 국가전력 본사 앞에 도착했다.
“들어갑시다.”
어제 부랴부랴 국전에 미팅 요청은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통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방문.
선도물산 대표가 도착했으나,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지혁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당당하고 힘찬 걸음걸이로 국가전력 본사 안으로 들어갔으며.
윤 실장은 지혁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지혁이랑 같이 다니면서, 이렇게 주변이 조용한 것도 참 오랜만이네.’
비서실장이 된 이후로.
어딜 가나 지혁이 가는 곳은 이목을 끌었었다.
국가전력 본사, 이곳에 지혁의 그림자는 아직 없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리셉션 직원의 물음에 지혁이 대답했다.
“해외원전본부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어디라고 전해드릴까요?”
들어올 땐 조용했으나.
분명, 나갈 땐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선도물산 대표가 왔다고 전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