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기다릴 수 없다
“어, 어디시라고요?”
리셉션 직원은 당황했다.
여러 대표이사를 맞아 봤지만.
지금의 지혁처럼 영업사원이 방문하듯 온 적은 없었다.
보통 정해진 일정에 격식을 갖춰서 오며, 경영자급이 내려와서 맞이한다.
리셉션 직원은 지혁의 말을 믿기 어려워서 주무 부처에 연락을 못 하고 있었는데.
“안녕하세요.”
건설 전략실장이 아는 척했다.
“네? 아, 네. 안녕하세요.”
리셉션 직원은 건설 전략실장의 얼굴을 아는 듯 바로 인사했고.
건설 전략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저 기억하시죠?”
“네. 기억합니다.”
전략실장은 국전을 가끔 온다. 얼마 전, 소집 회의에도 왔었다.
“우리 회사 대표님 맞으십니다.”
“······.”
리셉션 직원은 말은 않지만, 왜 대표님이 이런 식으로 방문하냐고 의구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고.
건설전략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좀 급한 일이라······ 그렇게 됐어요.”
“······.”
“해외원전본부에는 연락하고 온 거니까요.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제야 리셉션 직원은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리셉션 직원이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금 곧 내려오신다고 하거든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실 만하죠. 본인 일 하시는 건데.”
10여 분 경과.
예상보다 기다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건설 전략실장이 리셉션 직원에게 물었다.
“선도물산 대표님이 오셨다고 말씀하신 거죠?”
“네. 그렇게 전했습니다.”
“흠······.”
양 부문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혁은 괜찮다며 말했다.
“불쑥 찾아온 거잖아요. 괜찮습니다.”
“······.”
“얻을 것만 가져가면 됩니다.”
게이트 안에서 한 남자가 투덜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음에 오라니까. 오늘 바쁜데.”
상고머리를 한 보통 체격의 남자였고,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는 건설 전략실장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지혁 일행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말만 이럴 뿐,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대표님 오셨다면서요? 어디 계세요?”
건설 전략실장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대표이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인사 나누시죠.”
“아~ 대표님이 바뀌셨어요?”
“······.”
“일반 기업에서는 대표직 맡는 게 좋지도 않을 것 같아요. 하하. 수시로 바뀌니 참.”
건설 전략실장은 이 말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혁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대표이사 오지혁입니다. 모가지 날아가기 전까지 잘 부탁드려요.”
지혁은 그의 너스레를 진한 농담으로 받아쳤고.
남자는 얼굴이 붉어져서 악수했다.
“반갑습니다. 원전 해외본부 해외사업개발팀장 박영환이라고 합니다.”
“네, 박 팀장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악수하며, 박 팀장은 놀랐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처음엔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선도물산 대표이사라는 점에 놀랐고.
두 번째는······.
“어?! 톰쿡!”
TV에서 봤던 사람이라 놀랐다.
“맞죠? 톰쿡 방문 때 선도전자 대표로 나가셨던 분.”
그때 TV 뉴스에 너무나 젊은 사람이 선도그룹을 대표하여 나온 걸 보고,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하. 맞습니다.”
지혁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와~ 반갑습니다. 하하.”
태도가 달라졌다.
***
“대표님, 이쪽으로 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네.”
박 팀장은 손수 게이트를 열어주었고.
이동하는 동안에 옆에 딱 붙어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제가 피치폰 오랜 유저거든요. 선도그룹 직원분들 앞에서 이런 얘기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선도전자는 다른 회산데요. 뭐.”
“그럼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제가 피치사 제품을 사랑해서, 하하. 톰쿡 내한을 관심 있게 지켜봤거든요. 그때 대표님 처음 뵈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비서실장님이셨죠?”
“네, 맞습니다.”
당시에 지혁의 깜작 등장에 여러 언론사에서 기획 기사가 쏟아졌었는데.
박 팀장은 기사를 읽은 모양이다.
“어쩌다가 선도물산 대표로 오신 겁니까?”
연예인 만난 듯 약간 흥분한 상태라, 질문에 거침이 없었다.
“글쎄요. 필요한 자리라서 오게 된 게 아닐까요?”
박 팀장은 멈칫했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우문현답이십니다. 그렇죠. 필요한 자리니 오시게 된 거겠죠.”
그의 과장된 제스쳐를 보며, 뒤따라 걷던 윤 실장은 생각했다.
‘팬클럽이야? 뭐야. 이게 우문현답이라고?’
지혁이 대답하기 싫어서 대충 얼버무린 건데, 박 팀장은 좋게 받아들였다.
“제 생각엔 그룹에서 선도물산을 키우려나 본데요?”
“······.”
“선도그룹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 아닙니까? 오 회장님 가족이시기도 하고.”
양 부문장은 미간 찌푸렸다.
‘아무리 관심 있어서라고 해도, 매너가 없네. 뭔 저런 소리까지 하냐.’
하지만 지혁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고.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제가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선도물산에서 비전을 보셨나 봐요.”
“그럼요. 비전이 있죠. 좋은 인재들도 많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전 원하는 건 꼭 하거든요.”
몇 마디 말 안 했지만.
박 팀장은 지혁에게서 카리스마를 느꼈다.
‘확실히 범상치 않네.’
어느덧 회의실에 도착했고.
그는 선도물산 일행들을 안내하며 말했다.
“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연락받은 거라 본부장님이 일정 조율이 완벽하게 안 돼서요. 제가 직원 불러서 차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볼일 보시면서 기다리시죠.”
건설 전략실장이 물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글쎄요.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박 팀장은 인사한 뒤, 회의실을 나갔다.
***
“꽤 우호적이네요.”
윤 실장이 말에, 건설 전략실장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저 양반이 원래 저렇게 친절한 스타일 아닌데, 대표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지혁은 피식 웃었다.
“글쎄요. 방금은 우호적이라기보다는 신기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박 팀장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국가전력 본사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무미건조한 분위기.
‘외부인을 봐도 동네 강아지 보듯 하잖아.’
어찌 보면 외부인도 손님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찮게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방문자가 많아서 그런 거겠지.’
지혁은 일행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저 신경 쓰시지 말고 일 보실 분은 일 보시고, 쉴 분은 쉬세요.”
그리고 솔선수범을 위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머리를 뒤로 젖힌 뒤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아, 잠깐 졸았네.’
지혁은 눈을 뜨자마자, 시계를 보았다.
‘30분 경과.’
양 부문장을 포함한 건설부문 직원들은 미팅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윤 실장은 딸과 영상통화 중이며.
장 실장은 자고 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잠깐 눈감았는데, 30분이나 지났을지는 몰랐다.
“대표님, 일어나셨습니까.”
양 부문장이 아는 척을 했다.
“네, 깜빡 졸았네요. 좀 쉬시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지금은 일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건설뿐만이 아니라 선도물산 전체에 영향이 갈만한 일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양 부문장뿐만이 아니라, 함께 온 건설 직원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혁은 초조해하는 직원들을 보니, 짜증이 올라왔다.
‘더는 못 기다리겠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지혁은 회의실을 나가서, 안내판을 따라 해외원전 본부장실로 향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절대로 이런 무리한 행동 안 했을 텐데.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는 직원들은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 오면 오게 만들면 되는 거지. 어차피 길게 얘기할 것도 없는데.’
복도를 지나고 지나.
‘해외원전본부장실.’
지혁은 문을 두드렸다.
***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데스크 앉은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해외원전본부장은 ‘부사장급’이며, 비서실을 따로 두고 있다.
“안녕하세요~”
지혁의 인사에, 여비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에 본부장님 계십니까?”
“부사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부사장님이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부사장이라고 부르나 보군.’
여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약속하고 오셨습니까?”
“질문에 답을 안 해주시는군요? 전 안에 계시냐고 물었는데.”
딱딱하게 말하는 여비서에게 지혁은 일부러 쏘듯이 한마디 했고.
여비서도 여러 사람 상대해봤기에, 호락호락한 인물인지 정도는 바로 알아본다.
여비서는 이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계십니다.”
“뭐야, 있었는데 안 온 거였어?”
“네?”
여비서는 지혁의 혼잣말에,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부사장님 좀 불러주시겠어요?”
“······.”
“저 서울에서 왔는데, 오래 기다렸거든요.”
“······.”
“무려 30분이나 기다렸어요.”
여비서는 눈을 끔뻑였다.
‘30분이 오래 기다린 거야?’
그녀는 다시 한번 지혁의 행색을 살폈다.
‘영업사원인가?’
지혁은 그녀를 마주 보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선도물산 대표이사가 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초면에 실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차하면 그냥 문 두드릴 것 같았다.
“선도물산? 대표이사님이요?”
지혁은 대답 대신 명함을 비서에게 건네며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대표직 맡으면 이런 게 안 좋구나.’
명함을 본 여비서는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자, 잠시만요.”
***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해외원전사업본부장 홍우석 부사장은 웃으며 사무실에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못 기다려서 죄송합니다.”
지혁은 넉살 좋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홍 부사장은 지혁과 악수했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사전에 약속된 일들을 먼저 처리해야 해서요.”
“네네. 지금 같이 가시죠.”
잠시 후.
지혁을 따라 들어온 홍 부사장을 보고, 선도물산 직원들은 눈의 휘둥그레졌다.
‘뭐야? 왜 같이 들어와?’
‘화장실 가신다며? 거기서 만나셨나?’
홍 부사장이 선도물산 직원들과 인사 나누던 중에, 국전 참모들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지혁은 시계를 본 후 말했다.
“바로 시작할까요?”
“네.”
국가전력 해외원전본부 대 선도물산.
서로 일렬로 마주 보고 앉았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국전 전략실장이 물음에, 건설 전략실장이 대답했다.
“요르단 원전 정비사업계약 건 때문에 왔습니다.”
“그건 유선상으로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고······.”
일 터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태도였고.
지혁이 끼어들었다.
“윤 실장님?”
“네. 대표님.”
“첩보 받은 거 말씀해 주세요.”
윤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도물산 전략실장 윤현성 이사라고 합니다.”
윤 실장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선도물산의 상사 부문은 해외에 광대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
“요르단 정비사업계약 건으로 각 상사 해외지사에 정보 수집을 요청했거든요. 그리고 유럽의 한 해외지사에서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는데.”
심상치 않은 얘기에, 국가전력 해외원전사업본부는 긴장했다.
“요르단 정부와 독일전력공사가 정비사업계약 체결 협의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