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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15화 (215/301)

215. 서쪽으로 (2)

비서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지혁은 혼자 동떨어져서 곳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장관실 문과 최대한 떨어진 곳에서, 긴장 가득한 얼굴로 기다렸다.

홍 부사장이 말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야?”

“······.”

“요르단에 도착하자마자 하섬 왕자를 만나러 오질 않나,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통역사 놔두고 바디랭귀지로 미팅 요청하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면서, 뭐가 그렇게 초조한지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생각할수록 진짜. 주계약자가 누군데? 국전 직원들 앞에서 너무 멋대로 아니야?”

선도물산 직원들은 그의 말소리가 들렸으나,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주계약자와 협력기업.

엄밀히 말하면 홍 부사장은 갑의 위치에 있는 최고 수장이다.

“이렇게 급해서야······ 쯧쯧.”

심지어 혀 차는 소리까지 냈고, 절묘하게 지혁에게까지는 들리지 않는 음량이었다.

“혹시 뭐 더 할 게 있으세요?”

선도물산 비서실장. 장 실장이 홍 부사장 앞에 섰다.

“네?”

“자꾸 급하다고 하시니까요. 뭐 더 할 게 있으신가 싶어서요.”

“······.”

홍 부사장은 앉은 채로, 앞에 선 장 실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는데.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의는 없어 보였다.

홍 부사장은 헛기침하고 말했다.

“흠! 뭐 더 할 게 있다는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고 나서, 장 실장의 질문에 뒤늦게 불쾌함을 느꼈는지,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오? 왜? 더 할 것도 없으면서 말만 많다고 지적하는 거요?”

“아닙니다~”

장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홍 부사장님이 급해 보이셔서요.”

이 말에 홍 부사장의 표정이 더 굳었다.

“지금 사안이 중요해서 급해 보이는 거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말씀하시는 거로 봤을 때는 그쪽인 것 같아서······.”

“······.”

“왜 급해 보이실까요. 저희가 뭐 빼놓은 게 있을까요?”

홍 부사장은 최대한 표정 변화를 숨겼으나, 동공의 움직임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가 옆의 국전 직원들 표정을 살피는 모습을 보며, 장 실장은 생각했다.

‘말고 행동이 달라. 어색하고 급해 보여.’

장 실장은 지혁이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선도전자에 이중 첩자로 오래 활동했었다.

남의 눈을 속이는 데 경험이 많기에, 그런 사람은 쉽게 알아봤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홍 부사장은 얼굴이 벌게지며 대꾸했다.

“저희가 빼놓은 게 있으면, 알려주십사하고 정중히 여쭙는 겁니다.”

“없어요! 없어! 있으면 진작 얘기했지.”

장 실장은 필요한 걸 확인했기에,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알겠습니다.”

장 실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홍 부사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그때, 비서가 아랍어로 큰 소리로 뭔가 말했고.

통역사가 그 말을 전했다.

“지금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국가전력과 선도물산 직원들도 장관실 문 앞으로 모였다.

통역사는 비서와 한참 얘기하더니.

“세 명만 들어갈 수 있답니다.”

홍 부사장이 먼저 말했다.

“그럼, 저와 우리 전략실장, 오 대표님 이렇게······.”

지혁은 그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저와 홍 부사장님, 양 부문장님 이렇게 셋이 들어갑니다.”

“네?”

홍 부사장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 원전 사업 주계약자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지금까지는 두고 봤는데······.”

지혁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통역사에게 말했다.

“세 명 선정 끝났으니까, 비서에게 말하세요.”

“네? 아, 네.”

홍 부사장은 눈에 힘을 주고 지혁을 불렀다.

“이봐요! 지금······ 쓰읍.”

지혁은 대꾸 없이 홍 부사장을 쏘아봤다.

사람 같지 않은 눈빛.

그의 동공 안에 홍 부사장의 피를 가라앉히는 묘한 일렁임이 있었다.

까불면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니, 사람 눈이 어떻게······.’

뭔지는 몰라도, 다르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끄럽다잖아요.”

“네?”

지혁의 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홍 부사장은 황당하여 바라봤는데.

지혁은 눈짓으로 비서를 가리켰다.

좀 전에 비서가 중얼거리듯 한마디 한 걸, 지혁이 알아들은 것이다.

통역사는 눈을 끔뻑이며 생각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멍한 얼굴의 홍 부사장을 향해 지혁은 한마디 하고 들어갔다.

“들어올 거면 조용히 따라 들어오세요. 부문장님, 들어갑시다.”

“네.”

지혁은 양 부문장과 함께 들어갔고.

홍 부사장은 멈칫하다가, 재빨리 지혁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장관실.

화려한 금색 수로 놓인 새하얀 커튼.

알라딘에 나오는 커다란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있고.

그 위에 금장 장식을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

그리고 가장 안쪽에.

붉은색 체크무늬의 코리아(전통남성두건)를 쓴 중년 남성이 커다란 집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Please, come in.”

그는 영어를 썼다.

장관 집무실은 상당히 넓었다.

문에서 책상 앞까지 열 걸음이 넘는 거리.

지혁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고, 그 뒤를 홍 부사장과 양 부문장이 따랐다.

가까이 올 때까지도 하섬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서 오셨다고 해서 미팅 요청을 수락하긴 했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첫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만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걸.

지혁 일행을 대하는 태도가 달갑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사카라 원전 건설한 선도물산의 대표 오지혁이라고 합니다.”

지혁은 이어서 홍 부사장과 양 부문장도 소개한 후, 정중하게 인사말을 전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섬 왕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예정에 없던 미팅이라 시간을 많이 드릴 수 없거든요.”

“네, 바로 용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지혁은 훅 들어갔다.

“사카라 원전 정비계약사업 우리와 독점계약으로 하시죠.”

.

.

.

하섬 왕자의 얼굴이 굳어졌고, 함께 온 홍 부사장과 양 부문장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아니 무슨 협상을 이런 식으로······.

잠시 후, 하섬 왕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네.”

“그건 다음에 입장이 정해지면 말씀드리겠다고 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러셨죠. 근데, 입장을 전달받으면 그걸로 끝난 거 아닙니까?”

지혁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하섬 왕자를 바라봤다.

“오판을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판?!”

지혁은 요르단에서 이미 의사결정 했고, 독일전력공사와 협의 중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일부러 아는 내색을 하지 않고 말했다.

“마치, 우리를 위해서라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서로를 위해서죠.”

“······.”

“감정적인 것 때문에 일 그르치면 손해지 않습니까.”

하섬 왕자는 또 한 번 표정이 굳었고, 양 부문장은 불안하여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말은 부드럽지만, 압박하고 있었다. 아랍의 왕자에게 그래선 안 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

지혁은 집무실에 들어온 후, 하섬 왕자의 이마 색부터 살폈었다.

주황과 검정의 중간색.

‘갈색’

고지식하고 앞만 보는 철벽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

신념이 강하고 올곧다는 장점이 있지만, 길을 잘못 들면 골로 간다.

다른 사람 말에 귀가 순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성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논리적인 직언에는 수긍할 줄 안다. 즉, 알아듣게 얘기하면 통한다는 거다.

지혁은 지금 자신이 본 색과 그에 따른 경험을 바탕으로 하섬 왕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우리는 최저가를 제시할 수 있고요. 기술지원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

“돈만 벌고 가겠다는 게 아니라, 요르단의 원전 사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르단인들이 한국에서 연수도 받을 수 있고요.”

그래도 하섬 왕자는 대꾸가 없었고.

지혁은 그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혹시 사카라 원전 설비에 불만이 있으십니까? 건설 공기도 지켰고, 1호기 상업 운전도 성공적으로 완료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시설에 대한 불만은 없소.”

‘갈색’의 사람이 괜히 철벽이라 여겨지는 게 아니다.

“당신네는 우릴 불쾌하게 했소.”

“······.”

“이 부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거로 생각하는데.”

하섬 왕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께서 솔직하게 말하니, 나 또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겠소.”

“······.”

“본인 갖기 싫은 걸, 좋은 거라며 파는 장사꾼에게 뭘 기대하며 비즈니스를 한단 말이오?”

이 말에 양 부문장은 고개를 숙였고, 홍 부사장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이유야 어쨌건 내가 필요한 거면 상관없는 거겠죠. 하지만, 적어도 소비자에게는 모르게 해야 하는 거 아니요? 팔면 끝입니까?”

지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할 얘기가 없어 보였다.

“······.”

얘기가 끝났다는 생각에 하섬 왕자는 시선을 돌렸는데.

ذهبت لتنتقم من والدها ، لكنها عادت حاملاً.

웬 아랍어에, 하섬 왕자는 지혁을 다시 바라봤다.

“뭐야? 뭐라 그런 거야?”

홍 부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중얼거렸고, 양 부문장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역사님, 방금 대표님이 뭐라 그런 거예요?”

양 부문장의 물음에, 통역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복수하러 갔다가, 임신해서 돌아왔다.”

홍 부사장은 거친 말이 절로 나왔다.

“이 사람, 미친 거 아니야?”

***

하섬 왕자는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보다가.

“하하하!”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지혁도 빙그레 따라 웃었고.

두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하, 외국인한테 이 말을 들을 줄은.”

그는 웃으며 지혁에게 물었다.

“뜻은 알고 있소?”

“뜻도 모르고 말씀드렸겠습니까.”

지혁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원수와 다투러 갔다가 결국엔 친구가 되어 돌아온 사람에게 하는 말이죠.”

“와~ 여기서 아랍 속담을 듣다니.”

‘그 세계’에서 요르단 동료가 자주 했던 속담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적과 싸울 때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복수하러 갔다가 임신이 되어 돌아오는 여자처럼 말이다.

물론, ‘그 세계’에서 그런 일은 없었지만.

“지난 일은 잊으시고, 앞을 보시죠.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혁에게 생각지 못한 아랍 속담을 들은 후부터 하섬 왕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실······ 정비사업계약의 단독수주는 내 테이블 위에 없었소.”

“······.”

“대표님 만나서 몇 마디 나누다 보니까.”

“······.”

“대표님은 믿을 만한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아요.”

아랍 문화권에서는 ‘친구’라는 개념이 매우 크다.

그에게서 ‘친구’라는 칭호를 들은 것 자체가 상당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적극적으로 접근한 전략이 통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겠소?”

“······.”

“테이블에 없던 걸 결정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지혁은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듣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하섬 왕자는 이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지혁에게 다가와 악수했다.

“네, 그럼 내일 연락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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