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다음에는 말로 안함
15시간 비행, 하섬 왕자와의 미팅.
장시간의 강행군을 마친 일행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다.
오로지 지혁만 쌩쌩했다.
‘설마 또 어딜 가는 건 아니겠지.’
‘체력이 미친 거 아니야?’
‘아······ 빡세.’
국전뿐만이 아니라, 선도물산 직원들도 불안한 눈으로 지혁의 입만 보고 있었는데.
“이제 호텔로 갑시다. 쉬어야죠.”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르단 특유의 무채색 거리를 지나.
중심지에 있는 하야트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 크지는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깔끔한 로비에 금색 장식들로 꽤 고급스러웠다.
지혁은 국전 직원들에게 말했다.
“요르단에서 가장 고급 호텔로 잡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편히 쉬셨으면 합니다.”
국전 일행들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특히 홍 부사장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기업이랑 다니면 이런 게 좋아. 돈 쓸 줄 아네.’
국전에서는 출장 중에 묵을 수 없는 최고급 호텔이다. 이건 선도물산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장 숙박 경비 기준에 넘는 곳인데.’
‘대표님과 다녀서 이런 곳에 묵게 해주시는 건가.’
좋은 호텔에서 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강행군의 피로가 녹는 기분이었다.
지혁은 홍 부사장을 향해 물었다.
“로얄 스위트로 예약하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룸이 꽉 차서 바로 그아래 등급으로 했거든요?”
홍 부사장은 손사랫짓하며 말했다.
“아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쉬셔야 내일 마무리 잘하죠.”
지혁은 국전과 선도물산 직원을 향해 말했다.
“비용은 신경 쓰지 마시고, 룸서비스 마음껏 이용하세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요.”
“네!”
“호텔 내의 레스토랑이나, 바(Bar)도 이용하셔도 됩니다. 발생하는 비용은 체크아웃할 때 처리한다고 하시고요. 다 대표이사실에서 알아서 할 테니.”
직원들은 웃으며 크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쉴 때는 화끈하게 쉽니다. 단!”
단서를 달려고 하자, 직원들은 긴장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호텔 밖으로는 나가지 마세요.”
“······.”
“이것만 지켜주세요. 아시겠죠?”
이때, 지혁은 홍 부사장을 바라봤다.
홍 부사장은 그의 눈빛에서 ‘경고 메시지’를 읽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기분 탓인가.’
기분이 찜찜해지려는데, 지혁이 한 번 더 말했다.
“대답 안 하신 분 계신 거 같은데, 다시 한번 묻습니다. 아시겠죠?”
“네!”
홍 부사장도 이번엔 마지못해 대답했다.
***
홍 부사장은 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계속 고민했다.
‘여기서 전화해도 될까.’
시급을 다투는 일인데도, 한 가지가 신경 쓰여서 행동하지 못했다.
‘사람 같지 않은 눈빛.’
장관실에 들어가기 전에 마주했던 지혁의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다.
마침 지혁은 바로 옆방에 묵는다.
‘도청 장치라도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설마 그런 일을 벌일까 싶기도 했지만.
의심하기 시작하니, 하나도 안심되는 게 없었다.
‘일개 국전 부사장에게, 국가 대사급이 묵을 수 있는 룸을 배정해 준 것도 그렇고.’
홍 부사장이 묵는 룸은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거실과 침실이 구분된 고급스러운 객실이다.
한 번 더 고민했고, 어느덧 자정도 지났다.
‘아무래도 나가야겠어.’
전화는 해야 하는데, 호텔 내부에서 하기가 너무 꺼림칙했다.
삐거덕.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 좌우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했다.
조심스럽게 뒤꿈치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도착.
이제 괜찮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내려놓고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어이쿠!”
엘리베이터 문 바로 앞에 장 실장이 있었다.
“엇,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홍 부사장은 놀라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장 실장도 놀란 듯 보였지만,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1층에서 사람 마주치는 게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닌데.”
홍 부사장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뒤 말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장 실장은 웃으며 물었다.
“부사장님은 어쩐 일이신데요?”
“네? 아, 저야. 뭐······ 그냥······ 바람 쐬러?”
“이 시간에요?”
“이 시간이 어때서요?”
홍 부사장은 당황하여 자신이 지금 무슨 말 하는지도 몰랐다.
장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저한테 물으셨던 건 부사장님이신데, 이 시간이 어때서냐고 말씀하시는 건······.”
본인 말을 본인이 부정하는 어색한 대답.
홍 부사장은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어색하면 의심받아.’
이미 아주 어색했다.
홍 부사장이 말도 안 되게 얼버무렸다.
“그러게요. 그게 그렇게 된 거네요.”
“네?”
“어쨌든 수고하시고, 전 이만 바람 쐬러.”
장 실장이 말렸다.
“부사장님,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객실로 돌아가시는 게······.”
그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으나.
“······.”
홍 부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호텔 정문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문밖으로 나서는 그를 보며, 장 실장은 중얼거렸다.
“안 나가는 게 좋을 텐데······.”
***
노란 가로등과 무채색 거리.
무채색에 노란 불빛이 입히니, 모든 거리가 노란색으로 변했다.
거리가 석양을 받는 듯, 늦은 오후처럼 밝게 보였다.
홍 부사장은 다급한 마음에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걸음을 빨리했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접어들었을 때쯤, 멈추었다.
헉헉.
“어휴, 힘들어.”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호텔에서 20분 정도를 걸어왔다.
이쯤 되니, 안심되었다.
“다 된 밥에 재 뿌릴 뻔했네. 웬 또라이 때문에.”
홍 부사장은 투덜거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독일전력공사’
양심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들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된다.
‘앞으로 돈 들어갈 일투성이야.’
은퇴 후 연금을 받겠지만, 외벌이로 가족을 영위하느라 모아 놓은 돈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아무리 국전 부사장이어도 은퇴 후 얻을 수 있는 일자리 봉급은 지금 받는 것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딱 한 번만.’
회사 생활 하면서 비리를 저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을 위해, 딱 한 번만 양심을 잊기로 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딸칵.
수신음이 들리자, 홍 부사장은 영어로 말했다.
“독일전력공사죠? 홍우석 부사장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수화기 밖에서 들렸다.
“돈 벌기 참 어렵죠?”
홍 부사장은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끄고 주변을 살폈다.
‘뭐지? 환청을 들은 건가?’
노란 불빛 아래의 황량한 주택가.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세요?”
다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위로 올렸더니.
한 주택 옥상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어?!’
홍 부사장은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바라봤는데.
옥상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선도물산 대표이사 오지혁이었다.
휙- 휙-
아랫집 테라스를 밟은 후, 벽면 옆 가스 라인을 타고.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왔다.
홍 부사장은 눈 앞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꿈인가 싶었다.
‘이거 강철부대에서 봤던 거 같은데.’
특수부대원이 테러 진압할 때 봤던 건데, 어찌 보면 그보다도 더 능숙해 보였다.
탁! 탁!
지혁은 순식간에 손을 털며 홍 부사장 앞에 섰다.
“여기서 뭐 하시냐고요.”
홍 부사장은 놀라서 소변을 지릴 지경이었다.
외국이라서, 밤이라서, 나타난 사람이 지혁이라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
지혁은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내 말 안 들려요?”
낮에 봤던 지혁과 달랐다.
표정도 그렇지만, 특히 말투가.
“홍우석 부사장. 지금 뭐 하냐고 묻잖아요.”
“뭐, 뭐하긴요. 바람 쐬러.”
“씨발, 개수작 부리지 말고. 통화하는 거 다 들었는데.”
“······.”
“독일전력공사에 이 시간에 왜 전화할까?”
홍 부사장은 바싹 쫄았다.
앞에 선 사람이 사기업 대표이사인지, 특수부대원인지, 깡패인지 헷갈렸다.
“분명 당신한테 여러 번 경고 했어요. 모른다고 말하진 않겠지?”
산업부 차관을 만난 후에 뒤통수 치지 말라고 대놓고 경고했으며, 오늘 호텔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고, 나가기 직전엔 장 실장이 한 번 더 말렸다.
“돈 필요해요?”
“······.”
“얼마면 되는데?”
“······.”
“줄 테니까. 얘기해 봐요.”
지혁은 손으로 홍 부사장의 어깨를 툭툭 밀치며 말했다.
“얘기해 보라고요. 얼마면 되는데요?”
“······.”
“당신 돈 버는 수법이 이런 거잖아? 받아주겠다니까? 난 내 일만 잘되면 돼.”
홍 부사장은 입이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한 2억 받기로 했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얘기하라고요. 준다니까?”
“······.”
“왜? 내가 대단한 대가를 바랄까 봐?”
지혁은 홍 부사장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돼요. 당신한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쉽죠?”
“죄송합니다······.”
“얼마냐고 묻는데, 왜 엉뚱한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어서 말하라고요.”
“죄송합니다······.”
홍 부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30년 전, 군 복무 시절 선임에게 혼난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참나. 한국 사람 돈은 받기 싫은 건가?”
“······.”
“이왕 돈 먹고 일 만들 거면, 한국 기업 도와줘요. 충분히 챙겨줄 테니까.”
“······.”
“얼마냐니까요?”
홍 부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혁은 이제 더 압박하지 않고, 그의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두 남자는 한참을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그와 동시에.
홍 부사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에 대해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혁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할 뿐 대답하진 않았다.
온종일 홍 부사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기에, 첩보가 아직 흘리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지혁이 좀 누그러진 듯 보이자, 홍 부사장은 부연 설명을 하려 했다.
“제가······ 아이들이 아직 학생이고, 가족을 영위하기에 상황이······.”
“그딴 얘기는 궁금하지 않고요.”
지혁은 순식간에 그의 말을 잘랐고.
홍 부사장은 식겁해서 바로 입을 닫았다.
‘사정없는 무덤이 어딨나.’
남의 속사정에 관심 두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가족 얘기로 이유 대는 건 특히 더 싫어했다.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넘어갑니다. 다만.”
“······.”
“접촉했다는 정황을 갖고 있고.”
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좀 전에 독일전력공사와 통화 시도하는 걸 녹음했다는 의미였다.
“중요한 일 앞두고, 잡다한 문제로 일 그르치기 싫습니다.”
홍 부사장의 비리 문제가 밝혀지면, 지금 진행하려는 사업에 영향이 갈 수 있었다.
“내일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내가 사인하라면 사인하고, 따라오라면 따라오는 겁니다.”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홍 부사장에게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홍 부사장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