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중동의 바람 (1)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 후 로비에 모두 모였는데.
홍 부사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눈을 깔고, 지혁이 있는 쪽은 보지도 않으려 했다.
일행들은 그런 홍 부사장을 보며, 어제 잠을 설쳤나 싶었고.
속 사정을 아는 지혁과 장 실장만이 슬그머니 웃을 뿐이었다.
지혁이 말했다.
“자, 오늘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
일행들은 일제히 지혁에게 집중했다.
이제 국전 직원들도 지혁을 자신들 회사의 대표처럼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제 끝났고요. 이제 하섬 왕자 연락을 기다리면 되는데.”
“······.”
“같은 회사도 아니고, 굳이 함께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지혁은 국전 직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필요한 시간 보내다가, 이따가 공항에서 만나면 될 것 같습니다.”
지혁은 홍 부사장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홍 부사장님?”
어제 지혁이 그에게 경고했었다. 요르단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하라는 대로 하라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죠.”
매운맛을 봤으니,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장 실장에게 말했다.
“장 실장은 국전과 함께 다니도록 하세요. 이분들 불편한 거 있으면 조치해주시고요. 대표이사실 법인카드 가져가세요.”
“네, 대표님.”
따로 다녀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홍 부사장 감시.’
어제 겁을 주긴 했지만, 끝까지 확실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럼 수고하시고~ 이따가 뵙겠습니다.”
선도물산 일행은 요르단 암만 지사로 향했다.
하야트호텔에서 약 20분.
주택가 2층으로 된 무채색 건물에 도착했다.
지사원들이 정문 앞에 도열해 있었는데.
덜컹.
지혁이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우와~!
-오지혁 대표님 환영합니다!
-암만지사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직원 및 현지 직원 수십 명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갑작스럽게 잡은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환영을 받으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표님 인기 좋은데요?”
옆의 윤 실장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랍 스타일?”
“하하. 한국에서도 인기 좋거든요?”
지혁은 가장 앞에 선 전동근 지사장에게 다가가 악수했다.
“또 뵙네요.”
“대표님,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번거로울 거 알면서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와볼까 싶어서 일정 잡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게 다 대표님 건데요.”
선도물산의 수장이니, 전 세계의 상사 네트워크도 지혁의 수중에 있는 게 맞다.
지사장은 직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인사 나누시죠. 대표님 오신다는 소식 듣고, 직원들이 목 빼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
지혁은 일렬로 선 직원들과 차례대로 악수하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오지혁입니다. 타지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표님! 사내 방송으로 잘 봤습니다! 영광입니다!
-전 TV로 봤습니다! 9시 뉴스에 나오신 분을 뵙다니.
-정말······ 멋지십니다.
지혁은 젊은 대표지만, 한국 직원들은 그가 누군지 잘 알기에 깍듯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현지 직원들은 달랐다.
한국 직원들보다는 확실히 개방적이며, 격의 없었다.
- 아 유 한류스타?
- 룩스 그레이트.
특히 외모에 대한 찬사가 많았다.
지사에 있는 한국 직원들은 외모까지 현지화되어 있어서, 잘 몰랐는데.
지혁을 보니, 진짜 한국 사람 만난 것 같았다.
현지 직원들이 지혁과 악수한 손을 풀 생각을 안 하자, 지사장이 말렸다.
“이봐, 그만 좀 주물럭거려. 하하. 대표님 들어가시죠.”
***
지혁 일행은 지사장을 따라 암만지사 전체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이후, 대회의실에서 지사장의 현황 설명이 이어졌다.
“요르단은 석유가 안 나는 중동국가입니다. 칼륨과 인산염 등 일부 광물 자원 외에 에너지 자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원이 없는 국가에 상사 지사가 설립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사장은 곧바로 설명해 주었다.
“무역과 서비스업이 요르단 산업의 주인데, 그래서 저희도 그쪽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르단 남단에 아카바라는 항구가 있는데요.”
“······.”
“요르단뿐만이 아니라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출창구로 사용되고 중요 요충지입니다. 저희는 이곳에 4개의 포워더를 설립하여 운영 중입니다.”
“자리를 쉽게 내주던가요?”
지혁은 상품기획 시절에 무역을 조금 해봐서 안다. 타국의 무역 업체 사업 허가는 쉽지 않다.
지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선도물산 요르단 지사가 올해로 20년째입니다. 시간은 많은 부분을 해결해 줍니다. 하하.”
지혁은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지사장은 신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아카바 항구에서 포워더 업체를 운영하는 아시아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자부심 가질 만하네요. 그리고 서비스업은 뭡니까?”
지사의 주요 사업으로 무역과 서비스업을 들었었다.
“요르단은 중동국가임에도 기후가 상당히 좋습니다. 중동의 관광지로 불릴 정도로 날씨가 덥지 않고 좋아서, 중동 부호들 대상으로 별장 사업을 벌이고 하고 있습니다.”
“······.”
“또한 기독교 유적이 많아서 성지순례 여행객들이 많거든요.”
윤 실장이 웃으며 말했다.
“와~ 관광업도 하세요?”
“돈 되는 건 다합니다. 상사에 제한이 어딨습니까. 하하.”
윤 실장은 인정한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지혁은 생각했다.
‘이런 게 진짜지.’
‘그 세계’의 야전에서 굴렀었기에, 현장의 사업 얘기를 들으니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중에 특히 관심이 가는 게 있었는데.
“지사장님.”
“네, 대표님.”
“아카바 항구가 여기서 얼마나 걸립니까?”
윤 실장이 불안한 눈길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차로 4시간 정도 걸립니다.”
왕복으로 8시간.
윤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스케줄을 고려했을 때, 갈 수 없는 일정이다.
“윤 실장님.”
“네.”
“비행기 스케줄 내일로 연장할 수 있을까요?”
“네?!”
윤 실장은 숨이 턱 막혔다.
‘여기에 하루 더 있자고?’
“대표님······ 제발요.”
“스케줄 물어봤는데, 왜 제발이란 말이 나오죠?”
“아······ 대표님.”
‘단둘이 있었다면, 짜증이라도 냈을 텐데.’
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윤 실장은 사정 조로 말했다.
“국전 직원들도 함께 왔고요. 내일 선도물산 일정도 생각하셔야죠.”
지혁은 내일 특별한 일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별일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윤 실장은 결사적으로 막았다.
“무리야. 무리. 안 된다고요~”
옆에서 지켜보던 지사장은 웃으며 지혁에게 말했다.
“하하. 아카바 항구는 가보셔도 딱히 볼 것 없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린 거로 충분합니다.”
“아, 그래요?”
“네, 그냥 항구인데요. 뭐. 다음에 여유 있게 오시게 되면 그때 보시죠.”
아마 다음은 없을 것이다. 세계에 지사가 수십 개가 있는데, 주요 지사도 아닌 요르단에 또 오겠는가.
“그럽시다. 그럼 얘기나 좀 더 나누죠.”
***
전동근 지사장, 윤 실장, 지혁.
이렇게 세 사람은 지사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공교롭게도 제가 상사 현직 직원분 만난 건 지사장님이 처음입니다.”
지혁의 말에 지사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네, 임원분들만 만나봤거든요.”
“네······ 뭐, 대표님이시니까.”
지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패션과 상사가 합쳐진 것에 대해서 불만은 없으세요?”
지혁은 오래 뜸 들이지 않는다.
물어보고 싶었던 걸 곧바로 던졌다
지사장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가, 이내 표정을 풀고 말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근데 뭐······ 생뚱맞은 분야와 합쳐진 건 아니니까요. 성격이 비슷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지사만 해도 몇 년 전에 의류 소싱을 했었거든요. 요르단 스웨터가 품질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만약 상사부문에서 불만이 생긴다면······ 어떤 걸까요?”
“글쎄요. 대표님께서 이미 예상하고 계실 것 같은데.”
“······.”
“대표님 패션 출신이시잖아요.”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들었다.
“패션 출신 대표님이 오셨는데, 패션과 합쳐진다······ 좀 묻히는 느낌이 있죠. 상사맨들은 자부심이 대단하거든요? 현장에서 전투적으로 일하여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서요.”
윤 실장과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초창기에 선도물산을 일으킨 이들은 상사맨들이다.
“대표님이 공정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어서 잠자코 있지만. 만약, 홀대하는 느낌이 든다면 불협화음이 생길 수 있을 겁니다.”
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지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두고 보면 알겠죠.”
기대와 경고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보냈고.
윤 실장은 살짝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으나.
지혁은 웃고 있었다.
‘지혜롭네.’
전동근 지사장이 마음에 들었다.
***
“한국이 그립지는 않으세요? 요르단에 너무 오래 계셨던 거 같은데.”
한국 근무 의향을 돌려서 물어본 건데, 말이 끝나자마자 지사장은 손사랫짓했다.
“아휴~ 말도 마십시오. 전 여기가 좋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이 한창일 때, 요르단도 위험하다고 하여 국내에 6개월 정도 들어가 있던 적이 있었다.
“전 속 시끄러운 거 싫어해서요.”
현장의 어려움 못지않게 본사에도 어려움이 있다.
지사 근무는 바쁠 땐 잠도 못 잘 정도로 정신없지만, 한가할 때는 한없이 한가하다. 즉, 내 일만 잘 신경 쓰면 된다.
본사는 여러 부서가 모여 있기에 내 현업과 관련 없는 일로 바쁠 때도 많으며,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며 일해야 한다. 즉,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부르면 와야겠죠.”
지혁의 단호한 말에, 지사장은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회사에 소속된 사람인데요.”
지혁은 싱긋 웃었고, 지사장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쭉~ 여기서 근무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하하.”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많이 뺏었네요.”
지사장이 말했다.
“여기 계시다가 저녁까지 드시고 공항으로 가시죠.”
“요르단까지 왔는데, 일만 하고 가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시내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럴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하. 네, 그럼 통역사 붙여드리겠습니다.”
지혁은 지사원들과 인사한 후, 차에 탔다.
오후 3시.
핸드폰을 켰는데.
하섬 왕자에게 온 연락은 없었고.
‘부재중 전화 3통. 장 실장.’
지사장과 미팅에 집중하느라, 전화 왔는지 몰랐다.
지혁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대표님! 장 실장입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윤 실장도 그렇고요.]
조용한 차 속이라 윤 실장은 통화 소리를 들었으며,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미팅 중이라 몰랐네요. 무슨 일인데요?”
[장관실에서 한전 측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장관실 연락이면······ 하섬 왕자다.
“무슨 일로요?”
[무슨 일이겠습니까. 정비사업계약 건 때문이죠!]
‘왜? 국전에게? 아······ 주계약자니까.’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흡- 휴우-
결과를 듣기 전,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어떤 결과 든,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네, 말씀하세요.”
지혁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곧이어······.
스피커 폰도 아닌데, 큰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산업부로 들어오시랍니다! 계약서 사인하자고요!]
불끈.
지혁은 주먹을 꽉 쥐었고.
옆에 앉은 윤 실장이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대표님~ 한 번 쳐주세요~ 하하.”
찰싹!
두 남자는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