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중동의 바람 (2)
오후 4시.
산업부 정문을 통과했다.
하섬 왕자의 지시가 있었는지, 앞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국가전력 직원들과 장 실장은 먼저 도착하여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덜컹.
지혁이 차에서 내리자, 장 실장이 환히 웃으며 다가왔다.
“대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요. 장 실장님도요.”
지혁과 장 실장은 악수했다.
지금 하는 악수는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하는 의미였다.
현관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홍 부사장이 보였고.
지혁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부사장님.”
지혁의 부름에 홍 부사장은 얼굴이 굳어져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
홍 부사장은 자신을 향해 내민 지혁의 손을 바라봤다.
‘악수를 하자는 건데······.’
“이 사업의 주체자는 국가전력 아닙니까. 가장 큰 축하를 받으셔야죠.”
그는 뻘쭘한 얼굴로 지혁의 손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모두 대표님 덕분입니다.”
짝짝짝.
국가전력과 선도물산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목표했던 출장의 성과를 확실하게 달성했으며, 이제 계약서 서명만 남았다.
“잠시 후에 서명 잘해주세요.”
“······.”
“떨지 마시고요. 잘 쓰시나 지켜볼 겁니다.”
지혁의 장난스러운 말에 주변에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하.
-대표님, 너무 재밌으셔.
-아무렴, 떨려서 사인도 못 하실까 봐요.
“하하······.”
홍 부사장도 따라 웃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내가 사인하라면 사인하고, 따라오라면 따라오는 겁니다.’
어젯밤, 지혁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았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서 들어가시죠.”
“아, 네.”
장관실.
하섬 왕자는 양팔을 벌리고 지혁 일행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어제는 장관실 안에 들어왔을 때, 본척만척했었다.
이번엔 세 명이 아니라 전 인원이 다 들어왔는데, 그 수에 맞게끔 의자도 배치되어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하섬 왕자는 정중하게 손님맞이를 했다.
지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현명한 결정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판하지 않으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 오판이요?!”
하섬 왕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국과 계약 안 하면 오판인가요? 하하. 대표님 말씀하시는 게 참 재밌어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윤 실장이 준비한 계약서를 꺼내었고.
하섬 왕자는 지혁을 향해 은근한 눈빛으로 물었다.
“약속은 지키실 거죠?”
어제 지혁이 약속한 ‘최저가 제시’와 ‘기술이전’에 대한 걸 말하는 거였다.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약속은 지킵니다. 제가 그것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인데요.”
“네? 하하.”
‘그 세계’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신용 덕분에 비즈니스 세계에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
‘20년 장기 계약’
지혁은 총 계약단가를 메모지에 적어서 하섬 왕자에게 보여줬다.
“저희가 제시해 드릴 가격입니다.”
“흠······.”
“독일보다 높습니까?”
“······?!”
하섬 왕자는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다.
“최저가를 제시해 드린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독일이 얼마를 제시했는지는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
“그보다 높다면 낮출게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하섬 왕자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알고 계셨소?”
“티 안 났었죠?”
지혁은 이 말로 물음에 대한 긍정을 대신했다.
하섬 왕자는 웃으며 말했다.
“전혀 몰랐네요. 알고 계셨구나.”
지혁은 양손을 들고 말했다.
“계약하기로 결심하신 뒤 말씀드린 거니까요. 혹시 불쾌한 건 아니시죠?”
하섬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보력 또한 경쟁력이지 않습니까. 불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서둘러서 들어오신 게 이유가 있었군요.”
지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섬 왕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씀드리죠. 하하. 어제 저녁에 독일전력공사와 만나기로 했었습니다. 사실 계약 조율도 다 끝난 상황이었거든요.”
내색은 안 했지만, 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찰나의 차이였다.
독일전력공사와 계약 체결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만 알았지, 정확히 시점은 몰랐었다.
‘홍 부사장 얘기 듣고, 산업부 방문을 하루만 늦췄다면······.’
살짝 홍 부사장을 돌아봤는데, 그는 지혁의 눈을 피했다.
“선도물산 대표님과 얘기 나눈 후에, 계약을 미뤘습니다. 다음날 머리를 식히고 천천히 생각해보니, 대표님 말씀이 일리가 있더군요.”
“······.”
“사카라 원전 건설 주체자와 계약하는 게 유지보수에 더 좋겠죠.”
“맞습니다. 그게 상식적이죠.”
“네, 그리고 좋은 조건도 제시해 주셨고요.”
하섬 왕자는 지혁이 건넨 메모지를 접어서, 앞주머니에 넣었다.
“가격을 받고 나니, 옳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네요. 하하.”
제시한 가격을 승낙한다는 의미였다.
하섬 왕자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다행이네요. 가격 때문에 줄다리기할 일은 없어서요.”
“하하. 네.”
하섬 왕자는 펜을 들고 시원하게 말했다.
“그럼 바로 서명할까요?”
“네, 홍 부사장님?”
지혁의 부름에 홍 부사장은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네, 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서명하셔야죠.”
주계약자는 국전이므로 그가 대표로 서명해야 한다.
“아, 네. 알겠습니다.”
사사삭.
홍 부사장은 곧바로 서명한 후, 하섬 왕자와 계약서 교체 후 한 번 더 서명했다.
이로써, 요르단 사카라 원전 정비사업계약이 단독수주로 체결 완료되었다.
짝짝짝.
한국인과 요르단인, 모두 일제히 박수쳤다.
홍 부사장과 하섬 왕자는 계약서 주고받는 포즈로 사진 촬영을 했다.
“대표님!”
하섬 왕자는 지혁을 불렀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대표님도 함께 사진 찍읍시다.”
하섬 왕자는 이 일의 진짜 주최자와 사진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홍 부사장과는 계약서만 주고받았을 뿐,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하섬 왕자의 눈에 홍 부사장은 그냥 바지사장이다.
“아, 네. 좋습니다.”
지혁은 환하게 웃으며 하섬 왕자와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다.
그는 지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엔 감정 상하게 안 하실 거죠?”
“믿으세요. 신용으로 살아남은 사람이라니까요.”
“하하!”
***
선도본관. 커뮤니케이션팀.
홍 팀장은 선도전자 은하수폰 신제품 개시로 정신이 없었다.
언론자료 만들고, 질의에 답하고.
그룹의 역량을 쏟아붓는 사업이기에, 매년 은하수폰이 출시될 때마다 언론 대응 때문에 홍역을 치른다.
“팀장님!”
한 언론사의 부정적인 기획 기사에 대한 대응 기사 준비 중이었는데.
“팀장님!”
“아오, 이 시간엔 방해하지 말라니까.”
홍 팀장은 집중이 잘 되는 오전에 언론사로 배포할 기사를 작성한다.
한참 집중하던 중에 방해받으니, 짜증이 났다.
“중요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오전부터 짜증을 들으니, 팀원은 입이 나왔지만.
그래도 보고해야 했다.
“뭔데? 어서 얘기해.”
홍 팀장은 여전히 팀원을 향해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선도물산 홍보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선도물산?’
홍 팀장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선도물산이면 오지혁 대표가 있는 곳이니까.
이제야 팀원을 바라봤다.
“물산 홍보실이 왜?”
“오지혁 대표님 일로 연락이 왔는데요.”
꿀꺽.
홍 팀장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지혁의 일이라면 일단 긴장부터 된다.
“사고를······ 치신 것 같습니다.”
“사······고?”
홍 팀장은 팀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는데.
말은 ‘사고’라는데, 표정은 싱글벙글하였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봐.”
홍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팀원은 격양된 얼굴로 설명했다.
“선도물산 건설 부문에서 원전 수출사업 진행한 거 아시죠?”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당연히 기억하지.”
“이번에 해당 원전 사업 관련해서, 정비사업계약 수주 협상으로 난항을 겪었는데······.”
꿀꺽.
“우리 선도물산이 단독수주 계약에 성공했답니다.”
“······.”
“그것도 무려 20년으로요. 단일 계약으로 3조 원이 넘는······.”
“대박······.”
홍 팀장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회사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일에도 집중한다.
매출 규모도 규모지만.
‘해외 원전 사업 단독수주라니······.’
이건 상징성이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원전이다.
현재 정부 기조와도 맞기에, 타이밍마저 끝내줬다.
정부에서 원전 사업 재개에 방점을 두고 있는데, 선도물산이 그 스타트를 끊게 된 것이다.
촤라락-
선도물산 주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빠, 빨리 언론부터 뿌려! 아니, 이럴 게 아니야.”
홍 팀장은 마음이 급해서 말을 더듬었다.
“모두 주목!”
팀원들을 일제히 집중시킨 후 말했다.
“지금 하던 일 멈추고, 선도물산 해외 원전 수주 건 자료 배포에 집중한다. 서둘러! 사고 제대로 터졌어!”
기분 좋은 사고가 터졌다.
홍 팀장은 흥에 겨워 입이 귀에 걸렸다.
***
성북동. 오 회장댁.
최근 오 회장은 회사 출근을 잘 하지 않는다.
웬만한 일은 집에서 처리한다.
“비서실장.”
“네, 회장님.”
그리고 항상 그의 옆에는 한 전무가 있다.
“선도카드 매출이 요즘 이상하던데. 그것 좀 알아봐.”
“네, 미래기획실 경영진단팀에 바로 문의하겠습니다.”
원래 비서실장은 선도본관에 대기하면서, 회장 부재중일 때 대리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한 전무는 웬만해서는 오 회장과 떨어지지 않았다.
오 회장이 ‘윤리경영위’ 사건 이후로 만나는 사람의 범위를 극도로 줄인 이유도 있었으나.
지혁의 지침 때문이다.
‘회장님 잘 모셔야 합니다. 신경 많이 쓰세요.’
자신을 이곳에 보낸 사람이 누군지 한 전무는 잊지 않았다.
윙-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고.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그래.”
한 전무는 고개를 돌리고 전화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이요?”
‘장관’이라는 말에 오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 회장님을요.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한 전무는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받다가.
“아······ 아~ 그렇군요. 하하. 어째 우리보다 소식이 더 빠르십니다. 아~ 국전이 같이 가서요. 네네.”
어느새 표정이 환해져 있었다.
오 회장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저번엔 차관이더니, 이번엔 장관이야?’
정부에서 연락이 오는 경우는 잘 없다.
이번에도 지혁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불안하여 엿듣고 있는데.
“회장님.”
한 전무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오 회장을 불렀다.
아직 전화는 끊지 않았다.
“산업부 장관 비서실에서 전화 온 건데요. 장관님께서 통화하고 싶으시답니다.”
“설마, 또 오지혁이야?”
“네, 맞습니다.”
한 전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는데.
오 회장은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슨 일인데?”
“직접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흠······.”
오 회장은 헛기침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산업부 장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으하하.]
산업부 장관은 오 회장의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크게 웃었고.
[회장님!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