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챙겨야 할 사람 (1)
“안녕하십니까!”
검은색 세단에서 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현관 앞에서 대기 중이던 비서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인사했다.
“잘 지냈어요?”
지혁은 비서들 어깨를 한 명씩 두드리며 인사했다.
대표로 취임한 뒤, 처음 일주일간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었다.
전철 안에서 혹은 강남역에서 직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직원들의 신망을 얻고 있어도, 대표이사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지혁이 있으면 전철 안에 빈자리가 생겨도 앉지 않거나, 강남역에 내려서 선도물산을 향해 걸어갈 때면 직원들이 주변에서 떨어져 가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난 전철이 편한데.’
직원들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본 후부터, 대표이사 지원 차량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비서실 직원들에 둘러싸여 지혁은 선도물산 현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선도물산 파이팅!
지혁을 가장 먼저 목격한 어느 직원이 소리쳤고.
짝짝짝.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로비에 있는 직원들은 일제히 지혁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대표님 화이팅입니다!
-선도물산이 좋은 일로 기사 나오는 게 얼마 만이야?
-어휴, 자랑스러워.
-오랜만에 어깨 좀 폈다. 진짜!
최근 2년간 선도물산에 관한 기사는 매출 감소에 대한 것뿐이었다.
직원들이 기대했던 대로, 지혁은 달랐다.
부임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대표가 직접 이런 대형 사고를 치다니.
지혁은 어색한 미소로 직원들 환호에 화답하며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근데······ 썩 달갑지는 않아.’
회사에 좋은 일이고, 직원들의 환호를 받고 있지만 지혁은 뭔가 아쉬웠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요르단 원전 정비사업계약’ 건은 지혁이 멱살 잡고 캐리한 거나 다름없다.
그는 지금 회사 대표이사지, 실무자가 아니다.
실무자들을 움직여서 일을 성사해야 지속성이 있다. 대표이사가 개인기로 성과 만들어 내는 건 한계가 있다.
선도물산은 크고, 지혁의 몸은 하나니까.
‘이번만이야. 다음부터는 웬만해선 전면에 나서지 말자.’
사안이 급했으며, 회사 사기를 북돋우려고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혼자 캐리해 봐야, 더 높이 갈 곳도 없고, 더 받을 월급도 없다.
-선도물산 직원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선도물산 파이팅!
게이트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직원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나서지 말자. 나서지 말자.’
다시 한번 되뇌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실현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지혁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
***
선도물산 중역 회의.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뉴스로 소식 접했습니다! 와~ 이런 일이.”
“오늘 선도물산 주가 보셨습니까? 하하.”
부문장과 본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혁은 큰 축하를 받았다.
“대표님~ 이거 받으세요.”
상품본부장 정민경 상무는 커다란 꽃다발을 준비해왔다.
“하아······ 이거 참.”
난감했다. 준비한 꽃다발을 안 받을 수도 없고.
머뭇거리는 지혁을 향해 상품본부장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어서 받으세요. 제가 아니라, 상품본부 직원들 전체가 한마음으로 준비한 거예요.”
다른 중역들은 심기가 불편했다.
‘정 상무가 저런 걸 다하네.’
‘그 뻣뻣한 사람이.’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서 더 심기가 불편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거 하지 마세요.”
“호호.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짝짝짝.
지혁이 꽃다발을 받자, 임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건설의 양은철 부문장도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쳤는데.
지혁은 그를 보기 민망했다.
건설 부문의 성과로 대표이사가 축하받고 있으니······.
지혁은 결심했다.
‘아랫사람 띄워 주는 게 별거야?’
“저 혼자 한 게 아니라, 함께 한 일입니다. 혼자 박수받으려니 민망하네요.”
-그래도 대표님 역할이 컸죠!
-맞습니다!
-원래 아랫사람이 잘하는 게 다 대표님 복입니다! 하하.
지혁은 주변 반응을 무시하고 밀고 나갔다.
“특히 양 부문장님 공이 큽니다.”
“네?”
양 부문장은 당황했다.
물론 그가 건설 부문장으로 이 계약에 준비한 부분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일은 지혁이 한 게 맞다.
“다 함께 한 일이지만, 최고 기여자는 단연 양 부문장님이죠.”
지혁은 무대뽀로 밀어붙였다.
“양 부문장님 안 계셨으면 실패했어요. 혼자 다 하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함께 출장 갔던 윤 실장과 장 실장도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뭘 잘 못 드셨나?’
‘양 부문장님한테 뭐 책잡혔어?’
양 부문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쳤다.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와······ 여기에 겸양까지.”
지혁은 계속 밀어붙였다.
양 부문장은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 양반이 나 놀리는 건가? 건설 부문장이 한 거 없다고?’
헷갈렸으나, 놀린다고 생각하기엔 지혁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다들 그렇게 아시고. ‘정비사업계약 건’은 양 부문장님의 공이 크다고 널리 널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상품본부장을 바라봤다.
“꽃다발은 제가 대표로 받은 거로 할게요.”
공을 넘긴다기보다는, 억지로 쑤셔 넣는 분위기였고.
중역들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쉬는 시간.
양 부문장은 지혁에게 다가와서,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대표님 아까 왜 그러셨어요? 제가 한 거에 비해,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면······.”
“어차피 제 사람 아닙니까?”
“네?”
“양 부문장님 공이 제 공이죠. 제가 독식하면 하나의 공이 되지만, 양 부문장의 공으로 돌리면. 저와 양 부문장 두 사람의 공이 되는 겁니다.”
“······.”
말이 안 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제가 다 했다고 하면 다 한 겁니다.”
“······.”
“나중에 포상받게 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으시면 됩니다. 이게 다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요. 아시겠죠?”
양 부문장은 멍하니 지혁을 바라보다가.
“하하하.”
크게 웃었다.
‘신기하네. 이런 리더도 있구나.’
재밌고 고마웠다.
양 부문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쉬는 시간 이후.
부문별 업무보고가 이어졌다.
중역 회의는 격주로 진행되는데, 2주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건설 부문은 한동안 지혁이 함께 있었으니 모르는 내용이 없었고.
리조트 부문은 아직 세부 경영전략 수립 단계라 큰 변화는 없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패션상사의 유 부문장은 고개를 숙였다.
“이런 사고가 터질 줄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유 부문장과 함께 상품본부장도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KC(국가통합인증) 부적합’
국가기술표준원에서 분기마다 시판품(시장에서 일반에게 판매되는 물품) 조사를 실시하며.
문제 되는 제품은 회사에 고지하여, 소명 기회를 준 뒤.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린다.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담당자와 대표이사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번에 선도물산의 패션 제품 중 하나가 시판품 조사 부적합 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언론 배포 단계까지 간 건 아니죠?”
지혁은 패션에 있었기에 이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절차대로 검사해도, KC는 안심할 수가 없다. 수십만 장의 옷을 다 검사할 수는 없으며, 랜덤 검사이기 때문에.
유 부문장이 대답했다.
“네. 기술표준원 간담회가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업부문 중역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이 좋은 분위기에.’
‘아주, 찬물을 끼얹네.’
‘어휴.’
유 부문장과 상품본부장의 고개는 더 숙어졌다.
“브랜드가 어딥니까?”
지혁의 물음에 상품본부장이 대답했다.
“스타덕입니다.”
“스타덕?!”
지혁의 눈이 커졌다.
KC는 생산팀에서 챙겨야 하는 업무며, 스타덕은 생산 1팀이 담당한다.
그리고 생산 1팀의 팀장은······.
‘황성준 차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황 팀장 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혁은 곧바로 회의를 해산했다.
“오늘 중역 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유 부문장님과 상품본부장님 제외하고 모두 나가주세요.”
사람들이 모두 나간 뒤, 지혁은 상품본부장에게 말했다.
“담당자 들어오라고 하세요.”
***
똑똑.
황 팀장이 문을 두드린 후,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유 부문장, 상품본부장, 윤 실장, 장 실장. 지혁.
대표이사실 안의 다섯 사람을 본 후, 황 팀장은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혁이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고.
그제야 황 팀장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
길 잃은 동공.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써클.
푸석한 머리.
얼굴에 좌절이 가득했다.
마음고생한 게, 한눈에 보였다.
“대략 얘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대표가 담당자를 불러서 묻는 게 이상했지만, 지혁과 황 팀장 사이를 모르지 않기에 다들 잠자코 있었다.
“죄송합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황 팀장은 ‘죄송하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정신이 지금······.’
황 팀장은 정신이 나가 보였고.
지혁은 질문을 달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당 제품 생산담당자가 누굽니까?”
“담당자는 잘못 없습니다. 제가 결재했고, 제 책임입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제 책임입니다.”
“······.”
지혁은 황 팀장이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속상했다.
잘잘못을 떠나, 그냥 속이 쓰렸다.
“절차대로 진행은 다 했습니까?”
“네. 제품 통관 전에 원부자재 검사했고, 완제품 검사, 세탁 테스트 다 했습니다. 해당 성적서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도물산 측에서 할 건 다 했다는 거다.
“부적합 항목은 뭡니까?”
“pH(수소이온지수)가 좀 높게 나왔습니다.”
“아······.”
pH는 물빨래 한번 하면 내려가는 지수다.
정말 재수 없게 걸린 사고.
“다른 제품은 이상 없고요?”
“랜덤으로 매장제품 10장 검사해봤는데, 이상 없습니다.”
어쩌다 문제 있는 제품이 하나 걸린 건데.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법이 그런 거니까.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황 팀장은 인사 후 나갔고.
상품본부장이 지혁에게 말했다.
“제품 자체에는 문제없는 것 같으니, 간담회 때 최대한 어필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그리고 생산팀 징계는 어떻게 할까요? 감봉 정도는······.”
지혁은 곧바로 말했다.
“경고로 끝냅시다.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회사 이미지에 위해를 가한 일인데······.”
지혁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전 할 말 다 했습니다. 더 하실 얘기 있습니까?”
“아, 아니요.”
“네, 그럼 이만 나가주시죠.”
모두 다 나간 뒤.
지혁은 앉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황 팀장을 다시 호출했다.
덜컹.
그는 대표이사실에 지혁 혼자 있는 걸 보고, 고개가 더 숙어졌다.
“죄송합니다.”
“이제 그 말씀은 그만하시고, 고개 드세요.”
지혁은 일어나 황 팀장에게 다가갔다.
“경고장 갈 거예요.”
“······.”
“이 정도는 어쩔 수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힘내라며,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고.
황 팀장은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