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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29화 (229/301)

229. 미안해할 필요 없어

수행기사가 대기 중이었으나, 지혁은 회사 차 대신 택시를 탔다.

늦은 시간의 오 회장의 호출.

조용히 와달라는 말은 없었으나, 회사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성북동 00번지로 가주세요.”

지혁은 택시 기사에게 정확한 주소를 알려준 후, 머리를 뒤에 기대었다.

‘회장님이 갑자기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오 부회장을 만난 게 어제였는데, 그들이 나눈 대화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룹의 미래가 바뀔 만한 중대한 역사가 어제 이뤄진 것이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그것도 늦은 시간의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후유······.”

지혁은 차창 밖의 도시 밤 풍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 부회장을 어떻게 처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지혁은 필요한 일을 할 때는 피도 눈물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형제를 끝장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지혁은 핸드폰을 들어 수아에게 전화했다.

“자기야, 난데.”

[뭐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맨날 이렇게 늦을 거야?]

밤 10시가 넘었다.

수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핀잔부터 했다.

[회사 대표가 맨날 그렇게 야근하면, 직원들이 싫어하는 거 몰라? 자기는 어떻게 된 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야근이 아주 습관이야!]

지혁은 한바탕 쏟아내는 잔소리를 들은 뒤.

“나 이제 얘기해도 돼?”

[얘기해. 더 늦겠다는 소리만 해봐. 아주.]

지혁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얘기해야 했다.

“큰아버지 댁 가는 길이야.”

일부러 ‘회장님’ 대신 ‘큰아버지’라고 호칭했다.

[큰아버지? 왜?]

수아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오 회장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며, 그의 호출은 심상치 않은 일을 예고한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글쎄. 모르겠어. 갑자기 부르신 거라. 가봐야 알 거 같아.”

[회사 일이야?]

“그렇겠지. 뵐 때면 항상 회사일 얘기만 했으니까.”

[······.]

수아의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더이상 왜 늦게 오냐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

지혁이 자세한 얘기를 해준 적은 없어도, 최근에 큰아버지 댁과 좋지 않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다.

“알았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있다 봐.]

뚝.

전화를 끊은 뒤, 지혁은 생각했다.

‘그래, 조심해야지.’

큰아버지 댁은 가족이면서도, 지금은 최대의 적이기도 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경우의 수를 그리며, 안 주머니의 과도를 만지작거렸다.

***

성북동에 도착.

딩동!

“안녕하세요.”

큰어머니가 현관문을 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

큰어머니는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큰아버지가 부르셔서요.”

“알고 있다.”

“······.”

큰어머니는 대꾸 없이 안으로 들어갔고, 지혁은 잠자코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의 분위기를 살폈는데.

‘좀 다른데?’

평소 까랑까랑하고 새침한 모습을 보이는 큰어머니가,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오 부회장 일이 큰어머니한테까지 전해졌나.’

“큰아버지 서재에 계신다.”

큰어머니는 말을 마친 뒤,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갔고.

똑똑.

지혁은 서재로 가서 문을 두들겼다.

“회장님, 오지혁입니다.”

[들어와라.]

확-

문을 열자마자, 담배 냄새가 훅 다가왔다.

방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오 회장은 손에 담배를 든 채로 말했다.

“거기 앉아라.”

“······.”

‘담배는 안 피우셨었는데.’

지혁은 오 회장이 담배 피는 모습은커녕, 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밥은 먹었니?”

오 회장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네, 회사에서 먹었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출출하지? 먹을 것 좀 내오라고 할까?”

사실 출출했지만, 지혁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오 회장은 곧바로 전화했고.

잠시 후.

일하는 아줌마가 다과와 술을 가져왔다.

지혁은 서재에 들어오면서부터 오 회장의 기색을 살폈는데.

명절에 만났을 때와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그때는 지혁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도 않았었다.

“한 잔 받아라.”

오 회장은 손수 술을 따라줬고.

“네.”

지혁은 황급히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오 회장과 독대하여 술 마셔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혁은 잠자코 오 회장과 술잔을 기울였다.

‘분명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을 텐데.’

이 시간에 괜히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술잔만 기울일 뿐 오 회장의 입은 무겁게 닫혀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지혁 또한 정적 속에 술만 마시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어제 진양이 왔었다.”

“······.”

오 회장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이 한마디로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역시, 이것 때문에 부른 거였구나. 이번에도 도움을 청한 건가.’

위험에 처했을 때면, 오 회장의 도움을 받는 오 부회장이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든든한 우산이 있어서 좋으시겠어.’

한편으로는 그런 아버지가 있는 게 부럽기도 했다.

지혁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하며, 심지어 보호해줘야 할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은 있으나, 오 회장이 오 부회장에게 하는 것처럼 보호해주는 건 아니다.

“진양이가 먼저 얘기한 건 아니다.”

“······.”

“끝까지 말 안 하려는데, 아비 된 처지에 걱정되어서 말이야.”

어젯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던 오 부회장이 떠올랐고, 다시 가슴이 쓰렸다.

심장에 대못을 박고 망치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혁이 더 미웠지만.

오 부회장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려 있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우 너희 둘이 있었던 일을 알게 되었는데.”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건 자기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다.

필요한 일을 정당하게 했다.

측은지심은 느낄 수 있지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후유······.

오 회장은 지혁의 눈을 보고 짧게 한숨 쉬었다.

‘오지혁답다.’

혹시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살폈는데.

지혁의 눈빛을 읽고, 완전히 내려놓았다.

결국, 길은 하나뿐이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네가 뭔가 하기 전에 알게 되어서.”

백기를 드는 수밖에.

“네가 이겼다.”

“······.”

“이제 그만하자.”

***

지혁은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

오 회장이 하려는 게 ‘백기 투항’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만하자, 지혁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슨 꿍꿍이일까.’

오 회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 말고는······.’

그 이유 말고는 없다.

‘혹시 알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 세계’에서 지혁이 소속된 에이원 캠프에는 이런 철칙이 있었다.

‘투항한 적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지혁 또한 맞서는 적에게는 사정없지만, 투항한 적은 건드리지 않았다.

어차피 끝난 게임.

오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더 큰 상처가 생기기 전에, 봉합하려는 거였다.

지금 오 회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합은 ‘투항’이다. 물론, 조건 없는 투항은 아닐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 테니, 진양이는 내버려 둬라.”

“······.”

‘진양 형님을 그대로 두라고?’

지혁은 이번 일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오 부회장은 절대로 그냥 두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보다 맷집도 세고, 자생력도 강했다. 확실하게 싹을 잘라야 한다.

‘어설프게 넘어가서는 안 돼.”

지혁은 오 회장의 제안을 곧바로 거절하려 했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진양 형님은 그룹을 위기에 빠뜨리려······.”

“네가 총수가 되는 것도 고려하마.”

“네?!”

지혁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뭘 고려하신다고요?”

“총수.”

오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그룹의 총수가 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지분을 가진 오 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런 그에게서 ‘총수’라는 제안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다.

얼떨떨해하는 지혁을 향해 회장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다.”

오 회장 또한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기에, 지금은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강제로 인사권을 발휘하는 것도 고민했으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선도그룹에서 지혁의 영향력은 엄청나기에, 강제로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시간을 들여서 중역들의 동의와 여론을 끌어볼 생각도 해봤으나, 그 또한 지혁이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지혁을 회유하고, 가족을 지키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니, 부탁이다.”

“······.”

“진양이 내버려 둬라.”

***

정신이 나가버린 듯 초점 잃은 눈동자.

얼굴에 흙빛이 가득하고.

몸 전체에서 풍기던 술 냄새.

‘진양아······.’

오 회장은 어제 자신 앞에서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까지 했던 오 부회장을 떠올렸다.

자존감이 강하고 제멋대로여서 그렇지, 망나니 아들은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고, 인화력은 좋지 않으나 업무 성과는 잘 내었다.

그런 오 부회장이······ 어제 무너질 조짐을 보였었다.

오 회장은 사람이 무너지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많은 시련을 견뎌내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일단 한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렵다.

5년 전 오 부회장은 이혼했을 때도 그런 조짐을 보였으나, 겨우 버텨냈었다.

처자식, 친구도 없는 그에게 회사는 전부나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지혁은 오 회장에게 물었다.

“저에게 그 자리 약속하셔도 됩니까?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오 회장은 살며시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난 네게 애사심이 있다는 건 확신한다. 얼마 전 요르단 원전 건도 그렇고.”

“······.”

“게다가 네가 남은 아니지 않냐?”

후유-

오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인생이란 게 원래가 뜻대로 되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을 때는 받아들여야지······.”

“······.”

“너도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내 심정 알게 될 거다.”

지혁은 묘한 얼굴로 오 회장을 바라봤다.

‘하긴······ 애도 없는 내가 부성애를 이해하긴 어렵지. 앞으로도······’

아이를 가질 계획은 없기에, 이런 오 회장의 심정은 나중에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지혁은 오 회장에게 물었다.

“그럼, 진양 형님을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지혁은 완강한 태도를 버렸다.

총수 자리를 걸었다는 것은 키를 지혁에게 넘긴다는 거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정리할 수 있다면, 굳이 오 부회장을 내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 부회장의 멘탈붕괴와 오 회장의 부성애가 발동되어 좋은 판이 깔린 상황.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해. 기회는 왔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조건부 투항일 거로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걸 내주는 대신,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겠다는 것.

“우선 난 진양이를 회사에······.”

“회장님, 잠시만요.”

무슨 얘기를 할지 예상이 되었다.

지혁은 오 회장의 말을 막았다.

‘회장님 조건, 거절하기 싫다.’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뭐?”

“제 조건을요.”

“······.”

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제가 말씀드리는 조건을 제외하고,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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