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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30화 (230/301)

230. 밀실 협의 (1)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물은 먹잇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려면 오 회장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어선 안 된다.

조건을 듣고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말릴 수도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그래, 알았다.”

오 회장은 술잔을 비운 뒤, 등받이에서 등을 떼었다.

“얘기해 봐라.”

“첫 번째 조건입니다.”

“첫 번째? 한 개가 아닌가 보지?”

“물론이죠.”

지혁은 오 회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힘주어 말했다.

“진양 형님은 선도그룹의 경영권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합니다.”

“······.”

“경영권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실무자급에서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오 회장은 당황하여 말했다.

“그럼 진양이는 무슨 일을 하라는 거냐? 한창나이인데?”

“고문, 연구위원 등 명예직이 있잖아요.”

그 자리는 연차 높은 임원들이 은퇴하기 직전에 가는 곳이다.

오 회장의 얼굴이 붉어지며, 언성이 올라갔다.

“너무한 거 아니냐? 진양이가 업무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오십도 안 된 사람을······.”

지혁은 미동도 없었다.

오 회장이 이렇게 나올까 봐, 먼저 얘기한 거였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협의를 드리는 게 아닙니다.”

강제성을 띤 조건.

특히, 첫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 부회장을 회사에서 내쫓고 싶지만, 그건 오 회장이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 아니라 관둔 것이다.

아무리 지혁이 지금 유리한 고지에 있어도, 선도그룹은 곧 오 회장이다. 그의 협의가 필요하다.

물론, 이 정도 조건도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판을 엎을 생각이다.

오 회장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제원이나 세계그룹에 진양이를 보낼 수도 없고······.’

오 부회장은 국민에게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선도그룹 회장의 장남이 다른 그룹 경영자로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제원이나 세계에서도 오 부회장을 받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또한 진양 형님은 매주 활동 보고를 저에게 해야 하고요. 형님의 수행 비서는 제가 정합니다.”

“······.”

“활동 보고는 부담가질 거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 확인하려는 목적이니까요.”

오 회장은 질린 얼굴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

“그게 최선이냐?”

오 회장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네, 저에겐 많이 최선입니다.”

지혁의 입장에선 많이 양보한 거다.

이 정도 장치도 없이, 오 부회장을 선도그룹 안에 둘 수는 없었다.

“다음 조건은?”

“대답해 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게 협의되지 않으면 다른 조건은 의미가 없거든요.”

오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진양아······.’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 부회장은 개인적인 일로 회사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고, 지혁은 그 증거를 모두 갖고 있을 게 뻔했다.

‘뜻대로 안 되면 무슨 짓이든 할 놈이야.’

“알겠다. 그렇게 하마.”

지혁은 오 회장의 어두운 얼굴을 보는 게 씁쓸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네, 그럼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

“권력 이양을 2년 안에 끝내주십시오.”

“2년?”

오 회장은 생각보다 시간을 길게 줘서 의아했다.

‘뭘 그렇게 길게?’

“2년 동안 철저하고 촘촘하게 권력 이양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룹 총수의 자리는 급하게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거든요.”

“······.”

“더군다나 전 친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발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있을 텐데, 이를 최소화하고 싶습니다.”

오 회장은 지혁을 권력에 눈이 먼 교활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거로 봤을 때는······.

‘회사를 먼저 생각한다.’

권력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2년은 너무 긴데?”

“왜요. 빨리 넘겨주고 싶으세요?”

“아니, 그건 아니고.”

흠!

오 회장은 헛기침하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말하는 거야. 권력 이양하는데, 2년씩이나 필요 없어. 대통령 인수위도 2~3개월 만에 하는데.”

“그건 5년 하고 끝이지만, 이건 쭉 가는 거지 않습니까.”

“······.”

“회장님께서도 오래 해오셨고요. 거의 30년 하시지 않으셨어요?”

오 회장은 선대 회장으로부터 자리를 물려받은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한 사람이 30년을 했던 그룹 총수의 자리를 물려받는 일이다.

지혁은 급하지 않게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래도, 1년이면 충분해. 준비 과정에 들어가면 어차피 사람들이 알게 될 텐데, 과정이 너무 긴 것도 좋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게 끼어들 수 있어.”

오 회장은 마음먹은 이상, 지혁에게 자리 넘기는 걸 망설이지 않으려 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건 이어진 얘기인데요.”

“그래.”

“선도물산 대표직을 2년은 유지하고 싶거든요.”

“······왜?”

오 회장은 지혁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을 증명하러 간 거 아니었나?’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2년이나 있겠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미 벌려놓은 일들이 있고, 직원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

“계획한 일들, 어느 정도까지는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권력 이양을 2년으로 말씀드렸는데, 그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지혁은 직원들의 기대 가득한 눈빛을 기억하고 있으며, 선도물산에 대한 애정이 있다.

오 부회장의 자살골 덕분에, 운 좋게도 목표를 빠르게 달성하였지만.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대표직을 내려놓고 싶지는 않았다.

“알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오 회장은 지혁과 대화를 할수록 헷갈렸다.

‘나쁜 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권력 이양 목표는 2년으로 하고, 상황에 따라 앞당기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오 회장은 그에게 물었다.

“또 있냐?”

“네, 있습니다. 근데, 그 전에 한 가지 질문드릴 게 있는데.”

“얘기해라.”

지혁은 오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

“진원 형님이 총수 되길 바라세요?”

꿀꺽.

‘진원이까지?’

오 회장의 무릎이 미세하게 떨렸다.

***

‘하는 김에 깡그리 다 정리하겠다는 거야?’

물론, 오 회장은 오진원이 총수가 되길 바란다.

이왕이면 친아들이 자리를 이어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거니까.

아무런 의도 없이, 오진원을 선도전자 자리로 발령낸 게 아니다.

“회장님? 대답해 주십시오.”

오 회장은 턱만 미세하게 떨릴 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오 부회장의 처신에 대한 조건을 들었다. 오진원마저 그처럼 손발을 묶어 놓으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말씀 못 하시겠어요?”

지혁은 오 회장의 심정이 어떨지 모르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는 게 불편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게 낫겠네요.”

“······.”

“진원 형님이 총수가 되기를 원하신다면요······.”

오 회장은 지금 지혁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하다고 생각했다.

꿀꺽.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오 회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득해주십시오.”

오 회장은 재빨리 지혁의 말을 받았다.

“알았다. 내가 잘 얘기해서 그런 생각이 있다면, 빨리 접으라고 할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지혁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총수가 되라고 설득하시라고요.”

“······뭐?!”

오 회장은 지혁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세 번째 조건입니다. 진원 형님이 총수가 되길 원하신다면 설득해주십시오.”

“······.”

“전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총수를 하라고 해도······.”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저와 최 부회장이 함께 압박해도 어찌나 완강하던지. 순하게 생기셔서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센지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결국 제가 나서기로 했지만······ 지금이라도 진원 형님이 마음이 바뀐다면, 그리고 회장님께서 진양 형님을 확실히 포기하신다면.”

오 회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지만.

분명,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양보해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요. 진원 형님이 했으면 좋겠어요. 꼭 좀 설득해주십시오.”

오 회장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도대체가······.’

***

아무리 생각해도 지혁이 방금 한 말이 잘 믿기지 않았다.

“진심이냐?”

“네.”

“난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최근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물불 안 가리고 총수가 되기 위해 맹렬히 돌진했었다.

“진양이한테는 왜 그런 거냐?”

지혁은 얼마 전에 황 팀장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준이 형과 예비고사를 치른 거였네.’

고민할 필요 없이, 준비된 답변이 나왔다.

“저의 선도그룹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

“회장님과 진양 형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아닌 건 아니거든요.”

“······.”

“이 말에 동의 못 하십니까?”

지혁의 말이 틀리지 않으므로, 오 회장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저와 진원 형님, 최 부회장의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진양 형님을 막는 것.”

“······.”

“선도그룹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같은 목표를 가졌던 겁니다.”

“아······.”

오 회장은 가슴이 아팠다.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었다면······.’

오 회장 또한 오 부회장에게 후계를 넘기는 일에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고려하지 않았다.

무조건 오 부회장만을 생각했다.

오 부회장의 성향이 바뀌거나 그를 도울 사람을 기대했지. 누군가 오 부회장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오 회장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바뀔 수 없는 일.

후계자로서 장남인 오진양은 그런 의미였다.

‘결국, 진양이를 망치는 길이었구나.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었다면······.’

오 부회장을 보호하기 위해 쏘아 올린 화살은 오 부회장에게 가서 꽂히고 말았다.

‘뒤늦은 후회야.’

지혁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큰 후회가 들었다.

이것이 오 회장의 값지불이었다.

오종원 이사와 오진원을 밀어냈던 것, 장남의 앞길을 막는 것으로 값지불을 한 것이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그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자, 지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음에 얘기할까요. 시간이 늦기도 했고.”

밤 11시를 지나, 시침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다. 괜찮다.”

씀- 후유

오 회장은 심호흡한 후 말했다.

“진원이와는 내가 얘기해 보마. 근데, 그 녀석이 워낙 말을 안 들어.”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보다, 오 회장의 표정과 목소리가 좀 풀렸다.

지혁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얼굴만 순둥순둥하지, 고집 장난 아니에요.”

오 회장은 살짝 미소 띤 후 물었다.

“그래, 또 있냐?”

“네, 마지막이에요.”

지혁은 진심을 담아 오 회장을 바라봤다.

“이건······ 조건이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깝습니다.”

“······.”

“어려울 거라는 건 아는데요.”

지혁은 쉽게 입이 안 떨어지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회장님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

“저한테 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어떤 조건을 말할 때보다도,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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