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밀실 협의 (2)
지혁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잘해주고 싶었다.
가장 아끼던 막냇동생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에게 마음의 빚도 있었기에.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지내자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자식을 건드렸지.’
그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지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넘을 수는 없었다.
오 회장 또한 그와 적대하여 지내는 상황이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또한 잘 지내고 싶다.”
“······.”
“하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아니, 어쩌면 영영 어려울지도 몰라.”
지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과욕인가. 얻는 게 있으니, 잃는 것도 있겠지.’
“쉽게 긍정적인 대답은 못 하겠구나.”
“······.”
“이건 조건이 아니라, 부탁이라고 했지?”
“네.”
지혁은 압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될 이야기가 아니므로.
“이 부탁이 진심이라는 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필요하다고 여긴 일을 했을 뿐, 진양 형님에게 감정은 없습니다.”
오 회장은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알겠다.”
“네.”
지혁은 술잔을 비운 뒤, 말했다.
“제 얘기는 끝났습니다. 회장님 하시고 싶은 얘기 해보시죠.”
“······.”
오 회장은 좀 전에 지혁이 말한 조건들을 떠올렸다.
지혁에게 조건과 상충하는 게 있었다. 특히, 오 부회장의 거취에 대해서.
그에게 총수 자리를 내주는 대신, 오 부회장의 대표이사 자리는 유지해 달라고 하려 했었다.
그러나, 지혁은 첫 번째 조건으로 그건 불가하다는 걸 내걸었고, 오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떠봤다.
“네가 말한 조건과 상충하는 게 있는데, 얘기해 봐도 되냐?”
“안 됩니다.”
조금의 텀도 두지 않고, 지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얘기도 안 돼?”
“네, 안 꺼내시는 게 좋습니다. 들어보나 마나 부정적인 답변을 드릴 텐데, 분위기만 안 좋아집니다.”
“······.”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말한 조건들은 선행되어야 하며, 협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혁은 철벽을 쳤고.
오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구나.’
후유······.
그래도, 오 부회장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하나만 묻자. 너 진양이의 명예까지 뺏지는 않을 거지?”
“오늘 얘기 나눈 대로 이행하기로 하면, 시판품 조사 건은 없던 일이 됩니다.”
지혁은 여러 설명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말했다.
‘그래, 재산을 뺏겠다는 것도 아닌데.’
오 부회장이 회사생활 말고 다른 가치를 찾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오 회장은 미련을 버리고, 지혁에게 첫 번째 조건을 말했다.
“우선,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보장해다오.”
지혁의 눈썹이 꿈틀대자, 오 회장은 덧붙여 설명했다.
“진양이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
“선도그룹은 네 할아버지인 오성근 명예회장님께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버텨내고 세운 기업이다.”
“······.”
“이 그룹은 우리 연일 오 씨의 소유여야만 해. 절대로 다른 세력으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으면 안 된다.”
오 부회장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지혁은 표정을 풀었다.
“외부인은 항상 경계하여, 선을 넘도록 하면 안 된다. 비서실에 있을 때 보니, 네가 자기 사람을 잘 챙기더구나.”
오 회장은 지혁에게 일만 시키던 게 아니다. 모든 걸 관찰하고 있었다.
“사람을 믿고 권한을 주는 건 좋지만, 경영권에 개입할 만한 가능성은 절대로 주면 안 돼.”
지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럼······ 최 부회장은 뭡니까?”
“······.”
“그룹에서 그분의 영향력은 굉장한데, 연일 오 씨는 아니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셨겠지만······ 후계 자리에도 개입하려 했고요.”
오 회장은 피식 웃고는 물었다.
“나는 못 했던 걸 왜 강요하냐고 묻는 거냐?”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이에 관한 생각이 확고해 보이시는데, 어떤 장치를 하셨는지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오 회장이 말했다.
“최 부회장······ 신임하지. 내 오랜 동료이기도 하고, 그룹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다.”
“······.”
“하지만 남이야. 가족이 아니라고. 최 부회장은 그걸 잘 알고 있으며, 스스로 선을 지켜왔다. 후계자에 대한 개입은 했으나, 연일 오 씨 외의 다른 사람을 내세우진 않았다.”
오 회장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서 지금까지 회사에 있는 거야.”
“그 말은······.”
“오씨일가의 경영권에 욕심을 부리거나, 흔들려는 사람은 내 가까이에 오래 못 있는다.”
“······.”
“내 사람들을 그렇게 관리해왔어. 아무리 아쉬운 소리를 들어도 말이야.”
지혁은 이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확고하구나.’
가문을 지키려는 그의 목적이 아주 확실해 보였다.
“너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로 생각한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선도그룹을 ‘연일 오 씨’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
지혁에게는 큰 의미는 없었으나, 거부감 가질 일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다음은······.”
“또 있으십니까?”
“넌 네 가지나 말해놓고, 그런 소리를 하냐?”
“말씀하십시오.”
오 회장은 지혁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방금 한 얘기와 이어지는 건데.”
“네.”
오 회장의 두 번째 조건은 의외였다.
“너의 후계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져라.”
“······.”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마라.”
지혁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보호하라면서, 후계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라니······.’
오 회장이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은 형제가 얼마 안 되잖냐.”
“아······.”
이제야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자녀들과 조카들. 모두를 후보자로 보라는 거야.”
“······.”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악착같이 장남의 후계를 고수했던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어쩌다 보니, 너로부터 시작이 되는데.”
“진원 형님이 했으면 한다니까요.”
“그래, 만약 그 애가 한다고 해도 장남은 아니지 않냐.”
“······.”
“어쨌든, 시작이야.”
오 회장은 한숨을 쉬며 허공을 바라봤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
“물론, 선택자가 지혜롭다는 전제조건 하에 말이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려운 거 아니네요.”
“쉽게 대답하지 마라. 너도 자식을 갖게 될 텐데. 부성애라는 건 생각보다 강하다.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지혁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기에, 이 얘기엔 별 감응이 없었다.
“큰아버지와의 약속. 꼭 지켜줬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그래.”
“누나들이 낳은 자식도 후계자 선택지에 포함되는 건가요?”
지혁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물었는데.
오 회장은 정색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는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결혼하면 남의 집 사람이지. 뻔한 소리를 하고 있어. 성이 같냐?”
지혁은 생각지도 못하게 큰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다.
***
“흠! 알겠습니다······ 그럼, 형님들 자녀들까지만 선택지에 넣는 거로.”
오 회장은 다짐받으려는 듯 물었다.
“혹시, 진양이의 자녀에 대해서 차별을 두거나 하진 않을 거지?”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안 합니다. 만약 그 애가 복수를 꿈꾸지만 않는다면요.”
지혁은 오 회장에게 물었다.
“더 있으신가요?”
“마지막이다.”
“······.”
선도그룹과 오너일가의 미래를 협의하는 자리. 아무래도 서로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네가 총수가 되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면 말이야.”
“새로운 사업이라면······.”
“기존에 하던 걸 확장하거나, 사업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야.”
“······.”
“선도그룹이 지금까지 안 했던, 완전히 새로운 사업을 말하는 거다. 예를 들어, 항공우주, 미디어 같은······.”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건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
오 회장은 지혁의 눈치를 살짝 본 후 말했다.
“나와 상의해다오.”
“······.”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는 상의를 해줬으면 좋겠어.”
“왜죠?”
“선도그룹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게 내 방식이야.”
아직 지혁이 미덥지 않아서라고 말하진 않았다.
해보지 않은 영역에 진출하는 건 리스크가 매우 크다.
지혁은 매사에 용의주도하지만,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무모해 보일 정도로 과감하다.
그런 과감성에 있어서는 오 부회장의 성향과 비슷할 정도인데.
지혁을 비서실장일 때 옆에서 지켜보면서, 오 회장은 그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회장님이 안 계시면요?”
“······.”
“그때는 제 맘대로 해도 되죠?”
오 회장의 연세를 염두에 두고 물은 질문이었는데.
“이건 너의 마지막 질문과 비슷해. 부탁하는 건데······.”
“······.”
“내가 없을 때는 진원이와 상의했으면 좋겠다.”
“진양이 형님 말고 진원 형님과······.”
지혁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상의만 할 뿐, 결정은 제가 합니다.”
“그야, 물론이지.”
“알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지혁은 시계를 봤다.
자정이 넘었다.
늦은 시간까지 꽤 긴 대화를 나눴다.
“얼추 다 얘기한 거 같은데.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진원 형님에 관한 얘기는 진심이거든요.”
“······.”
“제가 먼저 만나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요즘 저한테 오해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얘기하고 나면 아마 고민을 할 텐데, 그때 회장님께서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오 회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참······ 용의주도해.’
“그래, 네가 하자는 대로 하마.”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한 밤 되십시오.”
***
새벽 1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띠리릭-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가니.
“헉, 뭐야?!”
어두운 거실에 웬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앉아 있었다.
“뭐긴 뭐야. 마누라지.”
“놀랐잖아. 불은 왜 꺼놓고 있어?”
수아는 대답 대신 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은······ 거지?”
“그럼 괜찮지. 왜 안 자고 있어.”
밤늦은 시간에 큰아버지댁 간다는 얘기를 듣고,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이 와야 말이지.”
지혁은 수아를 물끄러미 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다 끝났어.”
“······.”
‘다 끝 났다’라는 건 여러 의미가 있다.
수아는 불안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야근은 끝났다고.”
“······.”
수아는 지혁에게 안긴 채로 생각하다가.
“그럼, 좋은 뜻이네?”
“응. 좋은 뜻이야.”
지혁은 몸을 떼어낸 후, 양손으로 수아의 어깨를 잡으며 웃었다.
“전투적인 회사생활은 끝났어.”
“······.”
“이제 즐기면서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