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그때처럼
다음날.
윤 실장은 평소처럼 출근하여 일일 보고를 준비하던 중, 메시지를 받았다.
[저 오늘 쉽니다. 내일 뵐게요.]
지혁에게 온 짧은 문자였는데, 뭔 일인가 싶었다.
윤 실장의 기억에 지혁은 ‘연차’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다. 돈은 잘 써도 회사를 쉬는 경우는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곧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
답장은 없었다.
‘뭐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윤 실장은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윤 실장님! 회계팀 미팅 대기 중입니다!”
“어어.”
밖에서 전략팀원이 윤 실장을 불렀다.
지혁이 없으면 윤 실장은 두 배로 움직여야 한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노트북을 들고, 빠르게 회의실로 이동했다.
오전 11시경.
중요한 미팅 몇 개를 끝내고 쉬고 있는데.
윤 실장은 자꾸 지혁이 걸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황 팀장. 뭐해? 담배 한 대 피자.]
[알겠습니당~]
아지트.
지혁이 개발한 곳인데, 황 팀장과 윤 실장이 함께 쓰고 있다.
“윤 실장님~ 오전부터 웬 일이십니까? 바쁘지 않으세요?”
“아무리 바빠도 담배는 태우고 살아야지.”
“하하.”
흡~ 휴우~
두 사람은 행복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다가.
“오늘 대표님 출근 안 했다?”
윤 실장은 툭 던져본 뒤, 황 팀장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황 팀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는 게 보였다.
‘뭔가 알고 있군. 하여간······ 거짓말은 못 하는 사람이라니까.’
황 팀장은 지혁이 오 부회장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제 반드시 결정지을 거라고 했었는데······.’
지혁이 출근을 안 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일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갑자기 쉰다고 했을까? 아는 거 없어?”
윤 실장의 물음에 황 팀장은 뜨끔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글쎄요.”
“몰라?”
“저야 모르죠. 오늘 안 나오셨다는 것도 실장님 얘기 듣고 알았는데.”
모른다고 하기엔 얼굴에 너무 티가 났다.
“그러지 말고, 얘기해주라. 무슨 일이야?”
“······.”
“나 선도물산 전략실장이야. 대표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어선 안 돼~”
황 팀장은 잠시 고민했지만.
‘안돼. 얘기하지 말랬어.’
오 부회장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혹시 오 부회장님 출근하셨어요?”
“음? 출근했지. 그건 갑자기 왜?”
장 실장은 매일 오 부회장의 동선을 체크한다. 지혁라인인 황 팀장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선도본관 비서실에 있을 때부터 해왔던 일이니까.
“아, 그냥요.”
지혁은 회사에 안 왔는데, 오 부회장은 출근했다고 물어보는 게 이상했다.
“이상해~”
‘질문 타이밍이 좀 애매했나.’
나중에 물어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황 팀장, 진짜 얘기 안 해줄 거야?”
“아유~ 알아도 모른다니까요~”
황 팀장은 담배를 끄고, 자리를 피했다.
***
선도전자 대표이사실.
오진원과 임원들이 모여 회의 중이었다.
띠리링-!
점심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인터폰이 울렸다.
회의 중에는 웬만해선 인터폰을 하지 않는데.
“잠시만요.”
오진원은 양해를 구하고, 인터폰을 받았다.
“네, 오진원입니다.”
[대표님!]
수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 오 대표님. 오셨습니다!]
“우리 회사에 오 대표가 한둘인가요? 누군데 그래요?”
[선도물산 대표님! 오지혁 대표님이요!]
헉!
놀라서 오진원의 표정이 굳었다.
‘왜? 갑자기? 여길 왜?’
꿀꺽.
“왜요?”
[모, 모르겠습니다.]
“누구랑 같이 왔는데요?”
[혼자 오셨습니다!]
‘혼자?’
더 미심쩍었다. 초당 수백 번의 횟수로 머리가 돌아갔다.
[대표님 뵈러 왔다는데, 모실까요? 잠깐, 잠깐만요! 대표님!]
리셉션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황급히 누군가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고.
[방금 오지혁 대표님, 엘리베이터 타셨습니다!]
“헉, 씨, 뭐야.”
오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혁의 이름만 들으면 긴장된다. 최근 오 부회장이 그에게 총수 자리를 제안한 뒤부터 더 그랬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세요?
임원들은 오진원의 반응에 놀랐고.
-땀 좀······.
바로 옆에 있던 전략실장은 땀 닦으라며 휴지를 건네줬다.
오진원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선도물산 대표님 오셨답니다.”
이 말에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오지혁 대표님······.
-의자 정리해! 빨리!
-자자, 테이블 정리부터 합시다.
회장이라도 온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도그룹에서의 지혁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그를 모르는 직원이 없으며,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사람.
그거 왔다는 소식에 평화롭던 회의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똑똑.
[형님~ 지혁입니다~]
문밖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지금은 임원들 앞에서 만나는 자리이기에, 오진원은 지혁에게 존칭을 썼다.
덜컹.
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어?”
회의실에 있는 임원들과 지혁.
서로 놀랐다.
“아······ 회의 중이었어요? 리셉션에서 그 얘기는 안 하고, 말만 더듬거리면서 잡길래······.”
지혁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밖에서 기다릴게요.”
오진원이 황급히 말렸다.
“아니에요. 거의 끝나던 참이라.”
그러면서 지혁의 행색을 살폈다.
청바지에 운동화. 위에는 남방을 입고 있다.
‘얘가 미쳤나?’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도 지혁의 행색을 보고 놀란 거였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하세요. 일로 온 게 아니라, 형님 만나러 온 거니까요.”
오진원을 향해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덜컹.
문 닫는 소리가 들린 후, 지혁은 밖으로 나갔다.
오진원과 임원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회의가 마무리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 5분 뒤.
임원들은 대표이사실 문 앞에 있는 지혁을 향해 깍듯이 고개 숙이며, 한 명씩 나갔다.
***
모두 다 빠져나간 뒤.
지혁은 환하게 웃으며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이거 참······ 제가 방해한 거 아니죠?”
“응, 아니야. 진짜 끝나던 참이었어.”
오진원은 지혁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 다른데?’
차가운 기운이 흐르던 냉혈한 모습이 아니었다.
‘옷 때문인가?’
명절 때 한복 입은 거 외에, 정장 입은 모습만 봤었다.
지혁이 캐주얼한 옷을 입으니, 딴 사람 같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뭘 그렇게 보세요?”
오진원은 너무 대놓고 봤다.
“어, 아니야. 너 참 훈훈하다 야. 하하. 캐주얼 잘 어울리네.”
“하하. 고마워요.”
오진원은 지혁에게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일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네. 오늘 쉬는 날인데요, 그냥 형님 만나러 왔어요.”
“너는 쉬는 날에도 회사를 오니······.”
오진원은 경계심이 좀 풀렸다.
“좋은 일 있어? 표정이 좋아 보이는데?”
지혁은 어제 완벽한 항복을 받아 내었고.
자신에게 냈던 숙제를 끝마쳤다.
속이 아주 후련했으니, 좋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는 안 좋았어요?”
가볍게 말했지만, 오진원은 말끝을 흐렸다.
지혁이 조금이라도 쏘는 듯한 말을 하면 긴장하게 된다.
“아니······ 그런 의미로 물은 건 아니었고.”
지혁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형님, 형 예전에 살던 양주 집 있잖아요.”
“양주?”
“네, 저랑 최 부회장님이 형 만나러 찾아갔던 곳이요.”
오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긴 왜?”
“지금도 있어요?”
“있지. 처분 안 했으니까.”
지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형님, 오후 반차 쓰면 안 돼요?”
오진원은 멍하니 지혁을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제안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얘가 원래 이렇게 잘 웃었었나?’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알던 지혁이 아닌 것 같았다.
“반차?”
“네. 형이 해줬던 된장찌개가 생각나서요.”
“······.”
“거기서 먹어야 그 맛이 날 것 같은데.”
오진원은 무심결에 말했다.
“너 된장찌개 해주러 반차 내라는 소리야?”
“네? 아니, 뭐 또 그렇게 받아들이시나.”
지혁은 서운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형님이랑 시간 보내고 싶어서, 핑곗김에 하는 말이죠.”
“아, 그래. 그런 거겠지.”
오진원은 경계심 때문에 지혁이 뭔가 말만 하면 왜곡해서 듣게 된다.
지혁 또한 그런 오진원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
“근데, 어쩌지. 오늘 일정이······.”
회사 대표가 갑자기 시간 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이~ 형님. 그냥 좀 갑시다.”
지혁은 오진원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고.
‘얘가 왜 이래. 진짜.’
그럴수록 오진원은 당혹스러웠다.
“형님~”
이번엔 눈두덩에 살짝 힘을 주며 엉기자, 오진원은 결국 수락했다.
“알았다. 가자. 가.”
***
늦가을.
서울에서 멀지 않은 양주의 들판은 노랗게 익어 있었고.
두 남자를 태운 차는 노란 물결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좋네요.”
“그러게. 오랜만에 오니까 좋네.”
오진원의 굳어 있던 표정도 양주에 너른 들판을 보니 좀 풀렸다.
“와······ 그대로네요?”
어느덧 오진원이 살던 집에 도착했는데.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이웃집 아줌마가 관리해 주신다고 했거든. 너무 잘해주셨네.”
한동안 비운 집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엊그제까지 살던 집처럼 깨끗했다.
“형님이 여기서 좋은 일 많이 해서 그런가 봐요.”
“아니다. 내가 좋은 사람을 만난 거지.”
늦은 오후.
저녁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했는데.
“형님, 심심한데 밥 일찍 해 먹는 게 어때요?”
“그럴까?”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사 온 재료와 고기를 꺼내었다.
“난 찌개를 끓일 테니, 넌 고기를 굽거라.”
“하하.”
“왜 웃어?”
“방금 한석봉 어머니가 한 말과 비슷했어요.”
“별것이 다 웃기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두 남자의 입꼬리는 내내 올라가 있었다.
음식 준비를 마친 후, 대청마루에 상을 두고 두 남자는 마주 앉았다.
“냄새 죽이네요. 이 된장찌개가 참 그리웠어요.”
“레시피 알려줄 테니까, 다음부턴 직접 해 먹어라.”
“하하. 잘 먹겠습니다~”
딸깍.
지혁은 소주병을 깠다.
“술 마시려고?”
“마시려고 사 왔죠.”
“내일 출근은?”
“여기서 자고 내일 일찍 출발해요.”
“너 아주 작정하고 왔구나. 요즘 제수씨가 힘들게 했니?”
“무슨 말씀이세요. 어서 받으세요.”
“난 집에 가고 싶은데······.”
그러면서 오진원은 잔을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가을밤은 선선했지만, 술기운에 두 남자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취기가 오르고.
이런저런 얘기 하며, 두 남자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던 벽이 점점 허물어졌다.
“형님, 저 어제 큰아버지 만났었어요.”
“음?”
지혁은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었다.
“아버지는 왜? 네가 찾아간 거야?”
오 회장과 지혁이 만났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기에, 오진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는데.
“회장님은 형님이 총수 되길 원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
오진원의 동공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혹시 진양 형님이 날 찾아왔던 걸 알고 있나? 그걸 어떻게······.’
그때, 오 부회장은 오진원을 열심히 설득했지만, 결국 확답을 주지 않았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저도······ 원하고 있고요.”
“어?”
오진원은 멍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는데.
지혁은 눈에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다.
“모두를 위해서, 형님이 선도그룹을 맡으시죠.”
“······.”
“형님이 좀 하자. 네?”
뭉클.
지혁을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진원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