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실수 아닌 운명 (1)
성북동 회동 후 일주일이 안 되어,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인사발령]
1) 오진양 부회장 : 선도SDS 대표이사 -> 선도전자 상임고문
매스컴에서 난리가 났고.
곧바로 선도그룹 커뮤니케이션팀 전화기엔 불이 났다.
-오진양 부회장이 상임고문?
-오 회장에게 큰 실수라도 했나?
-아무리 그래도 한창 일할 사람을······.
-오 회장의 장남이잖아. 선도전자 대표이사일 때 성과도 좋았고.
기자들은 일제히 선도본관으로 향했고.
미래기획실 커뮤니케이션팀의 홍지원 팀장은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고 없는 인사발령이라며, 투자자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아무리 봐도 전략적 인사라고 보여지지 않는데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홍 팀장은 기자들의 방문을 대비하고 있었다.
“네, 설명드리겠습니다. 오 부회장님에게 개인적인 신변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업무를 보기 힘든 상황임을 말씀드립니다.”
선도본관 프레스룸에는 홍 팀장의 목소리와 타자 소리만 가득했다.
“오랜 기간 근무하셨고,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선도전자에서 상임고문직을 맡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신변이상에 의한 인사발령, 그 외에 다른 건 없으니 추측성 기사는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변이상이 뭡니까? 가장 중요한 설명을 안 해주셨는데요.
예상한 질문이기에, 홍 팀장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말씀드린 대로 개인적인 신변이상입니다. 회장님과의 관계도 좋고,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신 SDS도 경영에도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게 뭐냐고 묻는 겁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말씀 못 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홍 팀장은 휘갑을 쳤고, 기자들은 술렁였다.
-냄새가 나는데.
-큰 병이라도 걸린 거 아니야?
-혹시 전처와의 문제?
-이런 게 어딨습니까? 전 국민이 관심 두는 사안인데,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홍 팀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 부회장님의 사생활입니다. 죄송합니다.”
-차기 회장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홍 팀장은 이 질문에도 명확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회장님이 건재하시기에, 그에 대해서는 지금 말씀드리기가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상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오 부회장의 실각에 대한 선도그룹의 기자회견은 도망치듯 짧게 끝났다.
처음엔 이 일로 매스컴이 시끄러웠으나, 며칠 지나니 잠잠해졌다.
어쨌든, 벌어진 일이고, 다른 자극적인 사건들도 연일 쏟아지니까.
이렇듯 오 부회장의 실각에 대해 외부에서는 불안한 시각이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네.
-그러게, 말이야.
-오지혁 대표님 대단해. 와······ 설마설마했는데.
-오진원 대표님이 함께 하셔서 그렇지.
-최 부회장님도!
아무리 쉬쉬해도, 회사는 소문이 빠른 곳이다.
오 부회장과 달리 지혁과 오진원은 건재한 모습을 보였으니, 그동안 오 부회장과 지혁의 대결 구도에 대한 소문은 사실로 밝혀진 셈이었고.
그래서 직원들은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다.
***
선도서울병원.
지혁은 정신과 전문의 민 교수와 마주 보고 있었다.
“와······ 많이 좋아지셨네요. 비교도 안 될 정도인데요?”
막 정신과 상담을 마쳤는데, 민 교수는 놀란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하하. 그래요?”
“네~ 너무 좋아지셨어요.”
민 교수는 지혁의 표정과 눈빛을 살피며 물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 그냥······.”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회사생활에 중요한 목표가 있었는데, 그걸 달성했다고 할까요?”
“그래요? 얼마나 중요한 목표였길래······.”
민 교수는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혹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는 일일까요?”
“······.”
오 부회장의 이마에서 본 보라색.
거기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보라색은 ‘그 세계’에서 경험했기에 위험성을 알고 있는 거였고.
분명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네. 관련 있습니다.”
지금은 치료 중이기에, 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 회사 내에 숙제로 있었고, 그게 해결되었다는 얘기네요?”
“정확하십니다.”
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치료는 더 받으셔야겠네.”
“네?”
“트라우마를 발생시킨 매개를 바꿔버렸다는 거잖아요?”
“······.”
“그건 트라우마를 극복한 게 아니죠.”
민 교수가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또 다른 매개가 나타나면, 발동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거든요. 즉, 아직 극복되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지혁의 표정이 굳었고.
민 교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징후인 건 맞습니다. 대표님 표정 자체가 바뀌신 걸 보면, 삶 전반을 눌러왔던 매개가 사라진 거 같은데요. 잘 된 거죠.”
“······.”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민 교수는 진료기록부를 정리하며 말했다.
“자, 그럼 다음 상담은 두 달 뒤에 할까요? 이제 자주 안 봐도 될 것 같네요.”
“······.”
“뭐 궁금하거나 이상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차 한잔하고 싶으실 때 편하게 오셔도 되고.”
민 교수는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혁이 나가려는데, 민 교수가 생각났다는 듯 붙잡았다.
“아, 대표님.”
“네.”
“혹시, 총수 되시는 건가요?”
“네?!”
지혁이 당황하여 묻자, 민 교수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에이~ 전 반만 직원이니까 편하게 얘기해도 돼요.”
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그래서 더 말씀 못 드리겠는데요?”
***
일주일 뒤. 제주행 비행기 안.
지혁은 욜로 라이프를 곧바로 실행했다.
옆에 앉은 수아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우리 다음 달에는 하와이 또 갈까?”
“······.”
지혁이 우겨서 이틀간 연차를 내긴 했지만.
수아는 그가 안 하던 짓을 하는게, 내심 불안했다.
“자기 지난주에 작은 아주버님 만난다고 연차 쓰고.”
“······.”
“이번 주엔 제주도 간다고 이틀 연차 내고.”
지혁은 싱긋 웃었으나, 수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거야? 회사 대표가?”
“하하. 내 회사 걱정을 왜 자기가 해?”
“당연히 걱정되지. 우리 집 가장이 하는 일인데.”
“······.”
“나 이 생활 포기 못 해. 몰랐으면 모르는데, 알았으면 포기 못 하는 거야.”
한강 뷰 아파트.
얼마 전에 외제 차도 샀고.
어머니에게 가까운 곳에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하나 해드렸다.
이젠 돈이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서,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쓴다.
아무리 써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쓴 것 이상으로 돈이 생겨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하하. 이 생활을 왜 포기해?”
“대표가 백수 되는 거 한순간이잖아.”
“참······ 우리 마누라 대책 없이 솔직하다.”
“이 모습에 반한 거 아니었어?”
“이 모습뿐이었겠어.”
지혁은 눈썹을 살짝살짝 올렸고.
그가 야한 생각 하는 걸 눈치채고, 수아는 몸을 밀쳤다.
“진짜. 아주 틈만 나면 수작이야.”
지혁은 빙그레 웃으며 앞을 보았다.
[우리 비행기는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방송을 들으며 지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제주도는 처음이네.”
“응, 나도.”
두 사람이 신혼여행으로 전국을 돌아다닐 때도, 제주도에는 뱃삯 때문에 가지 못했었다.
“자기야.”
안전벨트를 매고 착륙을 기다리는데, 수아가 말을 걸었다.
“어.”
“얼마 전에 큰아버지 댁 갔다 와서, 다 끝났다고 했잖아.”
“응.”
“그거 혹시 큰아주버님과 관련된 일이야?”
지혁이 얘기해 주진 않았으나,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수아는 눈치를 보며 다시 물었다.
“이런 거 물어보면 안 되나?”
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안 될 게 뭐 있어. 우리 사이에.”
쓰담. 쓰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관련된 일 맞아.”
“혹시······ 그게 평소 말하던 회사생활의 목표였던 거야?”
표면적으로는 오 부회장을 막는 거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선도물산 직원을 구하는 거였다.
“어느 정도는.”
덜커덩. 덜커덩.
비행기가 착륙했다.
지혁은 웃으며 수아를 보았다.
“이제 딴생각은 말고, 즐기자. 도착했잖아.”
그의 미소를 보면서,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
애월읍을 지나.
한라산 자락 안덕면으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에잇브릿지.
선도그룹에서 운영하는 회원제 골프장인데, 선도물산 리조트 부문이 관리한다.
골프장 안에는 고급 프라이빗 리조트가 있는데, 선도그룹 직원이라면 예약하여 사용할 수 있다.
“와······ 자기야, 여기 한국 맞아?”
에잇브릿지로 가는 길 풍경이 참 이국적이었다.
도로 옆 개활지에서 뛰노는 제주노루도 몇 번을 봤다.
산 내음이 물씬 느껴지고.
하늘에 별은 쏟아질 듯하다.
“그러니까. 제주가 좋다는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에잇브릿지는 넓은 사유지를 갖고 있어서, 도로에서부터 시작된다. 회원이 아닌 사람은 먼 곳에서부터 들어올 수 없다.
제주도가 좋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예약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도로 입구에서 스코틀랜드 복장을 한 직원이 차를 세웠다.
“오지혁입니다.”
“오······ 오! 대표님!”
직원은 곧바로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네. 저 놀러 온 거니까요. 그냥 일반 고객 대하듯 해주세요.”
직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럽니까.’
“네, 알겠습니다! 계시는 동안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네~ 수고하세요.”
붕-
지혁의 차가 출발하자마자, 직원은 바로 무전을 쳤다.
‘오 대표님. 도착. 오 대표님. 도착.’
잠시 후.
노란 불빛이 수 놓은 아기자기한 길이 나타났고.
베이지색 벽면의 2층 집들이 촘촘하게 보였다.
“이거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골프장은 와본 적이 없어서, 가장 커 보이는 건물로 갔다.
‘클럽하우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현관 앞에, 에잇브릿지와 총괄책임자와 임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 이거 참.”
지혁은 그 모습을 보며 수아에게 말했다.
“다른 데 갈 걸 그랬나 봐. 좋다고 해서 와봤는데.”
“호호. 왜? 진짜 좋은데?”
직원들이 각 잡고 환영을 하니, 지혁은 불편함을 느꼈으나.
수아는 에잇브릿지의 깔끔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에 눈이 하트로 변해 있었다.
총괄책임자가 웃으며 지혁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환영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지혁은 휴가를 편하게 즐기고 싶어서,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여기 머무는 동안, 책임자님은 제 눈에 띄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하. 네······ 네?!”
“빈말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총괄책임자는 눈을 끔뻑거렸다.
‘또라이라더니······.’
소문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숙소에 도착했고.
지혁은 들어오자마자 수아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좀 씻고.”
“금방 또 씻을 텐데. 뭘 씻어.”
“아이, 진짜.”
결혼한 지 5년이 되지 않았다.
법적으로도 신혼부부인 지혁, 수아 부부는 열정이 있었다.
제주의 푸른 밤.
은은한 노란 불빛에 휩싸인 에잇브릿지.
짙은 브라운으로 인테리어된 고급 숙소.
달콤한 바람 향기.
두 사람은 침대 위를 날아다녔다.
몇 차례 폭풍우가 몰아친 뒤.
지혁은 자신을 감싼 것을 벗겨내려다가······ 눈이 커졌다.
‘찢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