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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37화 (237/301)

237. 실수 아닌 운명 (2)

흔들리는 동공.

갈 곳 잃은 초점.

지혁은 완전히 당황했다.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아는 이상한 낌새에 지혁을 보았다.

“자기야, 왜 그래?”

“응? 어······ 어. 아무것도 아니야.”

말까지 더듬는 모습이 수상하여, 수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찢어진 콘돔.’

수아는 지혁이 손에 든 걸 보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말이야.”

지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씻어내야 하지 않을까?”

“······.”

수아도 처음엔 놀랐으나, 방금 지혁의 대꾸가 굉장히 서운하게 느껴졌다.

“너 나랑 불륜 저질렀니?”

“응?”

대학 동기인 두 사람은 간혹 친구처럼 말한다. 특히, 감정이 안 좋을 때.

“씨를 잘못 뿌렸다는 거야. 뭐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그렇잖아?! 상당히 기분 나쁘네?”

수아는 초스피드로 옷을 입고, 지혁의 앞에 마주 앉았다.

“야, 오지혁.”

“······.”

“안 그래도 내가 서운한 거 계속 참고 있었거든?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여전히 지혁의 초점은 갈 곳을 잃고 방황 중이었다.

“우리가 등산하다가 만난 사이냐고. 나 당신 아내 아니야?”

“아니······ 그게. 그냥~ 우리끼리 알콩달콩 좋잖아. 항상 신혼처럼.”

“웃기고 있네.”

수아는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나이 들어도 신혼이야?”

“너도 지금 삶이 좋다고 했잖아.”

“좋지! 하지만 더 좋아지고 싶지!”

“······.”

수아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너 원래 애들 좋아했잖아? 결혼할 때만 해도 아이 빨리 갖고 싶다며?”

췌장암에 걸리기 전까지만 해도, 지혁은 아이를 빨리 갖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서, 완벽한 가정을 빨리 이루는 게 꿈이었다.

“실종되었다가 돌아와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 육체는 아니구나. 어쨌든! 완벽히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기다렸던 건데.”

“······.”

“실수 한 번 했다고, 아주 나라 잃은 표정을 지어? 아니지. 그게 왜 실수야? 부부 사인데.”

“그냥 놀란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수아는 팔을 걷어붙였다.

아주 잘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냥 한번 해 봐.”

“뭘, 그냥 해?”

“뭐긴 뭐야. 바지 벗고 이리 와.”

“이 여자가 왜 이래? 무섭게?”

지혁은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났고.

“빨리 안 와? 나 진짜 화낸다?!”

지혁은 거실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날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가파도로 갔다.

보리밭에서 산책하다가, 해물 자장면 먹고.

모슬포항으로 돌아와서, 해변가 카페에서 바다 풍경 보며 커피 마시고.

중문 해수욕장에서 해수욕도 하고.

제주 남서쪽을 돌며, 휴가를 즐겼다.

어젯밤 약간 다투었지만.

멋진 풍경 보고, 맛있는 거 먹다 보니, 수아의 기분이 어느 정도는 풀렸다.

지혁이 그녀의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었다.

‘괜찮을까.’

지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제 일이 신경 쓰이고,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런 심리 상태 때문에, 지혁의 눈에는 제주의 풍광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진 뒤, 중문의 횟집.

싱싱한 회에 술잔을 기울이는데, 수아가 말했다.

“어차피 3주는 지나야 해. 그냥 즐겨.”

“어?”

수년간 함께 먹고 자는 사인데, 지혁의 초조함을 눈치 못 챌 리 없다.

“지금 전전긍긍한다고 달라질 거 없다고. 최소 3주는 지나야 뭐라도 나오니까. 지금은 그냥 즐기라는 거야.”

“······.”

“그리고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는 줄 알아?”

주변에 임신이 너무 잘 돼서 고민이라는 얘기는 거의 못 들어봤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많아도.

“그렇게 신경 쓰여?”

“가파도 보리밭길 너무 멋지더라.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아.”

지혁은 주제를 바꾸려는데.

“말 돌리지 말고.”

“······.”

지혁은 소주 한 병 정도를 비운 상태였고, 취기가 약간 올라 있었다.

“자기는 이 얘기만 나오면 자꾸 피하려고 하더라?”

“······.”

“왜 그렇게 아기를 안 가지려고 하는 건데? 어?!”

쫙-

지혁은 술잔을 비운 후 창밖의 밤바다를 바라봤고.

수아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난 무섭다.”

“······.”

“아마도, 내 아이는 나보다 오래 살게 되겠지.”

“······.”

“내가 없는 세상에······ 내가 지켜줄 수 없는 세상에 아이를 두는 게 두려워.”

수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세계’ 얘기하는 거야?”

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안 믿어지지?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아니. 못 믿는 게 아니야.”

수아는 지혁의 눈을 똑바로 봤다.

“내 남편 말을 왜 못 믿겠어. 그리고 직접 경험한 거라며.”

“······.”

“자기 경험은 믿어.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거잖아.”

수아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가 겪은 세계가 우리에게 꼭 벌어지라는 법 있어?”

“······.”

“그리고 재앙이 닥치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죽잖아. 사고로 죽든, 나이 들어 죽든.”

“······.”

“자기가 경험한 세상이 끔찍하다는 이유로, 새 생명이 태어날 기회조차 안 주는 거. 너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지혁은 묵묵히 수아의 말을 들었고, 수아는 계속 말했다.

“‘그 세계’라는 곳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잖아. 어차피 사람 사는 게······.”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거야.”

“어?”

“살기 위해서 사는 거라고.”

지혁은 슬픈 눈으로 수아를 바라봤다.

“상상하는 것과 겪어본 건 달라. ‘그 세계’에서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이야.”

“······.”

“그 경험을 하느니, 안 태어나는 게 나아.”

지혁은 솔직하게 말했고, 수아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 세계가 안 온다면 어쩔 거냐고.”

“······.”

“그 가능성 때문에 내 아이가 태어날 기쁨을 참아야 하는 거야?”

“난 기쁨을 얻는 것 보다, 비극을 겪지 않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하······ 참나. 벽 보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지혁은 완강했고, 수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하기 힘들 거야.”

“······.”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살기 위해 살아가며.

살아남기 위해 죽이는 세계.

두 다리 뻗고 자는 게 소원인 그런 곳에······ 내 아이를 두고 싶지 않다는 것.

전혀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

2박 3일간의 제주 여행은 끝났다.

약간 불편한 일이 있었으나, 그래도 즐겁게 지냈다.

서울에 돌아온 후, 지혁은 수아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제주도로 여행 가기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한 주, 두 주······ 점점 시간이 지나고, 일에 치여 살며 점점 이 사건에 무뎌져 갔다.

선도그룹에서도 오 부회장의 인사발령 여파가 점점 사라지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오진원, 오지혁 대표. 선도그룹의 차세대 리더를 주목하라.]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외부에서 주목하기 시작했다.

직원 수가 20만 명이 넘으며, 국가가 주목하는 회사다.

오 부회장이 실각한 상황에서. 두 남자가 주목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달이 더 지났고.

대표이사실에서 지혁은 업무자료를 보고 있었다.

“윤 실장님. 그러니까, 베트남 네버랜드 진출은 컨소시엄(여러 기업체 공동 참여)이 낫다는 건가요?”

“네, 본부 전략실과 리조트 부문 전략실이 함께 동의한 내용입니다. 현지화 전략이 중요하다는 판단인데, 이를 위해서는 베트남 현지 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상하는 게 좋습니다.”

지혁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네버랜드의 장점은 K컬처 때문일 텐데, 현지화를 시도하다가 그 색을 잃어버리면요?”

“현지화와 K컬처 사이의 접점을 잘 찾아야겠죠. 이에 대해서 세부 전략 작성 중이니,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직관적인 의견입니다만, 현지화답지 못할지언정, 한국 네버랜드의 특색을 잃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게 현지 테마파크와의 차별점이라고 보거든요.”

윤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말씀 주신 관점 검토해서 전략 구상하겠습니다.”

“네.”

보고서를 닫은 뒤. 윤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씩 진행되네요.”

“네. 윤 실장님이 고생이 많으세요.”

윤 실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요즘 일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

“회사생활 편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만들어가는 재미도 그 못지않게 쏠쏠하네요.”

윤 실장은 시계를 본 뒤 말했다.

“오늘 별일 없으시면 오랜만에 한잔 어떠세요?”

“음······ 그럴까요? 멤버가 어떻게 됩니까?”

“일단 황 팀장 부르고······ 오랜만에 손 대리도 부를까요?”

“하하. 그거 재밌겠네. 그러시죠.”

지혁은 말 한마디에 깜짝깜짝 놀라는 손정진의 반응을 좋아한다.

“네! 그럼 조촐하게 넷이서 달려보시죠. 하하. 지금 나갈까요?”

“네.”

지혁은 웃으며 서류 가방을 챙기는데.

윙-

진동음에, 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켰는데.

‘수아♥’

아내에게 온 메시지였다.

[할 얘기 있어. 오늘 늦지 않게 와.]

‘헉.’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재빨리 핸드폰 캘린더를 확인했다.

‘6주.’

제주도를 갔다 온 뒤, 대략 6주가 지났다.

지혁은 머뭇거리지 않고, 서류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윤 실장님. 집에 일이 생겨서요.”

“네? 갑자기요?”

“죄송합니다. 먼저 갑니다.”

사무실을 뛰어나갔다.

***

“왔어?”

수아는 평소처럼 지혁을 맞았다.

지혁은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뭐해? 들어왔으면, 손발부터 닦아.”

“응? 어. 어.”

지혁은 빠르게 욕실을 갔다 온 뒤, 다급하게 물었다.

“왜 일찍 오라고 했어?”

“······.”

“일단 밥부터 먹자. 차려놨어.”

밥이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미 차려놨다고 하니······.

달그락. 달그락.

적막 속에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났고.

지혁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어서,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 안 되겠다.’

지혁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웬만해선 평일에 혼술은 안 하지만, 지금은 맨정신에 있기 힘들었다.

지혁은 잔을 채운 뒤에, 수아에게 말했다.

“한잔할래?”

“난······ 술 마시면 안 돼.”

덜컹.

지혁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술잔을 든 손이 떨렸다.

수아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나······ 임신했어.”

“······.”

“임신테스트기로 확인했어. 오늘 아침에.”

“지난번엔 안 나왔잖아.”

3주 전쯤에 했을 때는 분명 한 줄이었다.

“날짜가 지났는데도 생리를 안 해서, 혹시나 해서 다시 해봤는데······.”

“······.”

“임신 맞는 거 같아.”

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수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축하해 줄 거지?”

“······.”

지혁은 고개를 쳐들고 천장에 시선을 둔 채 가만히 있었고.

수아는 그런 지혁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수아야, 이리 와.”

지혁은 수아를 꼭 끌어안은 뒤, 속삭였다.

“축하는 내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지혁아······.”

지혁은 수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수아의 젖은 얼굴을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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