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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46화 (246/301)

246. 뒤를 부탁한다 (2)

오진원은 입이 근질거렸으나, 그룹 회장 앞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지혁은 단순히 친척 동생이 아니니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세요.”

지혁은 재밌다는 듯 말했는데, 오진원은 그럴수록 약이 올랐다.

“회장님, 어차피 단둘이 있는데, 말 좀 편하게 해도 될까요? 계속 존대하려니 영 불편해서 말을 제대로 못 하겠네요.”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렇게 하시죠. 전 허례허식 싫어해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진원은 말을 쏟아냈다.

“야, 이렇게 뒤통수를 쳐?”

“······.”

“이럴 거면 내가 회장을 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회장 일 다 시킬 건데.”

“그래도 직함은 붙이셔야지. ‘야’가 뭡니까?”

“아 그래? 미안.”

오진원은 재빨리 사과한 후 다시 말했다.

“그리고 나 선도전자에 있고 싶단 말이야. 이제야 정 붙이고 일 좀 하려는데, 이렇게 발령을 내버리니? 회장님, 너무한 거 아니야?”

“하하. 형님, 불만이 많으시네.”

오진원이 편하게 얘기하니, 지혁도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불만 많지. 생각했던 것과 완전 다르잖아.”

“원래 회사 일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람 사는 일도 그렇고. 생각대로 되기 힘들죠.”

“너 지금 놀리는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이 자식이?”

“하하.”

지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유쾌해진다.

오진원은 얼굴이 붉어져서 어이없게 지혁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지혁은 웃음을 멈춘 후, 오진원을 불렀다.

“형님.”

“아, 왜~”

“형님은 일만하고 책임은 제가 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

“회장처럼 일하시되, 회장이 감당해야 할 책임은 없다는 말이에요. 제가 회장 직무를 지시한 거니까요.”

오진원은 약간 솔깃해했다.

“그러니까, 부담 느끼지 말고 재밌게 일하세요. 형님 관계사 대표들과 사이좋잖아요? 선도전자에만 있으면 만나는 사람도 한정될 수밖에 없고.”

“······.”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관계사 대표들 얘기 잘 들어주시고, 풀건 풀고 막을 건 막아 주시면 되는 거예요.”

오진원은 잠자코 들었으나, 표정은 여전히 탐탁지 않았고.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리고 선도전자 대표이사보다 부회장 자리가 더 편할 거 같지 않아요?”

“왜?”

“선도전자 대표이사는 세계가 주목하는 자리잖아요.”

그렇긴 하다. 우리나라에서야 그룹 총수가 절대적이지만.

글로벌에서는 선도그룹 회장을 모를 수는 있어도, 선도전자 대표를 모를 리 없다.

얘기를 듣다 보니, 오진원은 ‘그룹 부회장’ 직함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흠! 한번 생각해 볼게.”

지혁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참 착한 형이야.’

“아, 맞다.”

오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생각난 듯 다시 앉으며 지혁에게 물었다.

“그럼, 회장님은 뭐 하려는 건데? 세크 위원장? 세크가 뭔데?”

***

예상했던 질문이기 한데.

오진원에게 진짜 목적을 밝힐지 정하지 못했다.

‘얘기를 해줘도 될까.’

지혁은 오진원을 믿지만, 그의 가족을 못 믿는다.

그가 알면, 큰아버지 댁에도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공식 직함을 걸고 하는 일을, 비밀 지켜달라며 밝히는 것도 이상하다.

‘미안하지만, 형님한테는 숨기는 게 낫겠어.’

지혁은 마음을 정한 후 말했다.

“선도비상대책위원회. 명칭 그대로예요. 선도그룹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조직이고. 제가 직접 챙겨야 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에 위원장직을 맡은 거예요.”

“미래?”

오진원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우리 그룹엔 미래기획실이 있는데?”

지혁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으나, 침착하게 대꾸했다.

“미래기획실은 실질적으로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미래’를 대비하는 역할은 아니죠.”

“흠······.”

“미래기획실이 우리 그룹에 쓸모없는 조직도 아니잖아요. 갑자기 조직의 성격을 바꿔서 뒤흔드니, 필요한 조직은 소규모로 신설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있던 걸 바꾸는 것 보다, 새로 쌓는 게 더 쉬운 법이다.

지혁이 말이 일리가 있기에, 오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치자. 근데 이게 회장이 전담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야? 사람을 세우고 보고 받아도 되잖아? 윤 실장님이 위원장 맡아도 충분할 거 같은데?”

“······.”

그의 질문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 형이 허술해 보여도, 꽤 날카로운 면이 있어.’

일반적으로 보자면, 오진원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세크의 진짜 목적은 생존을 위해 멸망을 대비하는 것. 그룹의 총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지혁은 대답하는데 살짝 진땀이 났다.

“명예회장님이 ‘위기’라는 말을 즐겨 하셨죠. 이임사에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그룹의 미래는 회장이 직접 챙겨야 할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우리 그룹이 미래 먹거리 준비가 약하다는 건 나도 동의하긴 하는데······.”

오진원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지혁은 밀어붙였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

“지금 바싹 챙겨야 합니다. 저는 올인하려는 거예요.”

“뭘, 올인씩이나······.”

오진원은 지혁이 오바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전 직원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각오로 준비할 겁니다.”

“뭐? 생명?”

“회사의 존폐는 직원들의 생계와 연관되잖아요.”

“우리 회사 문 닫으면 다른 일자리에 찾아도 될 텐데······과한 걱정 아니니?”

오늘따라 오진원은 논리적인 반박을 잘했고, 지혁은 또 당황했다.

‘이 형이 오늘 작정하고 왔나.’

지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전략을 바꿨다.

“형 보기에 세크 위원장이 더 쉬워 보이나 보다.”

“뭐······ 아무래도 여러 가지를 봐야 하는 회장 직무보다는 한 가지만 집중하는 게 간단하지 않을까?”

“그럼, 형이 세크 위원장 하실래요?”

“······어?!”

오진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돌아갔다.

“난 상당히 부담되고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는데. 형님한테는 간단해 보인다면······ 바꿔서 하시죠.”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그걸 내가 왜 해! 간다~”

***

회장 취임한 지,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지혁은 그룹 비서실장일 때 회장 대리 업무를 해봤기에,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진원은 처음에 엄살 부렸던 것과는 달리, 선도본관 부회장실에 온 후부터 지혁이 요구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주었다.

총수가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으나, 선도그룹은 불협화음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그룹 총수로서 지혁은 여유를 가질 만했으나······.

전보다 더 정신없이 지냈다.

그래도 퇴근은 일찍 했다. 돌봐야 할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서와~”

“어~ 별일 없지?”

“그럼~”

지혁은 수아의 배를 문지르며 인사했다.

“불사조야~ 아빠 왔다. 엄마랑 잘 놀았어?”

수아는 지혁의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참 신기했다.

‘은근히 다정하단 말이야.’

냉기가 철철 흐르던 사람이 불사조를 부를 때면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식사는?”

“하고 왔어. 그거 묻지 말라니까. 내가 자기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하겠어?”

수아는 임신 8개월로 배가 많이 불러서, 거동이 힘들 정도다.

지혁은 손을 닦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또야?”

“나 일 좀 볼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만약을 위해 방문은 열어놨다.

항상 이런 식이다.

퇴근만 일찍 할 뿐, 집에서 야근이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 밤에는 재택근무.

잠은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지혁은 업무에 매진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 세계’를 대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선을 다했다.

밤 11시경.

똑똑.

수아가 과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지혁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안 잤어?”

“오늘 잠이 잘 안 오네.”

지혁은 과일을 먹으며 말했다.

“뭘 이런 걸 갖고 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수아는 지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도대체 누가 회장한테 일을 시키는 거야?”

“응?”

“자기가 선도그룹 꼭대기 아니야? 요즘 모습 보면, 무서운 직속 상사 모시고 일하는 거 같아.”

“하하.”

지혁은 수아의 비유가 재밌어서 웃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내 상사지 뭐.”

“그룹 회장 되면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더 고생하는 거 같아.”

지혁은 어깨에 얹힌 수아의 손을 잡았다.

“고생은 무슨.”

지혁은 뒤돌아서, 수아와 부른 배를 보았고.

마음이 묵직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는 걸 못 본 척하고 살 수는 없어.’

이런 기분이 느껴질 때면, 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불사조는 자고 있나?”

“배고파서 못 자겠데.”

“그래?”

“응. 순대 먹고 싶대. 그리고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잠들고 싶대.”

지혁은 피식 웃고는 재킷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금방 갔다 올게.”

***

다음날. 회장실.

“이상 일일 보고 마칩니다.”

윤 실장이 여느 때처럼 일일 보고를 마친 뒤.

돌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음?’

지혁은 평소와 다른 낌새를 느꼈다.

‘준비됐나?’

지혁은 세크 네 명에게 과업을 준 이후,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진척 사항을 묻지 않았다.

생소한 일이라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뭐 할 얘기 있어요?”

지혁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어보자, 윤 실장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할 얘기가 있긴 한데요.”

“그럼 하세요. 전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윤 실장은 머뭇거렸다.

“한 달 전에 말씀하신 거······ 진심이죠?”

지혁이 빈말 안 하는 사람이란 거, 윤 실장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한 번 더 확인했다.

시켜서 준비하긴 했으나, 아직도 이걸 하는 게 맞는지, 과연 할 수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이죠. 완전 진심이죠.”

“하아······.”

윤 실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막상 입 밖으로 내어 보고하려니 현타가 왔다.

‘에라 모르겠다.’

“회장님, 방주 프로젝트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초안 작성으로 얼개만 짰습니다. 보완할 부분 말씀 주시면 적용하겠습니다.”

“그래요. 들어봅시다.”

윤 실장은 보고서를 지혁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말했다.

“쉘터는 집중이 아니라, 분산되어야 합니다.”

“······.”

“한 장소로 만드는 게 관리적인 측면에서는 유리할 수 있으나, 정부로부터 인허가받을 마땅한 명분이 없습니다.”

“······.”

“지하 쇼핑몰 사업으로 시작하여, 전국 각지에 지점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어떨까 합니다.”

지혁은 눈을 빛내며, 그의 얘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하면 정부 인허가받는데 어렵지 않고요. 그날이 왔을 때, 각 지점을 쉘터로 변경되어 운용하는 겁니다.”

“······.”

“지역별로 있으니, 대피 계획을 세우기에도 더 쉬울 거로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한 뒤, 윤 실장은 지혁의 표정을 살폈는데.

지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계속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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