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 완결
5년 뒤. 설날.
지혁의 가족은 모두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어머니 오셨어요?”
바로 옆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가 왔다.
“다들 갈 준비 됐니?”
“할머니~”
“아이고~ 우리 강아지.”
올해 6살이 된 시안은 어머니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안겼다.
시안은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할머니에게 안겨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호호. 너는 할머니 매일 만나면서, 그렇게 좋니?”
수아의 말에, 어머니는 시안의 등을 토닥이며 대꾸했다.
“얘, 둬라. 날 이렇게 반겨주는 건 시안이밖에 없다. 이쁜 강아지~ 할머니는 시안이뿐이야~”
지혁은 이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갈까요? 큰집 식구들 기다려요.”
“그래, 가자꾸나.”
매년 명절에는 큰집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
이제 80세 중반이 된 오 명예회장은 건강하며, 그 외의 가족들도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다.
오진원과 오혜진은 결혼할 조짐이 안 보이고, 3년 전에 결혼한 오혜빈도 자녀 소식은 없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오 명예회장에게 친손주의 복은 없었고, 그 또한 어느 정도는 체념하고 살고 있다.
그래서······.
“아이고~ 시안이 왔니?”
시안은 오 명예회장의 보물이다.
지혁의 가족이 도착하자, 오 명예회장은 시안부터 챙겼다.
조카 손주 중에서 막내이며, 선도그룹 회장의 아들.
그룹 오너를 이어받을 손주이기에 더욱 애정이 가는 데다가.
“할아버지~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시안은 오 명예회장을 잘 따랐다.
“하하 그래?”
“볼이 쏙 들어갔어요.”
시안은 오 명예회장에게 안겨서 그의 볼을 쿡쿡 누르면서 말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수아가 당황하여 말했다.
“큰아버님 죄송해요. 얘야, 버릇없게 뭐 하는 거니.”
“어머니, 이것 보세요. 할아버지 살이 많이 빠졌잖아. 밥 안 줘요?”
아직 어린아이라서 말하는데 거침이 없다.
“할아버지 일 안 한다고, 큰할머니가 밥 안 줘요?”
큰할머니는 어금니를 깨물며 미소 지었고.
그럴수록 수아는 좌불안석이었다.
“죄송해요. 입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할머니가 나섰다.
“시안아~ 큰할머니랑 다른 어른들께도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시안이는 시큰둥하게 인사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낀다.
큰할머니와 고모들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작은아버지~”
하지만, 오진원에게는 좋다고 달려들었다.
“일로 와~ 짜샤. 할아버지는 아빠랑 대화 좀 나누시게.”
오진원은 시안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고, 지혁과 오 명예회장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잘 지냈냐? 오랜만에 보는구나.”
“네, 큰아버지. 살이 좀 빠지신 것 같긴 합니다. 건강관리 좀 하셔야겠어요.”
“하하. 그래.”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잘 없었다. 집안일로 만났으나, 자연스럽게 회사 얘기가 나왔다.
“쇼핑몰은 잘 되니? 관심을 많이 받던데.”
전자, 반도체에 강한 선도그룹이 작년부터 유통업에 본격 진출했다.
업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세계그룹 명예회장은 재작년 명절부터 안 오고 있다.
“네, 괜찮습니다.”
“그래, 네가 직접 준비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
“한번 실패했던 분야라 불안하게 봤는데, 잘 돼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인데요. 더 노력해야죠.”
[식사하세요.]
부엌에서 수아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네.”
***
식사를 마친 후, 서재에서 시안은 오 명예회장과 놀고 있었다.
80이 넘은 노인은 손주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시안이 재롱떠는 걸 지켜보다가.
“음? 시안아, 허리춤에 그건 뭐니?”
시안의 허리 양옆에 칼집이 있었다.
“제 무기에요.”
“무기?”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플라스틱 단검이었는데.
시안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었다.
“이야~ 촤! 촤!”
오 명예회장은 그저 사랑스러울 따름이었다.
“하하. 사내놈답다. 사내놈다워~”
덜컹.
“이게~ 무슨 소리야?”
서재 앞을 지나가다 ‘촤~ 촤~’ 소리를 듣고, 오진원이 들어왔다.
“이 칼잡이는 누구야? 어? 성북동에 웬 자객이 나타난 거야?”
“이야!”
시안은 입으로 기합 소리를 내며, 오진원에게 말했다.
“덤빌 거예요?”
“뭐?!”
오진원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네가 감히 삼촌에게 덤비겠다고?”
시안은 칼자루를 내린 채 피식 웃었고.
오 명예회장은 이 모습을 웃으며 지켜봤다.
오진원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소리쳤다.
“좋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지키겠다. 자객! 덤벼라.”
“······.”
그때, 시안에게서 스산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해보겠다는 거죠?”
“어?”
“결투에 장난은 없습니다.”
시안의 눈빛이 바뀌었다.
오진원은 살짝 당황했지만.
‘쪼그만 게 연기 엄청나게 잘하네. 배우 해도 되겠는데.’
“당연하지!”
오진원 또한 진지하게 대답하며, 시안의 분위기에 맞춰주었다.
“무기는요?”
“난 권술 파이터다!”
“그렇다면.”
스으윽-
시안은 자세를 낮추며, 오른손은 세이버 그립(엄지를 옆 부분에 걸치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사선으로 감싸 쥐는 모양)을 하고, 왼손은 아이스픽 그립(거꾸로 쥐는 모양)을 취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는데.
흡사 고양이가 공격하기 전 자세 같았다.
‘얘 뭐야?’
오진원은 당황했다.
스릉- 스릉-
발로 땅을 비비며 천천히 오진원을 향해 움직였고.
오진원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휙-
사정거리에 다가왔을 때쯤, 시안은 세이버 그립으로 잡은 칼을 크게 휘둘렀다.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는 경계 자세였다.
오진원도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둘 다 어딘가 익숙해 보였다.
오 명예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이것들이······ 요즘 회사에서 전투기술 가르친다더니······.’
휙- 휙-
시안은 순간 돌진했고.
오진원은 시안의 칼날을 피했다.
아무리 시안이 재빠르게 움직여도 상대는 어른.
게다가 오진원 또한 일반인의 실력이 아니었다.
‘오 회장과 함께하는 나를 지키는 운동’을 꾸준히 하며, 전투기술을 갖췄다.
시안이 뻗은 오른팔을 잡고 칼을 뺏은 후, 아이스픽 그립을 잡은 왼손은 살짝 쳐냈다.
몇 번의 칼부림 끝에, 시안은 오진원에게 제압당했다.
“자객! 항복해라!”
상체와 오른팔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시안은 왼손을 뻗어서, 양말에서 손가락 모양의 칼을 뽑았고.
휙- 픽!
“급하시네요.”
손가락 길이의 플라스틱 칼이 오진원의 목젖을 겨누었다.
순간의 방심이 승부를 갈랐다.
꿀꺽.
오진원은 마른침을 삼켰고.
오 명예회장도 이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시안아.”
방문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지혁이었다.
오진원과 얘기 좀 나눌까 해서 올라왔다가, 서재 안의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네.”
시안은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칼을 거두며 대답했다.
“가족한테 칼 겨누는 거 아니라고 했지?”
“······.”
“대답 안 해? 아빠 말 듣기 싫어?”
“아니요. 죄송해요.”
어린 남자애들이 공격적이며, 짓궂긴 하지만.
지혁은 시안이 좀 과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가족들 이마의 색은 보지 않으려 했으나, 한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시안의 이마를 살펴본 적이 있었다.
‘역시, 아이라 그런 건가.’
투명했다. 아무런 색도 보이지 않았었다.
“장난친 거야. 장난. 시안이 혼내지 마.”
오진원은 두 사람 사이에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한창 그럴 나이잖아. 지혁아. 너무 혼내지 마.”
“형님, 괜찮으세요?”
“응? 어어. 괜찮겠지?”
오진원은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뭉툭한 플라스틱 칼날이었으나, 분명 살기를 느꼈었다.
오진원은 일어나서 시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 네 아빠한테 전투 교육받고 자신 있었는데, 시안이가 한 수 위네.”
“······.”
“조기교육의 힘인가? 하하.”
잠자코 지켜보던 오 명예회장이 한마디 했다.
“이런 걸 조기교육 시켜?”
오 명예회장은 소문으로 듣던 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회장이 선도그룹을 요새화하고 있다.’
아무리 보안에 신경 써도, 소문은 어쩔 수 없다.
중요 정보가 누출된 건 없어도, 지혁의 행보에서 짐작되는 게 있었다.
오 명예회장은 눈살을 찌푸리고 지혁에게 물었다.
“오 회장.”
“네.”
“회사 괜찮은 거지?”
“네, 괜찮습니다.”
“정말이지?”
“그럼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선도그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합니다.”
“······?”
묘한 대답에, 오 명예회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집에 가는 길.
늦은 시간까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었다.
지혁은 운전 중이며, 가족들은 자고 있다.
조용한 차 안. 삼각지역을 지나, 동부이촌동을 향해 가고 있는데.
‘에엥-’
밤늦은 시각.
길거리에 웬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 갔는데.
‘에엥-’
또 사이렌이 울렸다.
경보 장치가 고장 나서 울리는 게 아니었다.
‘뭐지?’
사이렌이 울리든 말든,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지혁은 심상치 않은 기분에 라디오를 켰다.
[국민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파주 인근 군사분계선에서 교전이 1시간째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군은······.]
실제상황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국민 여러분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집 안에 대기하시다가, 대피 경보가 울리면 가까운 전철역으로······.]
끼익-
지혁은 곧바로 차를 돌렸다.
“어머, 깜짝이야!”
수아가 화들짝 놀라서 깼다.
“자기야, 무슨 일이야?”
시안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거리에 울리는 사이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심각한 메시지.
두 여자는 뭔지 몰라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다.
수아는 시안을 꼭 끌어안았고.
어머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니?”
자동차는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회사로 갈 거거든요?”
“회사?!”
어머니는 황당하여 물었다.
“얘, 이런 상황이면 빨리 집에 가서 짐부터 싸야 하는 거 아니니?”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거예요.”
“······.”
“일단 사태 파악부터 하고 움직일게요.”
위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윤 실장’
지혁은 곧바로 전화를 받은 뒤, 말했다.
“가고 있어요.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세크 위원들 모두 소집하세요.”
***
선도본관 지하 상황실.
지혁은 가족들을 선도본관 상황실 옆의 회의실에 있게 했다.
“자기야, 여기 잠시 있어. 어머니, 쉬고 계세요.”
지혁이 나가려는데, 시안이 따라왔다.
“아빠, 저도 같이 갈래요.”
“어딜?”
“지금 싸우러 가는 거 아니에요?”
“뭐?”
“저도 싸울 수 있어요. 남자는 맞서야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안은 허리춤에서 플라스틱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어도, 지혁은 그런 시안이 귀여웠다.
“시안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고, 지켜야 할 때야.”
“······.”
“아빠는 없는 동안, 엄마랑 할머니 지켜줄래?”
시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지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너한테는 아무 일도 안 생길 거야.”
“걱정 안 해요. 누구든 오기만 하면, 촤촤!”
허공에 플라스틱 칼을 휘둘렀고, 지혁은 그런 시안의 볼을 꼬집고 방을 나갔다.
중앙통제상황실.
평시에는 선도본관 지하에서 운영된다.
‘그날’이 오면, 중앙통제상황실은 ‘선도 프리미엄 아울렛 과천 지점’으로 이동한다.
“안녕하십니까.”
상황실에 세크 위원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지혁은 세크 위원들을 돌아보며 물었고.
윤 실장이 대답했다.
“군 통신망 감청 내용 보고드립니다.”
“네.”
“파주 군사분계선 초소에서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현재 중대 규모가 교전 중이며, 사상자는 10여 명 정도로 확인됩니다.”
“원인이 뭡니까?”
“우리 측에서 야생 동물을 적으로 오인하여 발포했고, 이에 북측에서는 침범으로 착각하여 대응 사격했습니다.”
최근 남북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오해가 중대 규모의 교전으로 발전된 것이다.
“확전 가능성은요?”
“윗선에서 상황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확전은 피하려고 병력 투입을 자제하고 있으나, 일촉즉발 상황인 것은 확실합니다. 국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흠······.”
지혁은 고민했다.
‘대피령을 내려야 하나.’
선도그룹은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대피령을 내리는 순간, 전국 방방곡곡의 선도그룹 임직원들은 자전거를 끌고 각 쉘터로 이동할 것이다.
만약, 대피령을 내린 이후 군사분계선 상황이 해프닝으로 끝난다면, 그간 선도그룹이 해온 모든 것들이 발각되게 된다.
법체계가 무너지지 않은 상황에서 ‘쉘터’의 존재가 밝혀지면, 선도그룹이 위험해진다. ‘그날’을 준비하느라 불법을 무릅썼다. 특히 무기 제조는 치명적이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타이밍이 중요하다.
포탄이 낙하할 때 대피하게 되면, 생존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
신중해야 하지만,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대기합시다.”
“······.”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고, 서로 인지하고 있다고 하니까요.”
콰과광-!
밖에서 전투기 굉음 소리가 들렸다.
꿀꺽.
윤 실장은 겁에 질린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대기합니까?”
“네.”
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
군, 정부 할 거 없이, 세크 위원들은 온갖 감청에 귀를 기울였다.
지혁은 CCTV로 길거리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밤늦은 시간임을 고려해도, 놀라울 정도로 길에 차 한 대 다니지 않았다.
전 국민이 긴장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괜찮을 거야.’
지혁은 평화가 지속되길 바란다.
지금처럼 아들, 아내, 어머니와 함께 알콩달콩 재밌게 살며.
회사에서 동료들과 뜨겁게 일하고, 때론 회식도 즐기며 살고 싶다.
그러나, 항상 좋을 순 없는 일이다.
아무리 평화로운 세상이라도,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말이다.
인류에게 언제나 고난은 찾아왔고.
멸망과 회복을 반복했다.
하필 그 ‘멸망의 역사’가 지혁과 그의 가족이 살아 있는 동안 찾아온다고 해도.
‘준비돼있어.’
두렵지 않았다.
지난 5년간 철저히 준비했다.
당장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살아낼 방도를 만들어냈다.
“회장님. 방금 군 감청 확인했습니다.”
황 이사가 한숨을 쉰 후, 밝은 얼굴로 말했다.
“상황종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군사분계선에서 교전을 멈췄고, 전투기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
“군 수뇌부가 서로 오해한 상황을 인정한 것 같습니다. 추후에, 책임 소지에 대한 쟁점은 있겠지만, 확전은 피한 것 같습니다.”
세크 위원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고 이사만이 어딘가 모르게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평화라는 게 참 유지하기도 어렵지만, 깨지기도 어려운 것 같네요.”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오밤중에 고생 많으셨습니다만······ 오늘 밤은 세크 위원들이 당직을 서주셨으면 합니다. 내일 휴가 드릴게요.”
윤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회사에서 특권을 받는 사람들이 그 정도 수고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혁은 가자미눈을 뜨고 윤 실장을 보다가 한마디 했다.
“많이 변하셨어.”
“회장님도 많이 변했거든요?”
“하하.”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가족들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올게요. 이동 중에 급하게 오느라 같이 왔거든요.”
고 이사가 말했다.
“뭘 오십니까. 들어가 쉬십시오. 내일 저희 다 쉬는데, 회장님은 계셔야죠.”
“아······ 저는 지금 들어가서 4시간 자고, 내일 출근하라고요?”
-하하하.
세크 위원들은 일제히 웃었고.
지혁 또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가장 젊은 피니까, 어쩔 수 없네요. 하하. 그럼 수고하십시오~ 먼저 가볼게요.”
세크 위원들은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
덜컹.
“꼼짝마랏!”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들이 플라스틱 칼을 빼 들고 막아섰다.
“어, 아빠?”
나를 보며 울먹거렸다.
아무리 씩씩한척해도, 애는 애인 것이다.
“무서웠냐?”
“아니요.”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니?”
“이제 집에 가면 될 것 같아요.”
“정말?”
“네.”
어머니와 아내는 한숨을 쉬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해가 지날수록.
비행깃값은 점점 싸졌고.
리사이클 패션은 점점 유행하고 있으며.
UFC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종격투기 단체에서 글러브가 사라진 지 오래다.
세상은 ‘그 세계’의 영감님이 말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지금과 같은 경보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위기는 있었으나,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세계’가 올지, 안 올지는 신만이 알고 있다.
평화 속에 위협은 항상 있었으며, 공든 탑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아이고~ 졸리다. 어서 가서 자자~”
난 겁이 없는 사람이지만, 시안이 생겼을 때는 두려웠었다.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다.
언제든 위협이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기에.
두려울 게 없다.
아내가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기야, 너무 무서웠어.”
“무서워하지 마.”
선도본관을 빠져나가며, 난 앞만 보았다.
“지금 살아 있잖아.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야. 반드시.”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지금이 행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자.
그날은 도적같이 찾아올 수 있으므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