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도적같이 찾아왔다 (1)
선도물산 상품기획 1팀.
금요일 저녁, 손정진 팀장은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2038년.
지혁의 첫 후배이자 상품기획 1팀의 막내였던 그는, 어느덧 43세의 차장이 되어 상품기획 1팀의 팀장직을 맡고 있다.
토요일인 내일은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 오늘 저녁에 관리받기 위해 비싼 숍을 예약해놨다.
‘5시 40분.’
20분 뒤면, 퇴근이다.
평소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오늘만큼은 칼퇴하기 위해 시간 체크하고 있었는데.
“하아······ 진짜.”
입사한 지 6개월 된 막내가 한숨을 푹 쉬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장 자리에 있으면 안 보려 해도, 다 보이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은 일찍 가야 해. 넘어가자. 월요일에 해도 돼. 월요일에.’
손정진은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어깨가 축 늘어져서는 터덜터덜 자리로 향해가는 막내의 모습을 도저히······.
“이리 와 봐.”
결국 그를 불렀다.
아는 걸 모르는 척하면 안 된다고, 오지혁 선배에게 배웠었다.
“네. 팀장님.”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막내는 손정진 팀장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지혁이 그랬던 것처럼, 손정진 또한 팀을 완전히 장악했다. 선배 팀원도 있으나, 팀장으로서의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럼 티를 내지 말든가. 말 안 할래?”
“······.”
막내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2039 Spring 시즌 제품 기획하는데, 디자인실과 의견 충돌이 좀 있어서요.”
10월이면 내년도 봄 상품을 기획한다. 시즌 기획 중에 디자인실과 의견 충돌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업무 중에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똑바로 얘기 안 할래? 혼자 넘어갈 거면 표정 관리하고 사무실로 들어오든가.”
어느덧 상품기획 1팀 팀원 모두 손정진과 막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
막내는 망설이다가 결국 말했다.
“약간 심한 말을 들었습니다.”
“뭔데?”
“이렇게 상품 보는 눈이 없어서, 매출을 꼬라박는 거라고.”
“······!”
‘하아······.’
손정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올해 S/S 스타덕 매출이 좋지 않았었다.
매출 부진의 원인이 한 팀만의 이유겠는가.
새로운 스타덕 디자인 팀장은 굉장히 방어적이며, 말을 좀 심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네가 상품기획 1팀인 거 알면서 한 말이야?”
“그건 저도 잘······.”
지금은 브랜드를 통합하여, 스타덕 브랜드로 여러 패션라인이 합쳐졌다.
즉, 상품기획 1, 2, 3팀이 모두 스타덕을 한다.
- 이 여자가 미쳤나.
손정진뿐만이 아니라, 상품기획 1팀의 팀원들은 모두 분개했다.
일하면서 이견이 생길 수야 있지만, 상품기획 1팀에게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선도’라는 1등 회사 로얄티에 더해져, 오지혁 회장이 상품기획 1팀 출신이라는 로얄티도 있기 때문이다.
‘아오, 뒷골 땅겨.’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야, 따라와.”
손정진은 사무실을 나섰다.
***
덜컹!
거친 문소리에, 디자인팀 사람들은 일제히 입구를 바라봤는데.
손정진이 차가운 얼굴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 1 팀장님이다.’
‘무슨 일이지?’
‘표정이 너무 안 좋으신데.’
상품기획본부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 중의 한 명.
그가 등장으로 디자인팀 사람들은 일제히 긴장했다.
디자인 팀장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내가 우리 막내한테 얘기를 좀 들었는데요.”
디자인 팀장은 손정진 뒤에 선 남자를 본 후, 기겁했다.
‘헉! 이 사람 상품기획 1팀이었어?!’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몰라봤다.
실무 한다며 디자인실에 들락거린 지는 얼마 안 되었기에.
디자인 팀장은 실수했다는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미 늦었다.
손정진이 워낙 기세 있게 들어와서, 디자인팀뿐만이 아니라, 주변 부서 사람들도 힐끔거리며 이곳을 주목했다.
“우리 때문에 매출을 꼬라박았다고요?”
“······.”
“난 동의 못 하겠는데, 상세하게 이유 좀 들어봅시다. 원인이 명확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사과드리고, 상품본부장님께 보고해서 시말서까지 쓸 테니까.”
구경하는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 디자인 팀장님이 미쳤나. 건드릴 사람이 따로 있지.
- 회장님 최측근을 건드려? 깡다구 좋네.
상품본부장에게 보고한다는 말이 더 무서웠다. 그는 가장 오랫동안 상품기획 1팀장을 맡았던 정성재 이사였으니까.
즉, 손정진과 같은 라인이다.
“왜 말이 없으세요? 꼬라박았다고 할 정도면 명백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
“디자인 팀장님?”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
디자인 팀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순간 뭐라도 한마디 해볼까 하다가······.
‘하아······ 아니야. 회사생활 하루 이틀 할 거 아니잖아.’
지난달 오지혁 회장이 선도물산에 방문했을 때, 손정진의 어깨에 손 올리고 다니던 걸 떠올렸다.
“손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했습니다.”
“······.”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제가 묻는 말은 그게 아닌데요.”
“······.”
“이유를 말씀해 보시라고요.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해서 매출을 꼬라박았는지.”
지혁에게 보고 배운 거였다.
‘밟을 때는 제대로 밟아야 해.’
화는 이미 가라앉았지만, 이왕 나선 거 확실히 했다.
디자인 팀장은 입술을 깨물다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
그리고 디자인 팀장은 막내에게도 다가가서 사과하려는데.
“됐습니다. 막내한테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완전히 적으로 돌릴 게 아니라면, 마지막 자존심까지 건드려서는 안 돼.’
주변인들에게는 손정진이 흥분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였다.
“상품기획 1팀에 할 말 있으시면 저에게 직접 해주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네, 팀장님.”
손정진은 막내에게 말했다.
“가자.”
“네.”
저벅. 저벅.
복도를 걸으며 손정진이 말했다.
“막내야.”
“네, 팀장님.”
“다음부터는 상대 직급이 뭐든, 할 말 있으면 해. 쫄지 말고. 알았어?”
“······.”
“니 팀장이 누구냐? 다 막아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손정진은 앞장서서 걸어갔고, 그의 뒷모습을 보는 막내의 눈은 하트로 변해 있었다.
예전에 손정진이 지혁에게 그랬던 것처럼.
***
다음날. 저녁 6시.
여의도 불꽃축제가 있는 날.
손정진은 어렵게 예약한, 뷰가 좋은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휴우······ 이번엔 잘해보자.”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올해 43세. 지혁보다 한 살이 어린 그는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다.
솔로 라이프를 즐기고 싶어서가 아니다. 결혼은 하고 싶은데, 중요한 순간마다 이상하게 어그러졌었다.
오늘 교제한 지 6개월 된 그녀에게 청혼할 것이다.
여의도 불꽃축제.
불꽃이 수 놓인 밤하늘을 배경 삼아 멋진 프러포즈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손정진은 비장했다. 이번에도 결혼하지 못하면 이번 생에 아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만나는 애인은 예전 사람들과는 달랐다. 진심으로 그녀와 잘되길 간절히 바랐다.
“오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환하게 손을 흔들며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손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맞았다.
“서연아~ 어서 와.”
하서연. 31세로 손정진과 띠동갑인 그녀는 밝게 웃으며 맞은 편에 앉았다.
“어머, 오빠.”
하서연은 손정진은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오늘 피부 왜 이렇게 좋아 보여요? 뭐 좋은 거 했어요?”
“응? 하하. 글쎄. 어제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어젯밤 피부와 헤어스타일 케어받는 데, 수십만 원을 들였다.
그녀에게 피부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니, 값어치를 한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계속 잠 잘 자야겠다. 너무 멋져요~”
“하하. 고마워.”
하서연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손정진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빠, 나 오늘 너무 기대돼요. 고마워요.”
“······.”
“불꽃축제를 레스토랑에서 보다니. 호호.”
창밖에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수십만의 인파를 보았다.
선도물산의 팀장이 남자친구이기에, 럭셔리한 연애가 가능한 것이다.
“자기 좋아하니, 나도 참 좋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기분 좋은 가을 하늘.
날씨 좋고, 분위기도 좋고.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았다.
‘잘 될 거 같아.’
주머니 속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수십 번도 더 확인했지만, 제자리에 잘 있는지 계속 확인하게 된다.
***
“와~ 맛있겠다~”
음식이 나오자, 하서연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 음식이 너무 예뻐요.”
“하하. 그래?”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손정진은 너무 행복했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일까, 귀여운 조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불꽃놀이는 언제 해요?”
“응~ 좀 있으면 할 거야~ 날 어두워지면 시작하는 거 같더라고.”
불꽃놀이의 식순을 다 외우고 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말했다.
서프라이즈로 준비했기에, 티가 나면 안 된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피이익~ 펑!’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꺅~!”
하서연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31세면 적은 나이는 아닌데, 손정진의 눈에는 마냥 소녀처럼 보였다.
그녀도 손정진 앞에서는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다.
‘피이익~ 펑! 펑!’
“어머~ 너무 멋져.”
두 사람은 식사를 멈추고, 다시 손을 꼭 잡았다.
하서연은 하늘을 수놓은 불꽃을 보느라 정신없었지만, 손정진은 그녀의 얼굴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
얼굴에 비치는 붉고, 푸르며, 노란 불꽃의 잔영.
‘서연아, 사랑한다.’
그녀와 인생 끝까지 함께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또 한번 들었고.
빠직.
어금니를 깨물고, 용기를 내었다.
‘힘내자. 손정진.’
다시 한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지가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한 후.
“서연아.”
“네?”
하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손정진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는 촉이 빠르다. 그가 오늘 뭘 하려는 지 레스토랑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치챘었다.
특히, 평소와 다른 손정진의 물광 피부에서 너무 티가 났다.
“미래는 어두운 하늘 같아서,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찬란한 불빛이 하늘을 수놓은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하나의 불꽃이 되어, 서로의 앞길을 비춰주고, 서로를 위하면서······.”
손정진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했다.
예전 연인들과 중요한 순간에 어그러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풉!”
하지만 하서연은 그런 손정진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만난 지 6개월밖에 안 됐지만, 손정진의 나이를 생각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쉐에엑~ 쾅!’
큰 불꽃 소리에 하서연은 창밖을 바라봤고.
손정진은 어느 타이밍에 반지를 꺼낼지 생각 중이었다.
“오빠! 저기 봐봐요”
“음?”
“올해는 불꽃이 땅에서도 터지네요?”
“하하. 그래?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쉐에엑~ 콰과쾅!’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끼야악-!’
밖의 사람들 소리가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헷갈릴 때.
‘어?!’
손정진은 그제야 창밖을 바라봤고.
‘쉐에엑~!’
여의도 상공에 수많은 전투기가 수놓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