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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62화 (262/301)

외전4. 폐허 속에서도 꽃은 핀다

손정진은 주저앉은 채로 계속 눈물을 쏟아내었고.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정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사람들 기다리잖아.”

경비요원, 홍채 인식 대기 중인 사람들 모두 손정진과 지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손정진은 호흡을 고른 후 말했다.

“회장님,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거 없어. 난 내 직원들 빨리 살리려고 그러는 거뿐이니까. 한 놈이 자꾸 방해해서 속도가 안 나잖아.”

손정진이 난리 쳐서, 진행이 더뎌지고 있음을 말하는 거였고.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짓자, 지혁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해. 결혼할 거라며.”

“아······ 네.”

손정진은 하서연을 보았다.

원래 오늘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계획이었으나, 급박하게 등 떠밀리듯 하는 상황이 미안했다.

하서연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서연아.”

손정진이 입을 열자, 수많은 인파가 몰린 과천 쉘터 앞이 조용해졌다.

“어쩌다 보니, 얘기 꺼내게 됐지만.”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었다.

“사실, 나 오늘 너한테 청혼하려고 했었어.”

꿀꺽.

손정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하서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멋지게 프러포즈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널 사랑하는 건 진심이야.”

“오빠······.”

손정진은 하서연을 향해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결혼해줘. 서연아.”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손정진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괜찮은데?’

손정진은 결혼에 골인했다는 사실이 기뻤고.

프러포즈를 도와준 지혁이 참 고마웠다.

“정진, 축하해. 제수씨도 축하해요.”

지혁이 웃으며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서연은 지혁이 자신을 제수씨라고 부르니 어쩔 줄 몰라 했다.

TV에서나 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 총수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니까.

- 결혼하면 들어갈 수 있는 거야?

- 직원 매수해서 결혼해달라고 할까?

- 이건 좀 편법 같은데.

과천 쉘터에 들어가려고 안달 난 사람들에게는 이 풍경이 기회로 보이기도 했는데.

지혁이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제가 잘 알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한 결혼 서약의 증인입니다.”

손정진과 하서연은 지혁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그리고······ 편법이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좀 들리는데.”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사전에 인증받은 부부관계 외에는 인정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즉, 홍채 인식이 된 사람만 입장할 수 있습니다.”

지혁은 편법의 우려가 있음을 인정하고, 손정진을 마지막 사례로 끝내버렸다.

이 정도면, 대놓고 내 사람 챙기는 거였는데.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선도그룹 회장. 오지혁이니까.

***

손정진과 하서연은 과천 쉘터 안으로 들어갔다.

하서연은 밖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수용소 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와······.”

쉘터 안은 완벽히 정돈되어, 깨끗하고 쾌적했다.

북적거리는 소리도 없고,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옷 갈아입으십시오.”

요원의 지시에 들어오자마자 소독한 후, 탈의실로 안내받았다.

한 공간에 수만 명이 사람들이 살아야 하기에, 방역은 매우 중요하다.

때 묻은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쉘터에서 제공하는 새하얀 옷을 입었다.

“이쪽으로 오셔서 홍채등록 하십시오. 손정진 팀장님 아내분 되시죠?”

CCTV로 바깥 상황을 본 안내요원이 말했다. 선도그룹에서는 지혁이 공표했으면 그게 곧 법이니까.

“아내요?”

하서연은 ‘아내’라는 단어에 어색했으나.

손정진의 얼굴을 한번 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손 팀장님 아내 맞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이쪽 카메라 봐주시면 됩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안내요원이 말했다.

“손 팀장님은 A-52 룸입니다.”

두 사람은 안내받은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하서연은 손정진의 손을 꼭 잡았다.

과천 아울렛을 와본 적이 있는데, 기억하는 모습과 너무 달랐다.

우선, 아울렛을 채우던 각종 물품이 모두 사라졌고.

양 사이드에 투명 유리창으로 개방된 점포들은 철문으로 가려졌다. 철문 정 가운데에는 큰 글씨로 호수가 적혀 있는데.

연립형 단독주택 같았다.

변해버린 아울렛의 환경.

재난 상황 속에 일사불란하게 이곳으로 모인 직원들까지.

“오빠네 회사······ 도대체 뭐야?!”

절로 이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베일에 싸인 회사도 아니고, 전 국민이 다 아는 1등 기업 ‘선도그룹’이다.

그래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하하. 우리 회사가 뭔지 몰라? 선도잖아.”

“아는데······ 진짜 그 선도 맞지?”

쉘터 안의 풍경을 볼수록,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다른 세상.’

밖에는 주검이 널려있고, 사이렌 소리로 난리가 났지만.

이곳은 아주 정숙하고 평화로웠다.

“오지혁 회장님이야.”

“응?”

“서연이도 선도 가족이 되었으니까, 얘기하는 건데.”

“······.”

“오 회장님이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거야. 대단한 분이시지.”

말을 하면서도 손정진의 얼굴에 존경하는 빛이 가득했다.

“아, 그리고 이 얘기했었나?”

“뭐?”

“오 회장님 내 직속 선배님이셔.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거든.”

“······.”

이 얘기는 수십 번도 더 들었다.

자랑스러워서 하는 얘기라 생각하여, 내색하지 않고 또 들어줬다.

‘A-52’

손정진은 문 앞에 도착하여, 홍채 인식을 했다.

위잉-

문이 열리자마자.

“아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달려 나와서 손정진을 안았다.

“아이고 아들~”

어머니는 손정진을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으며.

아버지는 그 뒤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손정진은 아버지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역시, 와 계실 줄 알았다니까요?”

어머니는 손정진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녀석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저도 걱정 많이 했어요~”

“지랄하고 있네.”

어머니는 손정진의 밝은 표정을 보자, 속마음이 여과 없이 나왔다.

“엄마, 아빠 생각하긴 했니? 연락도 없고, 바로 이곳으로 와놓고선.”

손정진은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옆에 며느리 있는데.”

부모님은 하서연을 바라봤다.

CCTV로 바깥 상황을 봤기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다.

“서연아, 인사해. 시부모님.”

하서연은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하서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모님은 활짝 웃으며, 하서연의 손을 잡았다.

“내가 잘 부탁한다~”

“새 아가~ 환영한다~”

부모님의 따뜻한 환대를 받자, 하서연은 눈물이 터졌다.

“흑······.”

자신의 부모님 생각이 난 것이다.

어머니는 말없이 하서연의 등을 쓸어주었고.

아버지와 손정진은 가만히 기다렸다.

한참을 목놓아 울다가, 하서연은 손정진을 보았다.

“오빠, 우리 부모님은 들어올 수 없는 거야?”

“······.”

손정진은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들어오실 수는 있지.”

직원과 배우자의 직계가족까지가 수용범위.

두 사람은 결혼했으니, 하서연의 부모도 자격이 되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이 상황에 다시 나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하서연도 이를 모르지 않기에, 눈물을 쏟았고.

손정진은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나중에 꼭 만나자.”

가능성 없는 말이라도, 때로는 할 필요가 있다.

***

과천 쉘터.

지휘통제실에 세크 위원들이 모였다.

“에이~ 은퇴하려니까, 일이 터지네.”

윤현성 사장이 볼멘소리로 말하자, 허용호 부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윤 사장님,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은퇴 안 했으니까, 쉘터에 입주하는 거죠.”

윤 사장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흠! 뭐, 그거야 그렇지만.”

“하하.”

머리가 새하얀 세크의 위원들.

사십 대에 지혁을 도와 그룹을 성장시키고, 그날을 준비했던 세크 위원들은 어느새 예순이 다 되었다.

고승윤 전무가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 나이에 한창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도 감사해하는 거 아니에요?”

“감사하긴 뭐. 죽도록 일만 했으면 좀 놀아야 하는데······ 놀 때 되니까, 그날이 오네요.”

윤 사장은 입맛을 다시다가, 황성준 실장을 바라봤다.

“황 실장! 회장님 너무 오래 나가계시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그러게요?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일 그렇게 할 거야? 따라갔어야지.”

올해 49세인 황성준 전무는 비서실장직을 맡고 있다.

윤 사장이 비서실장을 꽤 오래 했는데.

나이도 있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통사정하여, 1년 전에 황 실장으로 교체했다.

“저는 따라간다고 했는데, 회장님이 안에서 대기하라고 했거든요?”

“어서 말대답이야? 비서실장이라 이거야?”

10년이 넘게 팀장, 비서실장 등 직속 상사였던 윤 사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황 실장은 가만히 눈을 깔았고.

이 모습을 보며 고 전무와 허 부사장은 깔깔대며 웃었다.

밖은 난리지만, 이들은 아주 태연했다.

10년을 넘게 ‘그날’을 준비한 사람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기에 두려울 게 없었다.

덜컹!

지혁이 지휘통제실로 들어오자, 세크 위원들은 일제히 일어났다.

“앉으세요.”

윤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정진이가 영화 한 편 찍었네요?”

“하하. 그러게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연세도 있으신데, 현역으로 일하시려니 힘드시죠?”

세크 위원들은 뜨끔했다.

‘도청 장치가 있나?’

‘하여간, 귀신이야.’

‘회장님이 어떤 분인지, 깜빡했다.’

민망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고 있자,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초반 정리만 어느 정도 되면, 쉬게 해드릴 테니까요. 조금만 애써주세요.”

“······.”

“지금은 베테랑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다들 건재하실 때 터져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

“대피 상황 보고드립니다.”

대피 계획을 맡은 허 부사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재난 발생 6시간이 지난 현재, 대상자 중 50%가 대피 완료했습니다.”

“······.”

“24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80%까지 완료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혁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계획보다 많은 거죠?”

“네. 시뮬레이션했을 때 75% 정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속도면 80%는 넘길 것 같습니다.”

“흠······.”

“예상보다 직원들이 상황판단도 잘하고, 숙달이 잘 되어 있네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다음 고 전무가 보고했다.

“식량은 이상 없습니다. 당장 배식할 수 있으며, 번데기 양육시설도 이상 없이 가동 중입니다.”

지혁은 황 실장을 바라봤다.

“무기 체계는 어떻습니까?”

“경비요원과 안전요원들에 M4 지급 완료했고요. 입주민들 보급용 무기도 언제든 분출 가능합니다.”

“네. 당분간은 요원들에게만 무기 지급합니다. 입주민은 대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지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이 가동되고 있군요. 잘 준비해주신 덕분에······.”

“회장님.”

윤 사장이 손을 들었다.

“네?”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쉘터 전개 상황은 안 물어보시길래.”

지혁은 쉘터에 대해서는 아까 가장 먼저 보고를 받았었다.

“이상 없는 거 아니에요?”

“전반적으로 잘 전개가 되고 있었습니다만.”

“네.”

“한 곳에서 연락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어디죠?”

윤 사장은 불길한 얼굴로 말했다.

“청주 쉘터입니다.”

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청주 쉘터는 선도전자 반도체 공장 인근에 있는,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쉘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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