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3. 난세에는······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손정진입니다!]
발신자는 분명 윤 사장이었으나, 손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손정진?”
[네! 회장님!]
지혁은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손정진은 지혁이 입사 후 처음으로 받은 후배라서, 각별하게 생각한다.
용건을 떠나서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 반가웠다.
“요즘 손정진이랑 자주 얘기하네?”
[하하. 네, 어쩌다 보니.]
손정진은 수화기 너머로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냐?”
[아, 네. 회장님······ 다름이 아니라.]
출장 중인 걸 알면서, 전화할 정도면 급한 일일 거로 생각했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얘기해.”
[저······ 밖에 좀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안돼.”
지혁은 듣자마자,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고.
[네?]
손정진은 당황하여 반문했다.
“못 들었어? 안 된다고.”
[······.]
“전화 끊는다.”
[자, 잠깐만요! 회장님!]
손정진은 전화를 끊으려는 지혁을 다급하게 막았다.
“너가 그룹 회장을 막아?”
지혁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손정진은 살이 떨렸다.
아무리 지혁이 편하게 대해도, 손정진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룹 회장인 데다가, 맞선임이니까.
[회장님, 죄송합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얘기라도 한번 들어주시면······.]
“알았어. 1분 준다.”
지혁은 시종일관 장난스럽게 말했고.
[네! 회장님!]
손정진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싹 긴장하여 대답했다.
[장인, 장모님이 밖에 계시거든요. 아시다시피 갑자기 결혼한 사이라 아내는 부모님과 생이별을 했고, 쉘터로 들어와서 내내 울기만 하는데······.]
짧게 하라고 했으나, 손정진은 구구절절이 얘기했고.
툴툴거리던 것과는 달리 지혁은 그의 얘기를 다 들어주었다.
[하아······ 회장님,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기야 하겠지만, 아내에게 큰 상처로 남을 것 같고요.]
지혁은 얘기를 들은 후 심각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내 일이라면······.’
애처가로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손정진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수아가 밥도 못 먹고 며칠 내내 울고만 있다면, 지혁은 당장 나갔을 것이다.
“꼭 가야겠냐?”
[네, 회장님. 저도 바깥 위험한 거 압니다. 많이 고민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실전 경험이 없는 손정진을 혼자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일에 경비요원을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연 없는 사람이 한둘이겠어.’
지혁은 고민하다가 물었다.
“처가가 창동이라고?”
[네, 회장님.]
“그럼, 중간지점에서 만나.”
[네?!]
“하천 따라 이동해라. 시가지는 위험하니까. 중랑천 따라 올라가다가 군자교에서 만나는 거로 해.”
[아니······ 회장님께서 왜······.]
“과천 가는 길에 창동 들렀다 가는 거야.”
진짜 속뜻은 그게 아니란 걸 안다.
과천과 반대쪽인 창동을 거쳐서 간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제 개인적인 일에 회장님을 위험하게······.]
“알아. 위험해서 그러는 거야. 명령이니까, 그냥 따라.”
[명령······ 아, 네 알겠습니다.]
손정진은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러니 좋아할 수밖에.’
예나 지금이나, 손정진은 지혁의 광팬이다.
“정진아, 군자교까지 혼자 올 수 있겠어?”
[네, 갈 수 있습니다.]
“밖에 매우 위험하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나 만나면, 그때부턴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와.”
[······.]
“지금 내가 너무 피곤해서, 내일 만나는 거로 하자. 하루 정도는 괜찮지?”
손정진은 감동으로 감정이 차오른 상태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내일 군자교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우와악!
- 안돼! 내 패찰 내놔!
- 죽기 싫으면 손 떼!
구미 쉘터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3만 명이 뒤섞여, 직원 패찰을 뺏고 빼앗기지 않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선도직원을 구분하려던 안태욱의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외부인과 선도직원은 완전히 섞여서, 패찰을 든 사람도 선도직원이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씨발······.’
안태욱의 동공이 흔들렸다.
완전히 멘탈이 붕괴되었다.
뭐라도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언가에 쫓기듯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뒤에는 철벽.’
구미 쉘터의 문은 완벽히 잠겨 있고.
이 상태로는 구미뿐만 아니라, 그 어떤 쉘터에서도 이 무리를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선도’의 성격을 잃어버린 행렬이었기에.
‘어떡하지.’
구미 쉘터에서는 멀리 떨어진 개활지를 바라보았다.
답도 안 나오고, 이 압박감에서 차라리 도망가고 싶었다.
완전히 망가져 버린 상황 속에, 그저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좀 도와줬으면.’
안태욱은 발걸음이 점점 무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어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인류 행복 실현하는 큰 뜻을 품고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 아수라장에서 노래는 어울리지 않기에, 소란스러운 상황임에도 노랫소리는 뚜렷하게 들렸다.
♬용기와 지혜를 한데 모아서
♬희망의 꿈 펼치자 우리는 한 가족
‘희망의 노래’
선도직원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선도 사가’인 ‘희망의 노래’. 입문 교육 때 배우며, 매일 업무 시작 시에 나오는 곡이다.
직원 가족들 또한 알고 있다.
‘그날’을 준비하며 자전거 및 생존술을 배울 때 선도그룹의 기본소양도 몇가지 익히는데, 그 중 하나가 ‘희망의 노래’였다.
♬아~ 선도~ 선도~ 언제나 높이 솟아오르자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노래가 어느덧 퍼져갔고.
“더 크게!”
♬아~ 선도~ 선도~ 온 누리 밝히는 빛이 되리라
“계속 노래 부르면서 철벽 쪽으로 붙으세요!”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남자는 이십 대로 보이는 앳된 얼굴에 피부가 하얀 청년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선도전자 반도체 사업부 영업 1팀 심우민 사원이라고 합니다!”
선도직원들이 믿지 못할까 봐, 신원부터 밝혔다.
“선배님들! 제가 잠시 통제하겠습니다! 크게 노래 부르면서 벽 쪽으로 붙으세요!”
♬아~ 선도~ 선도~ 언제나 높이 솟아오르자
노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리에 끼지 못했고.
‘희망의 노래’로 인해 조금씩 외부인과 구분되기 시작했다.
젊은 사원의 지시임에도 의외로 직원들은 말을 잘 따랐다.
이 혼란 속에서도 유일하게 정신 차리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모두 무기 꺼내세요!”
심우민은 앞장서서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오 회장 호신술 교육의 영향으로, 몸에 간단한 무기는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밀집대형!”
직원들은 심우민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특임대원들도 그의 지시를 따랐다.
“노래 계속 크게 부르세요!”
♬아~ 선도~ 선도~ 온 누리 밝히는 빛이 되리라
어느 정도 무리가 구분되었으나, 아직 외부인이 좀 섞여 있었다.
“지금부터 양옆 사람과 마주 보며 노래 부르세요! 못 부르는 사람 있으면 밖으로 밀쳐냅니다!”
선도직원이 ‘희망의 노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못 부르면 외부인인 것이다.
“밀쳐도 안 나가면 공격하세요! 안 그러면 우리 다 죽습니다!”
외부인들이 빠져나갈수록, 노랫소리는 더 단단해졌으며.
그럴수록 선도직원들 사이에 숨은 외부인은 더 쉽게 티가 났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어느 정도 무리가 구분되었다는 확신이 들자, 심우민은 신속히 명령했다.
“대리급 이하! 남성분들! 앞쪽에 2오 횡대로 밀집하세요! 외부인들 못 들어오게 막는 겁니다!”
- 우와~!
사원, 대리 남자들이 인간 벽을 만들어 외부인들을 막기 시작하자.
심우민은 지체하지 않고, 구미 쉘터 철벽을 향해 소리쳤다.
“문 개방하세요!”
[······.]
♬희망의 꿈 펼치자 우리는 한 가족
“어서 개방해!”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심우민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문 열라고! 개새끼들아! 씨발, 너희들 가족들이 이러고 있어도 못 본척할래!”
[······.]
“구분했잖아! 빨리 문 열어!”
심우민은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아무 반응이 없던 구미 쉘터의 확성기에서, 드디어 소리가 나왔다.
[외부인에게 밀리면 바로 닫을 겁니다.]
위잉-
철문이 개방되고, 총을 든 경비요원들이 안에서 나타나자.
- 우와아~!
살았다는 안도감에 선도직원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심우민은 그 와중에도 기뻐하기보다는 직원들이 신속히 홍채인식 하도록 독려했다.
“빨리 움직이세요!”
- 심우민! 심우민!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외부인들은 점점 무리에서 멀어졌다.
- 심우민! 심우민!
선도그룹에서 지혁과 오진원 외에, 이 정도로 환호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아~ 선도~ 선도~ 언제나 높이 솟아오르자
♬아~ 선도~ 선도~ 온 누리 밝히는 빛이 되리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사람.
하지만 직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 죽을 위기에서 살아났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니까.
***
지혁은 24시간 내내 잠만 잤다.
‘그날’ 이후 거의 잠을 못 잔 데다가, 청주 쉘터 구출 작전으로 며칠간 강행군을 계속했다.
거의 일주일이 넘는 동안 잠을 못 잔 것이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난 뒤, 곧바로 지휘통제실로 향했다.
구리 쉘터장이 웃으며 지혁을 맞았다.
“회장님, 이제야 생기가 도시네요.”
어제는 얼굴에 피칠을 한 데다가, 잠을 못 자 눈은 퀭해서 좀비 같아 보였었다.
“네,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 해요.”
지혁은 짧게 하품하고 물었다.
“별일 없죠?”
“주무시고 계실 때 과천 쉘터 지휘부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럼 깨우시지.”
쉘터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몸에 탈 납니다. 회장님도 마흔이 넘으셨잖아요.”
쉘터장은 지혁이 삼십 대 때 만났었다.
어느덧 지혁도 마흔 중반의 나이.
관리를 잘하여 웬만한 젊은이보다 건강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지혁은 헛기침하고 말했다.
“흠! 지금 연결해주시죠.”
잠시 후.
[회장님!]
윤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별일 없죠?”
[저희야 뭐 별일 있겠습니까? 회장님은 괜찮으세요? 구리 시가지가 난리 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일이 커졌었네요. 왜 전화했었어요?”
[아······ 네. 다름이 아니라. 국방부 합참에서 회장님과 통화를 원해서요.]
“······.”
[무시할까 하다가······ 지금은 상황을 고려했을 때 대화를 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쉘터는 아직 폐쇄되기 전이기에, 국방부를 조심해 할 필요가 있었다.
“네, 바꿔주세요.”
뚜뚜-
딸깍.
[아아. 들리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선도그룹 오지혁 회장입니다.”
[네, 합참차장 유진기 중장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물었다.
[선도그룹이 좀 이상한 걸 하던데······.]
“······.”
[궁금한 게 많지만, 이것부터 묻겠습니다. 명확하게 대답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당신은 적입니까? 아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