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75화 (275/301)

외전17. 존경으로 부족하다 (2)

넓은 어깨에 하얀 얼굴.

선비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강인함이 느껴지는 한 청년이 화면에 나타났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심우민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90도 각도로 깍듯이 인사했다.

- 짝짝짝.

지혁은 인사 대신 박수를 쳤으며.

함께 있는 세크 위원들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그가 아니었다면, 1만 명이 정처 없이 떠돌 뻔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도와준 사람 없이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거였다.

“심우민 씨, 반가워요. 큰일 하셨다고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 한 것뿐입니다.]

- 심우민! 심우민!

수화기 너머로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구미 쉘터에 입성한 지 꽤 되었으나, 여전히 직원들은 심우민의 활약에 흥분되어 있었다.

청주 쉘터 이주민뿐만이 아니라, 구미에 있던 직원들 또한 심우민을 특별하게 봤다.

지혁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웬만해선 사람에게 탄복하지 않는데. 이번엔 어쩔 수가 없네요. 어떤 직원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말은 이렇지만, 지혁은 단순히 얼굴이나 보려고 심우민과 영상통화 하는 게 아니었다.

“겁나지 않았어요? ‘희망의 노래’로 직원 구분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요?”

지혁은 그의 가치를 평가하려 했다. 운인지 실력인지 말이다.

[그냥 답답했습니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희망의 노래’는 우연히 떠오른 거였습니다.]

“뭐가 그렇게 답답했나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심우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청주 쉘터 뺏긴 게 가장 큽니다.]

.

.

.

.

지휘통제실 분위기가 싸해졌고.

세크 위원들은 지혁의 눈치를 보았다.

청주 쉘터를 구하러 갔으나, 결론적으로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속뜻은 어떨지 몰라도, 심우민의 말 자체는 지혁에게 기습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러나, 지혁은 웃고 있었다.

[불편하시다면, 그만할까요?]

심우민은 분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재밌네.”

지혁은 얘기를 듣겠다는 듯 턱을 괴었고.

심우민은 눈꼬리를 올리고 계속 말했다.

“구경만 할 거면 왜 왔나 싶었습니다.”

[······.]

“청주 쉘터를 뺏기고, 3만 명의 이주민이 생겼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동하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죠. 완전한 작전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말하면서 감정이 올라오는지, 심우민의 목소리는 점점 격양되었다.

“구미 쉘터로 온 이주민들이 부랑자가 될 뻔한 것도.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죠. 어차피 입을 피해인데, 청주에서 과감하게 행동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감히 회장님한테······.’

‘목숨 걸고 구하러 갔는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나서주는 그룹 회장이 어딨어?’

세크 위원들은 화가 났으나.

“대답을 듣고 싶나?”

지혁의 여전히 웃고 있었으며, 말투가 바뀌었다.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물론 대답은 듣고 싶습니다.]

“간단하다.”

[······.]

“그 상황에서 내린 내 판단이야. 난 그게 최선이라 여겼어.”

심우민과 달리 지혁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기습공격했으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피해가 덜했을까?”

[······.]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용의주도하게 쉘터를 뺏을 준비를 한 사람들이야. 난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여, 그 선택을 한 거야.”

지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맞을 수도, 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은 모른다.”

[······.]

“리더가 되어 그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다르게 가 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자네는 그 모든 걸 봤지. 좋은 경험으로 쌓였길 바래.”

‘리더?’

신입사원에게 포부를 가지라는 뜻으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윤 사장에게는 이 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다.

지혁은 웃으며 화면을 보았다.

“답이 되었나?”

[네, 회장님.]

***

‘짜식, 아주 똑 부러지네. 배짱도 좋고.’

지혁은 괜찮은 인재를 만난 것 같아서 아주 흡족했다.

‘이마의 색만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심우민의 화면 속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외모가 낯익단 말이야.’

지혁은 웬만해선 한번 본 사람은 잊지 않는다.

심우민은 처음 본 게 확실하지만, 어딘가 익숙했다.

“심우민 씨.”

[네, 회장님.]

“혹시······ 나와 마주친 적이 있나? 아니면 가까운 분 중에 나와 관계되는 사람이라도?”

심우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있구나.’

지혁은 그의 표정 변화를 보며,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니, 뭐든 얘기해 봐.”

심우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가······ 선도그룹 직원이셨고, 회장님과 함께 근무했었습니다.]

‘아······.’

이 말을 들으니 지혁은 바로 한 남자가 떠올랐고, 심우민의 얼굴에 오버랩 되었다.

[심원석 부장이 제 아버지 되십니다.]

윤 사장과 황 실장은 깜짝 놀랐다.

‘심 부장님 아들이라고?!’

‘헐······ 대박!’

‘어쩐지, 분위기가 좀 익숙하다 싶었는데.’

심원석 부장.

지혁이 선도물산에 입사하여 처음 만난 팀장.

회사 생활의 쓴맛을 알게 해준 사람이다.

‘그 세계’에 가기 전에 심 팀장 덕분에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경험했었고.

‘그 세계’에서 돌아오자마자, 심 팀장부터 보내버렸었다.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낯익다 싶었는데, 심 부장 아들이었구나. 아버지 많이 닮았네.”

심우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지혁과 심 부장과의 관계를 잘 아는 윤 사장과 황 실장은 개운치 않은 얼굴이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쟤는 왜 하고많은 회사 중에 선도그룹에 들어온 거야.’

원수와 원수의 아들이 만난 듯한 모습.

나중에 풀긴 했지만.

심 부장은 지혁 덕분에 자리에서 쫓겨나서, 말년에 여러 부서 전전하다가 회사를 떠났다.

“아버지와 나와의 사연은 알고 있나?”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

지혁은 심우민의 당돌한 대답이 재밌어서 피식 웃었고.

윤 사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나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겠네?”

지혁은 훅 들어갔고.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하하.”

심우민의 답변에 지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심 부장이 아들 잘 키웠네.’

강단도 있고, 센스도 있어 보였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든 상관없다. 일만 잘하면 돼.”

[······.]

“빨리 만나보고 싶군. 기회가 되면, 과천 쉘터에 왔으면 좋겠어.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시 한번 큰일 해줘서 고맙고. 조만간 특진 있을 거야. 심 대리. 꼭 보자고.”

심우민 대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

A-52 룸.

“계십니까~”

지혁은 벨을 눌렀고.

룸 안에서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손정진이 맨발로 나와서 인사했다.

“들어가도 돼?”

“물론입니다. 들어오십시오.”

손정진은 룸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쳤다.

“회장님 오셨어요!”

그의 가족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인사했다.

-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 감사합니다! 회장님!

-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인사하러 나온 하서연은 지혁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제수씨, 부모님 만나서 좋으시죠?”

“······ 죄송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슬픔에 잠겨 이성을 잃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남편과 지혁을 위험에 두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부모님은 어디 계세요? 올 때 고생하셔서 괜찮으신가 싶어서 와본 건데.”

“네, 이쪽으로.”

지혁은 하서연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손정진의 장인과 장모는 엎드려서 누워있었다.

장인은 상체를 살짝 일으키며 말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작은 유모차에서 다리 올리고, 엉덩이만 걸친 상태로 1시간을 달렸다.

항문이 아파서 똑바로 천장 보고 눕는 것도 힘들었다.

“하하. 아닙니다. 편안하게 모시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장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명의 은인이시며, 딸을 만나게 해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데요.”

장모도 고통을 참으며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회장님.”

손정진과 하서연은 옆에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자, 인생의 은인.

두 사람은 지혁에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제수씨.”

“네. 회장님.”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손 팀장 할 일이 많아질 수 있거든요? 야근과 출장이 잦아도 이해해주세요.”

하서연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못 하면 사람이 아니죠. 알겠습니다.”

그녀는 손정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자기야, 일 열심히 해. 회사 일이라면 다 이해해줄게.”

“응? 어······ 고마워.”

손정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이게 고마워할 일인가.’

지혁은 손정진의 어깨를 만지며 말했다.

“손 팀장, 우리 일 좀 하자?”

손정진은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뭐든, 말씀만 주십시오! 죽을힘을 다해서 하겠습니다!”

손정진은 지혁이 죽으라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다.

***

긴 출장 끝에 오랜만에 돌아온 집.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문을 열고 소리쳤다.

“자기야~ 나왔어!”

후다닥.

집 안에서 빠른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수아가 나타났다.

“하하~ 오랜만에 보니까 되게 반갑······.”

찰싹!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야! 오지혁!”

찰싹! 찰싹!

사정없이 등짝을 때리며, 수아는 소리쳤다.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그 위험한 곳을 가면서 말도 안 하고 가?!”

“왜 말을 안 해. 출장 간다고 했잖아.”

찰싹! 찰싹!

“야! 그게 출장이야? 죽음의 출장이냐?”

등짝을 때리며 수아의 눈가는 젖어 있었는데, 안도감 때문인지 표정은 밝았다.

지혁은 등짝을 때리던 수아의 손을 잡았다.

“나 멀쩡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눈이 마주치며, 스파크가 일려고 하는데.

“다녀오셨어요?”

시안이 다가왔다.

“어, 시안아. 흠! 자식. 인기척 좀 낼 것이지.”

지혁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던 손을 황급히 멈췄다.

“와······ 아빠 멋있어요.”

시안은 지혁의 팔뚝에 길게 베인 상처 자국을 만지며 말했다.

“역시, 남자는 상처가 있어야 간지가 나죠.”

“하하. 녀석. 아는구나?”

수아는 두 남자의 대화가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또 출장 가기만 해봐.”

수아가 팔짱을 끼고 째려봤는데.

지혁은 웃으며 대꾸했다.

“당분간은 없을 거야. 지금은 쥐새끼를 잡아야 해서.”

“쥐새끼? 쉘터에 쥐가 있어?”

지혁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있는 거 같더라고. 깡그리 잡아다가 족쳐야지.”

수아는 지혁이 진짜 ‘쥐’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어쨌든, 쉘터 안에서도 위험한 건 하지 마.”

지혁은 시안을 바라봤다.

“시안아, 좀 일찍 잘까? 아빠가 출장을 오래 갔다 와서 피곤하구나.”

“네, 주무세요.”

시안은 인사 후에 방 밖으로 나갔고.

수아는 시계를 보았다.

“뭐야? 이제 8시인데? 벌써 자려고?”

지혁은 바지를 벗으며 말했다.

“긴 밤을 보내고 싶네.”

“어머.”

수아는 지혁의 눈빛을 읽고 미소지었다.

생존과 전투만이 본능은 아니다.

위험에 노출될수록 종족 번식의 본능은 강해진다.

그들은······ 본능에 충실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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