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8. 기일 >
토요일 아침.
“아~ 개운하다.”
지혁은 기지개를 켜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몸 제대로 풀었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어어. 있었냐?”
시안이 부엌에서 나왔다.
“방금 일어나신 거 아니에요? 운동 나갔다 오셨어요?”
지혁은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고, 기분 좋아서 혼잣말 한 거였는데.
시안이 있는 줄은 몰랐다.
“흠! 언제 일어났냐?”
대답 대신 주제를 돌렸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밥은 먹었어?”
“간단하게 빵 한 조각 먹었어요. 아빠도 드려요?”
“그래, 다오.”
“앉으세요.”
수아는 아직 뻗어서 자는 중이었고.
시안이 아침밥을 챙겨주자, 지혁은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아빠 밥을 다 챙겨주고.”
“뭘요. 오랜만에 운동 좀 하게 많이 드세요.”
“운동?”
“저랑 캐치볼 해요. 요즘 아빠 너무 바빴어요. 오늘 휴일이잖아요.”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 아빠 운동시키려고 아침 차려주는 거였구나?”
시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 거죠. 든든하게 많이 드세요.”
쉘터 동쪽에 있는 간이 운동장으로 나왔다.
팡!
지혁은 시안의 볼을 받으며 생각했다.
‘공이 더 세졌네. 성장 중이라 그런가. 할 때마다 다르구나.’
팡!
시안은 지혁의 공을 받은 후,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최근에 운동 많이 하셨어요?”
“아빠 출장 갔다 왔잖아. 운동은 무슨.”
“이상하네······ 공이 훨씬 세진 거 같은데요?”
그날 이후로, 지혁은 바깥 일이 많아지다 보니 체력이 좋아졌다.
팡!
팡!
두 사람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캐치볼에만 집중했고.
“휴~ 좀 쉬었다 하자.”
“네.”
땀에 흠뻑 젖어서, 물을 마시며 한숨을 돌렸다.
시안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아빠랑 해야 재밌어요.”
“너 아빠 나이 들어도 놀아줘야 해. 그때 가서 재미없다고 모른척하면 안 된다.”
“하하. 그럴 리가요. 우리 아빠는 절대 나이 안 드실 것 같은데.”
사십 대 중반이지만, 이십 대 못지않은 탄탄한 체격을 가졌으며.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선도그룹 직원들에게 추앙받는, 참 배울 게 많은 아버지를 시안은 진심으로 존경했다.
“요즘 학교 나가니?”
“아직이요. 다음 주부터 다닐 것 같아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아빠.”
“응?”
“저 여기서 몇 살까지 학교 다녀야 해요?”
시안의 현재 나이는 12살.
어느 정도는 알 만큼 아는 나이다.
이곳에 오랜 시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묻는 거였다.
“글쎄다.”
지혁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근거 없는 희망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초중고는 여기서 졸업하지 않을까? 대학교까지는 모르겠구나.”
쉘터 안에는 하나의 교육시설이 있고, 그 안에서 초중고, 대학 과정을 분반하여 가르친다.
“답답해요.”
시안은 한숨을 쉬었다.
원체 활발하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한 공간에 10년 이상 있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답답했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잖냐.”
“아빠는 나갔다 오시잖아요.”
시안은 아직 아물지 않은 지혁의 팔뚝 상처를 부러운 듯 보며 말했다.
“저도 이런 흉터 갖고 싶어요.”
“시안아.”
시안은 어릴 적부터 과할 정도로 모험적이었다.
“아직 어려. 더 크면······.”
“나이보단 실력 아니에요?”
시안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가 어른 이길 실력이 되면, 특임대원으로 써주실래요?”
“하, 참나.”
12살 먹은 아들이 이런 말을 하니, 황당하기보다는 귀여웠다.
“아빠는 공정하신 분이잖아요. 기회 주셔야 해요.”
콩.
지혁은 가볍게 시안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일 큰할아버지 기일인 거 알고 있지?”
“알아요.”
“아빠랑 갈 거니까, 저녁때 딴 데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
토요일 오후.
탁! 탁!
윤 사장과 황 실장은 구슬땀을 흘리며 탁구를 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발이 느려?”
“발이 느린 게 아니라, 형님이 자꾸 구석으로 치는 거거든요?”
회사 선후배지만 서로 워낙 친해서, 휴일에 밖에서 볼 때면 형, 동생처럼 편하게 지낸다.
“엇!”
윤 사장은 못 볼 걸 본 듯. 황급히 탁구공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세요?”
“야야. 숙여. 숙여.”
“네?”
황 실장은 윤 사장의 시선이 갔던 곳을 돌아봤다가.
“헛!”
지혁의 얼굴을 보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눈 마주쳤어?”
윤 사장의 물음에 황 실장은 목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숨죽이고 있는데.
“하하!”
낯익은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도 좀 불러주시지?”
지혁은 황 실장에게 다가가 어깨동무했다.
“성준이 형. 예전엔 저한테 안 그랬잖아요?”
“하아······ 회장님. 제발 형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형을 형이라 못 부릅니까.”
윤 사장은 인상을 쓰며 입맛을 다셨다.
“회장님, 딱 보면 모르십니까. 눈치 좀 챙기셔야죠. 휴일엔 직원들 편하게 해주세요~”
“누가 뭐랍니까? 편하게 같이 놀아요~ 내가 다 사줄 테니까.”
지혁은 탁구채를 들고 윤 사장 맞은편에 섰다.
“잠깐 보니까, 선배님 탁구 잘 치시던데, 저랑 한번 붙어보시죠~”
윤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회장님······ 말씀드렸잖아요. 선배님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예전과 달랐다.
윤 사장도 이제는 지혁이 너무 어려웠다.
“그럼, 형님이라 부를까요? 드디어 호형호제를 허하시는 겁니까?”
“하아······ 제발.”
“하하!”
지혁은 윤 사장이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뭐해요? 어서 받으세요! 서브 갑니다~”
그 이후로.
게임을 수십 번 했다.
지혁의 기본 체력 자체가 일반인들과 다르므로, 윤 사장과 황 실장은 죽을 맛이었다.
‘내가 다시는 회장님과 같이 운동 안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윤 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쉘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자~ 한잔하시죠.”
겨우 운동을 끝내고, 탁구장 옆의 호프로 왔다.
“맛 괜찮네?”
식량 개발을 맡은 고 전무는 도수가 낮고 가벼운 음료 몇 가지를 개발했는데.
그중 하나가 ‘곤충맥주’였다.
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요. 맥주랑 맛 차이 크게 안 나는데요?”
“뭐로 만든 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지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묻자.
벌레를 끔찍이 싫어하는 윤 사장은 귀를 막았다.
“하지 마세요. 저 이건 진짜 진지합니다.”
“하하. 알았어요. 말씀 안 드릴게요.”
세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어제 그 친구 진짜 대단하지 않아요? 심우민?”
대화의 가장 큰 화제는 심우민이었다.
‘심우민······.’
지혁이 그의 이름을 꺼내자, 윤 사장의 눈빛이 변했다. 누구보다 지혁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우려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회장님. 젊은 친구가 대단하긴 한데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요?”
지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회장님을 원수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
“가능성 있는 얘기입니다. 아버지가 심 부장이에요.”
윤 사장은 심우민에게서 곱지 않은 눈빛을 읽었었고, 그건 황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회장님, 저도 윤 사장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예의주시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서 빨리 직접 봤으면 좋겠다고 한 거예요.”
‘이마의 색을 보면 알게 될 테니까.’
이런 세계에서는 불특정한 사람과 힘을 합쳐야 할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마의 색을 보는 건 평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용한 능력이다.
“걱정되면 빨리 제 눈앞에 데려오세요. 나도 궁금하니까.”
윤 사장과 황 실장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해 하는데.
쭉-
지혁은 잔을 비우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악의 따위가 뭐가 중요합니까. 내 목표에 반하지만 않고, 일 잘하면 그만이죠.”
***
일요일 저녁.
A-1 룸.
지혁의 가족들은 쉘터에서 가장 거대한 룸 앞에 섰다.
딩동!
철컥.
문이 열렸고, 오진원이 나와서 지혁과 가족들을 맞아주었다.
“왔니? 안녕하세요. 작은어머니, 제수씨. 시안아~ 어서 와라.”
오진원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검은 옷을 입은 큰집 가족들이 성경책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 명예회장의 기일.
제사가 아닌 추도예배로 진행한다.
오 명예회장은 종교가 없었는데, 큰어머니가 교회를 다녀서 기독교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었다.
지혁이 인사했다.
“큰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와라.”
아픈 사람처럼 안색이 어둡고 안 좋아 보여서,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는데.
오진양은 지혁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왔으면 어서 이쪽에 서라.”
추도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지혁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형님, 혜빈 누나 안 왔는데요?”
지혁의 물음에 큰어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쏟았고.
‘어? 설마······.’
오진원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지혁아, 그 얘기는 추도예배 끝나고 하자.”
“······.”
장남인 오진양이 예배를 주도했다.
“지금부터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추모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추모예배 시작부터 큰어머니는 통곡했다.
오 명예회장이 사망했을 때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었다.
‘혜빈 누나한테 무슨 일이 있나 보네.’
오진원이 조금도 내색을 안 했었고, 지혁은 회사 일 챙기느라 신경을 못 썼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 흑.흑.
큰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커졌고, 오진양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예배를 이어갔다.
“인생은 나그넷길이요. 아침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으며, 육체는 풀과 같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이슬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육체는 죽으나······.”
예배 중 ‘죽음’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큰어머니의 곡소리는 심해졌다.
***
추도예배가 끝나자마자, 지혁은 오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아직 쉘터에 안 왔어.”
그날이 터지는지 일주일이 넘었다.
이쯤 되었으면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왜 얘기 안 했어요?”
“사적인 일이잖아.”
지혁은 답답해서 오진원을 향해 말했다.
“형님. 사적인 일이 아니죠. 오너일가의 일은 회사에 영향을 끼치는데.”
“······.”
쉘터에 못 온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오진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각한 것이다. 모두가 겪는 비극인데, 오너일가라 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지혁은 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누나 위성폰 있잖아요.”
“연락이 안 돼.”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형님, 회사 정보실에 위성폰 번호 알려주고, 위치추적 하라고 해주세요.”
오진원의 내켜 하지 않는 표정을 보며, 지혁은 힘주어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적인 일 아닙니다. 이건 회장으로서의 지시에요.”
“알았어. 요청할게.”
옆에서 함께 얘기 듣던 오진양도 오진원을 따라서 나가려는데.
“진양 형님.”
“음?”
“잠깐만요.”
방에 지혁과 오진양만 남게 되자, 오진양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뭔데? 빨리 말해.”
“추대웅 이사와 연락하고 지내세요?”
“뭐?!”
오진양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오진양도 청주 쉘터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다.
선도그룹 직원 중에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야.”
“정말 아니죠?”
“아니라니까. 추 이사와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어.”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아니길 바래요.”
그리고, 오진양을 무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제가······ 쥐새끼를 정말 싫어하거든요.”
지혁이 ‘그 세계’에서 살아남았던 철칙 중 하나.
‘배신자에게 자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