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19. 협박의 대가 (1) >
그래도 지혁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고, 오진양은 확신했다.
‘진짜 날 의심하고 있네.’
분명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관찰당하는 기분이었다.
오진양은 지혁이 묻지도 않았음에도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정말 아니다. 추 이사와 연락 안 해.”
“그럼 누군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생각해보세요. 저는 형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
“추 이사가 형님의 심복이었잖아요?”
몇 마디 더 나눠보니, 지금 사실을 확인하려고 묻는 게 아니라 범인으로 지목하고 취조하는 거였다.
“와, 미치겠네. 내가 아니라잖아!”
“범인이 쉽게 자백하겠어요? 당연히 아니라고 하지.”
지혁은 심지어 대놓고 말했고, 오진양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범인?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
“내가 경영진에서 물러난 뒤, 수상한 짓을 벌인 적이 있었냐? 네가 내 손발 다 잘랐고, 죽은 듯이 지냈잖아?”
“한방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한 것일 수도 있죠.”
오진양은 지혁의 머릿속에는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이 되어 있었다.
억울한 마음에 오진양은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지혁은 꿈쩍도 안 했다.
‘못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진양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형님이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너, 진짜!”
“······.”
“왜 결백을 입증해야 하는데? 내가 현장에 있었어? 아니면 접촉했다는 증거가 있어?”
“······.”
“너무 하잖아. 이런 법이 어딨어?”
“법은 없어요.”
지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요? 이거 기회를 드리는 건데.”
“······.”
“형님은 스스로를 일반인과 비교하면 안 돼요. 꼭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씀드려야 알아들으세요? 왜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세요?”
오진양은 질린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일반인이 아니면 뭐야? 내가 범죄자라는 거야?’
오너일가의 장남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내쳐졌을 사람이었다.
오 명예회장과의 약속 때문에 오진양을 선도그룹 내에 두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형님이 아니라는 증거를 가져오든가, 아니면 의심되는 사람을 지목하세요.”
“누명을 벗고 싶으면 직접 진범을 잡으라는 거야?”
오진양은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으나, 더 불만 섞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혁의 표정을 보니,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뭘 주장하든, 증거가 있어야 해요. 심증도 인정합니다. 단, 나중에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지면, 가중처벌도 고려하셔야 할 거예요.”
오진양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나가서 살까.’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나를 범인으로 몰고, 직접 누명을 벗으라니. 이건, 정말······.”
“업보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을 잘 사귀었어야죠.”
“······.”
“왜 추 이사 같은 거랑 가까이 지냈어요?”
추 이사를 말할 때, 지혁의 표정은 무섭게 변했다.
얼굴에 독기가 잔뜩 오른 모습.
꿀꺽.
오진양은 순간 느껴진 엄청난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얘기는 끝났고, 지혁은 방문을 열면서 말했다.
“형님, 저 빈말 안 하는 거 아시죠?”
“······.”
“시간 오래 못 드립니다.”
***
오 명예회장 추도예배가 끝나자마자, 오진원은 정보실에 오혜빈의 위치 추적을 요청했고.
지혁이 집으로 떠나기 전에 말했다.
“혜빈이 위치 확인됐는데, 내일 얘기할까?”
지혁은 수아와 시안에게는 집으로 먼저 가 있으라고 한 후.
“지휘통제실 가서 얘기 하시죠.”
지휘통제실에는 상황 근무자가 대기 중이었다.
“화면에 지도 좀 띄워줄래요?”
“네!”
메인 화면에 지도를 보며, 지혁이 물었다.
“속리산 인근이라고요?”
“어.”
“웬 속리산?”
정보실에서 오혜빈의 위성폰 위치를 확인한 곳은 속리산이었다.
“그날이 터진 게 토요일이었잖아. 주말이라서 가족들과 간 것 같아.”
“아······.”
“최근에 혜빈이가 캠핑 자주 다녔거든, 딸이 좋아한다고.”
지혁이 물었다.
“그러면······ 매형이랑 아윤이도······.”
“맞아. 처남 위성폰도 같이 확인해봤는데. 같은 위치야. 아윤이도 당연히 함께 있었겠지.”
오혜빈은 뒤늦게 딸을 얻었는데, 이름은 정아윤이며 올해 6살이다.
오 명예회장의 직계자손 중 유일한 손주다.
“속리산······ 너무 먼데.”
평시에 고속도로로 간다면 2시간 반 정도의 거리지만.
포탄으로 인해 도로 상태가 안 좋은 데다가, 위험 요소가 많아서 반나절 이상은 각오해야 한다.
“좌표 받았어요?”
“어, 잠깐만.”
오진원이 불러준 좌표를 상황 근무자가 입력하였고.
띡! 띡!
화면에 좌표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되었다.
“저기가 어디야?”
위성 사진으로 변환하여 확대해 봤더니, 여러 천막이 보였고.
오진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캠핑장이네. 그나마 다행 아니야? 산속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안도하는 오진원과 달리, ‘캠핑장’이라는 말을 듣고 지혁의 표정은 확 굳어졌다.
‘엿됐네.’
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협력하여 잘 지내는 건 아주 좋은 리더가 있거나, 모든 게 풍족할 때 가능한 일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강자가 군림하고, 약자는 빼앗긴다.
‘매형은 일만 할 줄 아는 사람이고, 누나는 이쁘고, 아윤이는 6살······.’
위성 사진 속 캠핑장 옆 주차장에 차가 꽉 차 있었다.
‘사람 많은 곳에 여자 둘과 전투력이 없는 남성.’
위기 상황이었다.
‘누나와 아윤이가 위험하다.’
지혁은 다급한 목소리로 비상 근무자에게 말했다.
“세크 위원들 지금 소집하세요.”
***
자정이 넘은 시각.
세크 위원들이 지휘통제실로 모였다.
오밤중에 불러냈지만,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비상 소집은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허 부사장이 물었다.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급히 구출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구출계획이요?”
세크 위원들은 긴장했다.
또 청주 쉘터와 같은 일이 벌어진 건 아닐지 염려한 것이다.
“오혜빈 사장이 행방불명인데, 위험한 곳에 있는 것 같아요.”
“아······.”
오혜빈이라는 말에 세크 위원들은 탄성 소리를 내었다. 오너일가의 일은 곧 회사의 일이다.
“제가 특임대와 함께······.”
과천 쉘터 주변으로 위급한 일이 많이 생겨서 웬만해선 나가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급했다.
캠핑장의 많은 사람 속에 오혜빈이 있을 생각을 하니······ 특히 조카 정아윤이 많이 신경 쓰였다.
“안 됩니다!”
지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 실장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회장님 가시는 건 안 됩니다.”
지혁이 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혜빈 사장님 구출 작전에는 동의하지만, 회장님 출장은 절대 반대입니다. 며칠 전에 국군과의 대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너일가의 일도 중요하지만, 수십만 명의 직원들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뒤늦게 너무 감정적으로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황 실장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쉘터 지휘부에는 회장님이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속리산이면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에 국군 일촉즉발 대치 상황을 겪으며 지휘부에는 지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평소에 지시사항을 잘 따르기만 하는 황 실장이 단호하게 말하니, 지혁은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그럼 누가 갑니까?”
수아의 등짝 스매싱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지휘부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당연히 갖고 있지만.
마땅히 보낼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가 갈게.”
오진원이 손을 들었는데.
“에이······.”
지혁은 고개를 저었고, 세크 위원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진원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뭐예요? 분위기 왜 이래? 무시하는 거야?”
“······.”
“나 할 수 있어! 오 회장이 가르쳐 준 운동 열심히 익혔거든!”
근육 하나 없는 마른 체형의 오진원을 보며, 지혁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형님,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한데.”
“······.”
“의욕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어요.”
나대지 말라는 말.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구하러 가야 한다.
깜도 안 되는 사람을 보낼 수는 없었다.
“쳇!”
뾰족한 수가 없었고, 각자 고민하느라 정적이 흐르던 중.
윤 사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직원들 경험 없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건 아는데요, 더는 회장님이 직접 나서면 안 됩니다.”
“······.”
“구미 쉘터의 영웅에게 맡겨 보는 게 어떻습니까?”
“영웅?”
“심우민 대리요.”
지혁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윤 사장은 계속 말했다.
“타고난 사람에게는 맡겨 보시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구미 쉘터 구출 작전에서 보여준 기지.
한 번뿐이며 우연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에게 왠지 믿음이 갔다.
“위험할 텐데요.”
“누가 하든 위험합니다.”
윤 사장이 심우민을 지목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잘하면 다행이고, 못 하더라도······.’
누군가 위험에 빠져야 한다면, 껄끄러운 사람이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윤 사장은 심우민을 경계하고 있었다.
“심우민······ 심우민이라······.”
지혁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보실에서 연락이 왔다.
[회장님, 정보실입니다.]
“네.”
[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보고드립니다.]
“어딘데요?”
[청주 쉘터라고 합니다.]
***
지휘통제실의 모든 사람은 눈을 번쩍 떴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청주 쉘터?’
‘추 이사 전화?’
‘여기가 어디라고······ 미친 거 아니야?’
지혁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연결하세요.”
[알겠습니다.]
치칙.
잠시 후,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서실장님, 안녕하십니까.]
“······.”
[오랜만이네요?]
지혁은 피식 웃었다.
그룹 비서실장 시절에 함께 회사생활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지혁이 어떤 위치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추 이사는 지혁을 ‘비서실장’이라 불렀다.
“오랜만은 아니죠. 얼마 전에 봤잖아요.”
[뒤통수 많이 아프셨죠?]
“약간 놀라긴 했었는데요. 뭐. 깡통 쉘터 차지하셔서······ 머지않아 스스로 기어 나올 거 아니까. 괜찮았습니다.”
지혁 또한 자극을 주려고 일부러 기분 나쁘게 말했다.
[허허.]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오혜빈 사장님이 아직 안 왔다면서요?]
흡!
지혁은 놀라서 눈이 번쩍 떠졌다.
[청주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같던데.]
지혁은 재빨리 지휘통제실에 있는 세크 위원들을 돌아봤다.
‘설마······.’
이 정도 정보까지 알고 있다면, 핵심 내부자와 접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가 꽤 아는 게 많습니다. 어떻습니까? 저희가 오 사장님 안전하게 과천 쉘터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청주 쉘터 식량창고 마스터키와 교환하시는 게.]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추 실장은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부드럽게 말 한다고 협상으로 들으면 안될텐데······]
협상이 아닌, 협박이라는 말.
추 이사는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카도 오 사장과 함께 있다면서요?]
‘하아······.’
지혁은 한숨을 쉰 후, 눈을 감고 목을 돌렸고.
뚜둑. 뚜둑.
목 여기저기서 뼈 소리가 들렸다.
“이봐, 추대웅이.”
지혁의 잠긴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무시하고 신경 안 쓰려 했는데.”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가 지휘통제실에 울렸다.
“아무래도, 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