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29. 들켜버린 관계 (1) >
‘그날’이 터지기 한 달 전쯤.
고 전무는 평소처럼 퇴근하던 길이었다.
“여어~ 고 차장!”
고 전무는 오래전 직급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추 이사님?”
두 사람은 서로 반갑게 악수했다.
“오랜만이야?”
“아, 네. 잘 지내셨어요?”
추 이사는 고 전무보다 선배다.
고 전무가 비서실 지원 팀원으로 발령받았을 때, 추 이사는 의전팀장이었다.
“고 차장이라고 불러도 되나? 난 옛날 생각나서 그렇게 부른 건데.”
“하하. 편하게 부르세요. 뭐 어떻습니까. 이제 회사 분도 아니신데.”
고 전무는 악의 없이 한 말이었으나, 추 이사는 이 말에 심기가 불편했다.
“지금 직급이 뭔데?”
“전무예요.”
“오~ 전무. 와······ 고 차장 출세했네?”
직급을 들었음에도 추 이사는 그를 ‘차장’이라고 불렀다.
“출세는요. 하하. 그냥 뭐 회사생활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고 전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아직도 여기 사는 줄은 몰랐네? 전무님 됐는데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야지?”
“살던 곳이 편해서요.”
추 이사는 은근슬쩍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서서 얘기할 게 아니라, 한 잔 어때?”
“그럴까요?”
두 사람은 가까운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고 전무는 지혁라인이지만 오종건 명예회장과 가깝게 지냈었고, 그로 인해 오 부회장인 심복인 추 이사와도 약간의 교류가 있었다.
“잔 받아.”
“네, 선배님.”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랐을 때, 추 이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오지혁이 뭐 준비한다며?”
지금까지 대화하면서 지혁의 얘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었다.
그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에도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면, 정치 얘기는 피하듯이 말이다.
“회장님 얘기는 왜 꺼내세요.”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그래도 제 앞에서 회장님을 그렇게 부르면 안 되죠.”
고 전무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존경하는 회장님의 존함을 동네 애들 부르듯 하는 건 듣기 거북했다.
“아, 그랬어? 다시 얘기할게. 오 회장 뭐 준비해?”
“준비하는 거야 많죠. 반도체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뒤에 이어진 추 이사의 말에 고 전무는 귀를 의심했다.
“재앙을 준비하는 거 같던데?”
“네?!”
고 전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냥 찔러보는 건가?’
추 이사는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자기야. 놀라는 거 너무 티 난다. 설마 했는데, 맞구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다 봤어.”
“뭘요?”
미래를 준비하는 건 ‘1급 비밀’이라 세크 위원과 쉘터장 외에 아는 사람은 없다.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회사는 떠났어도, 선도그룹에 관심이 많거든. 특히, 오지혁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
“프리미엄 아울렛을 왜 모두 지하에 지었을까? 땅값이 비싼 곳도 아닌데.”
“······.”
“아울렛에 어울리지 않는 장비들이 들어가는 것도 목격했고.”
무기 및 방공 장비 등은 철저한 경비 아래에 늦은 밤 이동시켰었다.
‘하긴······ 작정하고 관찰하면 모를 수가 없지.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추 이사의 미련도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됐든, 잡아떼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살 방도를 알려주라.”
“······.”
“방공호 같은 거 아니겠어?”
“무슨 소리십니까?!”
고 전무는 당황하여 소리 질렀고.
술집의 모든 사람이 바라봤다.
추 이사는 주변을 살피고는 웃으며 말했다.
“왜 이래. 동네방네 소문낼 셈이야?”
“자꾸 이상한 소리 하실래요?”
추 이사는 피식 웃더니, 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서로 윈윈 하자고.”
고 전무는 뭔가 싶어서 봤다가, 눈을 부릅떴다.
장 이사 아내와 함께 있는 사진이었는데.
모텔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너!”
고 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부릅뜬 눈이 덜덜 떨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추 이사는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자자, 진정하고 앉아. 난 자네의 로맨스에 관심 없어.”
주변 사람들 시선 때문에 고 전무는 자리에 앉았지만,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만 제공해 주면 돼.”
“······.”
긴말이 필요 없었다.
추 이사가 오늘 여기 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고 전무는 추 이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여자 건드리면······ 죽는다.”
***
‘그날’ 이후에도 추 이사는 고 전무에게 정보를 요청하며, 끈질기게 괴롭혔다.
고 전무도 보통 사람은 아니지만, 애인과 관련된 일이라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진짜 우리 토끼만 아니었으면, 그냥 확 뒤엎고 싶네.’
고 전무는 장 이사의 아내를 ‘토끼’라 부르는데.
그녀는 너무 가정적이라서, 고 전무를 사랑해도 가족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았다.
고 전무는 그녀의 바람대로 사랑을 은밀히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고 전무는 오혜빈의 위치 정보를 추 이사에게 제공한 뒤, 위성폰에 대고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에게 협박받은 뒤부터는 선배 취급을 안 했기에 존대는 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결정해.]
“하아······ 개새끼.”
추 이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지혁 라인은 싸가지 없어야 하는 건 필수 조건인가 봐? 선배한테 말하는 게 아주.]
“개소리 말고, 끊어라.”
추 이사는 불쾌했는지, 바로 끊지 않고 고 전무의 성질을 건드렸다.
[같은 곳에 사니까, 애인 자주 봐서 좋겠어?]
빠직.
고 전무는 이빨을 깨물고, 짓이기듯 말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저질이 됐냐?”
[저질은 너 아니야?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동료 와이프를 건드려?]
“······.”
[불륜 저지른 놈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고 전무는 큰 소리로 말했다.
“불륜 아니야! 사랑이야!”
[미친놈. 지랄하네.]
심적으로 힘들어서였을까. 고 전무는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을 추 이사에게 쏟아내었다.
“빨리 만나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을 뿐, 우린 사랑이라고. 너가 알아? 우리 사이를 아냐고?! 말 함부로 하지 마!”
[불륜 저지른 인간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라. 지저분한 거 모르고, 로맨스는······ 얼어 죽을.]
“닥쳐.”
고 전무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과 더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끊는다. 한 번만 더 내게 첩보질 요청하면, 그땐 가만 안 있을 거야.”
[허허.]
추 이사는 짧게 웃고는 말했다.
[나도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
[네 사랑 못지않게, 내 목숨도 중요하다.]
뚝.
고 전무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캠핑장 텐트 안.
추 이사는 필사적으로 얘기를 다 쏟아내었다.
살이 배인 곳이 아팠지만, 이젠 비명을 지를 기운도 없었다.
‘고 전무 비밀은 지켜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
“다 얘기했어. 이제 빨리 죽여.”
“또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젠장.”
그는 지금 너무 고통스러웠고, 진심으로 죽음만을 바랐다.
“헉. 헉. 빨리 끝내자.”
지혁은 추 이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 또한 점점 흥미가 사라지던 중이었다.
스걱-
물어보기 전에 칼질을 한번 했지만.
추 이사는 눈을 까고 부르르 떨기만 할 뿐, 기운이 없어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나한테 왜 그랬냐?”
“······.”
“혹시 권고사직? 겨우 그 때문에 청주 쉘터를 붙잡고 난리를 친 건가?”
지혁은 권고사직이 추 이사 보복의 이유라면 과하다고 생각했다.
“겨우 권고사직?”
“······.”
“그게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나?”
어차피 뒤질 거, 퇴사 당해도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살았던 지혁과는 달랐다.
“유학 중인 아들한테 돈을 못 보내게 되었고, 생활비가 부족해져서 살던 집 팔고 지방으로 이사 가야 했으며, 돈 못 벌고 집에서 짐이 되니 아내가 떠났고······.”
권고사직 이후, 추 이사의 삶은 완전히 박살났다.
선도그룹의 임원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으니, 그 갭은 클 만했다.
“넌 내 삶을 망쳐버렸어. 당연히 엿 먹일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하고 싶지 않겠나?”
지혁은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 시기가 아니었다면, 권고사직이 아니라 목숨을 끊어 놨을 텐데.’
적은 완벽히 제거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후환을 남겨 놓으면 안 된다.
“간단한 이유였네. 난 특별한 게 있을까 기대했는데.”
지혁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너 같은 사람 보면 이해가 안 돼. 누가 누구 삶을 빼앗아?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나?”
“······.”
“네가 선택한 결과잖아? 오 부회장을 추종하라고 누가 시켰나?”
맞는 말이기에, 추 이사는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
“재미없다. 원하는 얘기도 다 들었고.”
지혁은 단검을 아이스픽 자세로 고쳐잡고, 추 이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 것. 다 네가 선택한 거야.”
푹-
요골 동맥(손목의 동맥)을 칼끝으로 찍었고.
꿀럭. 꿀럭.
손목에서 피가 샘솟듯 나왔다.
“저세상 가서는 줄 잘 서길 바래.”
푹- 푹-
즉살의 급소만 피해서, 추 이사의 몸에 칼집을 내었다.
피를 다 쏟게 하여,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넌 참······ 마지막까지 독하다.”
이제야 죽겠다며 안심하고 있던 추 이사는 지혁이 하는 짓을 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지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를 여러 번 도발했잖아.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추 이사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사라질 때쯤.
“후후.”
그는 특유의 음울한 웃음소리를 흘렀다.
‘웃어?’
지혁은 그가 갈 때가 되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극도의 공포를 맞닥뜨리면, 사람이 실성하기도 하니까.
“오지혁.”
“······.”
“넌 도대체 왜 강한 거냐?”
추 이사는 정신이 나간 듯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불공평해. 아무리 애써도 결국은 이렇게 되는걸.”
헉. 헉.
숨이 끊길 듯 거칠게 호흡을 내뱉는 추 이사를 보며, 지혁은 말했다.
“내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아나?”
지혁은 ‘그 세계’에서의 삶을 떠올렸다.
“강해야만 살아남는 세상에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아남으니 강해졌을 뿐이야. 원래부터 불공평한 건 없다.”
무슨 소리인지 물어볼만도 한데, 추 이사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정말 강해지기 전까지는 발톱을 숨기고, 실력을 기르는 게 생존 방식인데. 넌 그걸 못 했어.”
“······.”
너무 조용해서, 지혁은 추 이사 얼굴 가까이 다가가 눈동자를 살폈는데.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죽었네.”
밧줄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추 이사의 몰골을 보며, 오진양을 떠올렸다.
‘누구 탓을 하겠냐. 네 선택인걸.’
가볍게 명복을 빌어주었다.
“저세상 가서는 줄 잘 서라. 이상한 놈 쫓아다니지 말고.”
지혁은 옷을 챙겨 텐트 밖으로 나오며, 다음 일을 생각했다.
‘고 전무를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