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90화 (290/301)

< 외전32. 아프다 (2) >

지혁은 취조실 한쪽 거울을 두드린 후 말했다.

“블라인드치고, 마이크 끄세요.”

지혁은 고 전무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위이잉-

거울 뒤쪽에서 블라인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 후.

픽!

마이크가 꺼지는 소리도 들렸다.

“······.”

그 후로 또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지혁은 입을 꾹 다물고 고 전무의 얼굴만 응시했으며.

고 전무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만 푹푹 쉬었다.

.

.

.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죄송합니다.”

결국, 고 전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출처는 모르지만, 지혁이 뭔가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잡아들였을 거라 생각했다.

지혁의 옆에서 15년을 넘게 보좌했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지금은 솔직해야만 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지혁의 입이 열렸다.

“추 이사에게 얘기 들었는데.”

‘추 이사’란 말이 나오자, 고 전무는 움찔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였고, 지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일까요?”

무슨 얘기를 듣고 사실이냐고 묻는지 모르지만, 죄목을 알기에 짐작할 수는 있다.

‘간통죄, 기밀누설죄.’

이와 관련된 얘기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고 전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죄목을 긍정하는 순간, 어떤 여파가 벌어질지 알기 때문이다.

“저는 진심으로 고 전무님을 대했어요.”

지혁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팀장일 때 고 전무님을 내 사람으로 받은 뒤로, 한결같이 믿어왔단 말입니다.”

“······.”

“내색은 하기 싫지만, 저 지금 많이 아픕니다.”

지혁은 무표정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칼 맞은 것보다 더 아픕니다.”

“죄송합니다.”

고 전무는 고개를 더 숙였다.

“마지막은 진실했으면 좋겠습니다.”

“······.”

“그렇지 않으면, 그간 제가 믿어왔던 고 전무님의 이미지가 다 무너질 것 같습니다.”

“······.”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실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 실망하게 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지혁의 말을 들은 뒤.

고개 숙인 고 전무는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우우-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렇게 울더니,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입니다.”

고 전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기밀을 누설했고, 동료의 아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고 전무는 고개를 연신 숙이며 말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회장님.”

“······.”

“죄송합니다.”

“······.”

“실망시켜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우우-

지혁은 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힘들다.’

구리에서 시가전 벌인 것.

손정진과 자전거 길을 질주했던 것.

속리산에서 미친놈처럼 싸웠던 것.

‘그날’ 이후 벌어진 그 어떤 참담한 순간보다도.

지혁은 지금이 가장 힘들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사람.

‘고 전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지혁의 성공과 선도그룹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

고 전무가 진정된 뒤.

지혁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했다.

“추 이사한테 어디까지 얘기했나요?”

“오 사장님 행방에 대한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선도그룹이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관련해서 말한 건 없고요?”

고 전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추 이사가 어느 정도 알고 물어보는 주제에는 답했으나, 그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요?”

“쉘터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길래, 쉘터의 의미와 언제 전개가 될 것인지, 전국 지점 위치는 알려줬습니다.”

고 전무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협박당하는 처지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선에서는 최소한의 얘기만 했습니다. 결정적이라 생각하는 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지혁은 고 전무가 한 말을 생각했다.

‘추 이사가 청주 쉘터를 차지했는데도 마스터키의 존재에 대해 몰랐고, 식량과 무기를 활용하지 못했던 걸 보면······.’

고 전무가 의지적으로 추 이사를 도운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약점을 잡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제게 터놓고 상의를 하시지.”

“다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 동료의 아내와 사랑에 빠진걸······.”

“······.”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지혁이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주제니까.

설득한다고 해서, 사랑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기밀누설 관련해서는 알겠습니다.”

“······.”

“그다음 얘기해볼까요?”

지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간통을 왜 저지른 건가요?”

‘간통’이라는 단어에서 고 전무의 표정이 불편해졌으나, 지혁이 하는 말이니 잠자코 들었다.

“함께 쉘터 규칙을 만드신 분이······ 왜 그러셨어요?”

형사상 ‘간통죄’는 폐지되었지만, 쉘터 규칙에는 ‘간통죄’가 존재하며 형벌도 높다.

쉘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가족 단위로 살아가야 하기에, 간통으로 인한 여파는 엄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혁은 ‘그 세계’에서 간통 문제로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경우를 여럿 봤다.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매우 큰 범죄였다.

***

“진심이었다는 것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이런 얘기를 하면 저를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누가 불륜이라고 한들, 저에겐 사랑이었고요.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랑엔 약도 없다더니.’

이 와중에도 사랑 타령을 하는 고 전무를 보며, 옛말 틀린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는 안 되시나요?”

“안 됩니다.”

“······.”

“미안하긴 합니다. 가족들에게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되게 당당하시네요.”

고 전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당한 게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진심이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

“정말 당당했다면, 숨기지 않았겠죠.”

“······.”

“부끄럽고 미안한 건, 사실입니다.”

지혁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고.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죄목은 알릴 겁니다.”

“······!”

“쉘터 규칙에 따라, 죄목에 따른 처벌을 진행할 겁니다.”

“회, 회장님······.”

고 전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혁은 고민을 거듭했지만,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결론내렸다.

고 전무라는 인재가 너무 아쉽고, 그와 함께 해온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전무님께서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

“저도 아프지만, 책임이라 생각하고 감수하겠습니다.”

고 전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밀누설죄와 간통죄.

이 죄목에 대한 처벌은 쉘터 규칙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

“다만······ 조금이라도 제 노고를 기억해 주신다면, 한 가지만 부탁 드려도 될까요?”

부탁을 듣고 나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최측근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말씀해 보세요. 수용할 수 있는 부탁이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고 전무는 눈물을 뚝뚝 흘리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 일이 그녀에게는 영향 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녀라면······.”

“장 이사님 아내 말입니다.”

빠직.

지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안 됩니다. 그분도 간통죄입니다.”

덜컹!

고 전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

“제가 실수는 했지만, 열심히 일했잖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성격 강한 고 전무가 맞나 싶었다.

손을 싹싹 빌면서, 눈물 콧물 짜며 말했다.

“마지막 부탁입니다. 회장님. 다 제가 꼬드겨서 벌인 일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하아······.

지혁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보았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마지막 부탁치고는 황당했다.

노고가 많았던 그의 부탁을 도저히 모른척 할 수는 없었고. 지혁은 잠시 생각한 후.

“장 이사님께 알릴게요.”

“네?!”

고 전무의 눈이 커지며 입술이 덜덜 떨렸다.

“장 이사님께 이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고,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

“간통죄를 원하면 처벌하는 거고, 묻어주기를 바라면 넘어가는 걸로.”

지혁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거였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아······.”

고 전무는 애인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겁이 났고.

“알겠습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

다음 날 아침.

지혁은 고 전무의 처벌을 준비했다.

‘장 이사가 원한 거니까.’

어젯밤 고 전무의 취조를 마친 뒤, 바로 장 이사를 찾아가서 얘기를 나눴다.

아내의 일을 전해 들은 후,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장 이사님, 어떻게 하실래요.’

‘······.’

‘참담하시겠지만, 바로 결정을 못 하시면 규칙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 이사는 한숨을 쉬고는······.

‘품고 살아가겠습니다.’

‘······.’

‘우리 가족은 아내 없으면 안 됩니다.’

‘······.’

‘제 명예만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아 달라는 말.

고 전무가 누구와 불륜을 저질렀는지는 추 이사와 지혁, 윤 사장만 알고 있다.

추 이사는 이 세상에 없으니, 두 사람만 입을 닫으면 아무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지혁은 지휘통제실에 도착하자마자, 상황 근무자에게 지시했다.

“고 전무, 쉘터 추방.”

“네?!”

“지금 방송해.”

“아, 알겠습니다.”

고 전무는 어제 취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쉘터에서 도망갈 곳도 없고.

하룻밤 정도는 가족들과 지낼 수 있도록 지혁이 배려해 준 거였다.

[고승윤 전무, 쉘터 추방!]

[고승윤 전무, 쉘터 추방!]

고 전무는 아침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다가, 쉘터 전체를 울리는 방송이 들었다.

“아빠, 뭐야?”

고 전무 또한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방송에 놀라서 당황했는데.

우르르.

경비요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고 전무의 멱살을 잡아끌고 나갔다.

“아빠! 아빠!”

옷가지 등 챙길 새도 없이, 고 전무는 덜미 잡힌 개처럼 끌려 나갔다.

“으앙~ 아빠!”

“여보!”

[고승윤 전무, 기밀누설죄 및 간통죄로 추방됩니다.]

방송에서 나오는 죄목을 들은 후, 고 전무의 아내와 딸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간통······.”

고 전무는 마구잡이로 끌려 나가느라, 얼굴도 들지 못했다.

“아악!”

그저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경비요원들에게 발로 차이고, 머리끄덩이 잡히며.

구르다시피 쉘터 정문을 향했다.

[고승윤 전무, 기밀누설죄 및 간통죄로 추방됩니다.]

어느새 쉘터민들이 모여 쫓겨나는 고 전무를 구경했는데, 지혁이 의도한거였다. 모두가 이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길 바랐다.

본능의 시대엔 원시적인 방법을 통한 교훈이 효과가 좋다고 여겼다.

“아빠! 가지 마!”

‘간통’이라는 죄목을 들었음에도, 딸은 필사적으로 고 전무를 쫓아갔다.

“나도 같이 가! 아빠 혼자 못 보내!”

추방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지금도 척박한 환경이지만, 각 국가에서 핵미사일을 언제 쏴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쉘터 밖은 사람 살기에 불가능한 세상이 된다.

“안돼, 안돼······.”

고 전무는 따라서 정문을 나서려는 딸을 막아 세웠다.

“아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아빠~! 안돼!”

경비요원은 죄인에게 인정사정없었다.

거칠게 딸의 손을 떼어내고, 발길질로 고 전무를 정문 밖으로 쫓아냈다.

[고승윤 전무, 추방 완료.]

쉘터 안에 다시 한번 방송이 울렸다.

쉘터 정문은 닫혔다.

고 전무는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걸어갔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적막한 쉘터 밖.

휘이잉-

을씨년스러운 바람 앞에, 고 전무는 잠옷 차림으로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저벅. 저벅.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지혁은 한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끝내려는 건가?’

고 전무는 긴장하여 그를 바라봤는데.

“고 전무님.”

“네.”

지혁은 잠시 고 전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 후.

들고 있던 단검을 고 전무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저 어떤 사람인지 아시죠?”

“······.”

“고 전무님 피는 손에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 정리하셨으면 합니다.”

“······.”

“그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고 전무님 가족들은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지혁은 쉘터를 향해 돌아섰다.

“회장님······.”

고 전무는 눈물을 흘리며, 지혁의 등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가슴에 칼을 꽂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