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회: 프롤로그 -- >
“크크크!”
남자의 눈은 피처럼 붉었다. 아니, 피보다 더욱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릅뜬 눈동자 속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 터져 나가는 실핏줄은 남자의 눈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 남자의 눈이 피처럼 붉은 것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지독하군요.”
길게 늘어뜨린 회색의 수염이 움찔 떨리고 있었다. 노인은 쓰게 웃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남자의 앞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남자는 파괴자였고, 절대자였다. 수천, 수만의 교도들이 남자의 말 한 마디에 생사를 달리 했다.
남자는…지배자였다.
“큭큭큭!”
기괴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눈에서만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었다. 온 몸이 붉었다. 정말 우습게도 그의 별호와 썩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혈마 강세찬!
그의 별호와 이름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혀를 핥아 올리며 입에 머금는 그 피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뭐가 그토록….”
노인은 말을 잇는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또다시 혈마가 킥킥, 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난 희생이 따랐던 반란…아니 혁명이었다. 결국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천하제일인!
얼마나 오만한 칭호던가! 하늘과 땅에서 제일이라니! 그렇지만 혈마 강세찬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오만한 말이었다.
고금제일인!!
혈마는 하늘과 땅 아래에서 무공이 생긴 이래로 단 한 명의 가장 뛰어난 인간이었다. 신선조차 죽일 수 있다고 평가받던 그였으니까.
그런 혈마가 지금은 사지가 결박된 채 온 몸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는 세지도 못할 만큼 많았고, 특히 단전이 위치한 복부는 주먹이라도 들어갈 만큼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다. 경이로운 생명력이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신선조차 죽일 수 있다던 당신을 이렇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교를 버렸습니다.”
대답을 바라는 말 같지는 않았다. 노인의 얼굴에 다시 지독하게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수만의 교도 대부분이 희생이 되었다. 단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온갖 무공과 사술을 익힌 교도들은 전부 희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단지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투입된 일반 교도들의 희생도 상상을 초월했다.
혈마로 인해 가장 크게 성세를 떨치던 배교는 다시 혈마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정파무림인들은 물론, 당장 천마교의 천마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리가 없었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노인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고금제일…악마를 잡은 것으로 만족을 하니까.”
덜컹!
“큭큭큭!”
노인이 나갔음에도 혈마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피가 쏟아지고 있는 자신의 몸이 느껴졌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실성한 듯 웃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음바라…얄바라…이왈라….”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배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던 피가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이고와 더바이!”
혈마가 마지막 말을 크게 외치자 피들이 한데 모여 혈마의 손목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피로 된 뇌우가 번쩍이는 것 같았다.
….
배교의 가장 깊은 곳. 배교의 모든 장로들과 역대 교주들의 시신이 모여 있는 곳. 그리고 고금 제일인을 유일하게 가둬 둘 수 있었던 밀실! 그 곳에서 혈마 강세찬이 처음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별호처럼 붉은 팔찌가 붉은 피를 흘리고만 있는 것 같았다.
****
“아오 젠장!”
산의 기운은 지독하게 끈적끈적 했다. 장사치 무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려는 이유였다.
그 옛날 배교의 성지라 불리던 산은 그 존재의 유무조차 확실하지 않은 혈마의 시신을 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기를 왜 올라오느냐고!”
남자는 무척이나 짜증났다. 조금 돌아가면 되지 한 번 오르면 절대로 그냥 내려가지 못한다는 산을 겨우 며 칠 일정을 당기자고 오르는 이유를 당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곳은 아무리 급해도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제는 혈산이라 불리는 이 산으로 들어 온 사람들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 높은 산도 아니건만 끊임없이 헤매고 헤매다 결국에는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하는 절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것도 거의 극소수에 불과한 생존자들의 헛소리에 의존을 했다. 그들조차 얼마 못가 시름시름 정신병과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 죽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런 산을 지금 세 명의 장사치들이 겁 없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형님,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돌아갑시다.”
“기한을 맞춰야 해. 우리 고려표국의 미래가 걸렸어.”
‘국주 한 명에 쟁자수 두 명인 있는 것이 표국인가?’ 짜증이 벌컥 났지만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자신들이었지만, 국주인 사형은 언제나 자신들을 표국에서 가장 믿을만한 표사라고 했다.
‘단 두 명밖에 없으니까. 쩝’, 함께 왔던…아니 정확하게 함께 끌려 왔던 표사들은 대부분 황실에서 끌고 가고 남은 것이라고는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조차 노역장으로 끌려갔고, 여자들은 노리개로 끌려갔지만 자신들은 그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나은 처지인 것이 분명했다.
아주 운이 좋아 표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일을 하고 있지만 싼 값에 부리는 일꾼과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고려 표국이라는 그 이름조차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고려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나라는 자신들을 버렸지만, 자신들은 그 아름다운 고향을 버린 것이 아니었으니까.
“후우!”
음산한 기운이 다시 한 번 덮쳤지만 씩씩하게 산을 오르는 두 명의 형님 덕분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응?”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끈적끈적하고 기분이 나쁜 느낌이 산 초입부터 느껴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청량한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고 있었다. 고향에 있는 백두산에 오를 때는 항상 이런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그 곳은 깨끗하고 경건한 곳이었다. 그런데 재수 없는 전설과 기괴한 사고만 일어나는 산에서 그와 비슷한 느낌이라니!
남자는 저절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형님 저거 보여요?”
남자의 말에 앞서가던 두 명의 남자 역시 시선을 돌렸다. 중턱까지는 올라왔기에 산기슭이 제법 가파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재수 없는 전설의 절벽은 아니었지만 꽤 위험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봐!”
툴툴 거리던 막내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 붉은 빛을 향해 다가가자 두 명의 남자가 얼른 말렸지만 이미 발걸음을 꽤나 옮긴 뒤였다. 그 시간의 간극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은 것 같았다.
곧 가파른 산기슭을 마치 평지처럼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는 막내를 보면서 두 명의 남자도 뒤따랐다. 가까이 다가서자 막내가 가시에 꽤나 많이 긁힌 듯 여러 상처를 드러내면서 손을 펴 보였다.
“뭐지….”
“팔찌 같은데요?”
둘째의 말에 막내도 어느새 풀린 눈에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초입부터 느끼던 음산한 느낌이 싹 가셨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로지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팔찌에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아 여기 이름…?”
막내의 말에 첫 째가 나지막하게 중얼 거렸다.
“강…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