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혈마 강세찬!
고금제일이라 불리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재였다. 아쉽게도 그 천재성을 키워 줄 부모는 지독하게도 가난했다. 아버지는 황군에 끌려가 내전에 강제로 참여해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몸을 팔면서 혈마를 키웠다.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주변의 상황이 그 천재성을 빛내 주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었다.
운명이었을까?
지나가던 배교의 장로에 의해 혈마의 운명은 송두리째 뒤틀리기 시작했다.
“윽!”
세찬의 입에서…아니, 창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찬의 입에서 얕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고 있는 세찬을 보면서 네 명의 덩치는 여전히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고, 구덩이에 묻혔는데 갑자기 흙 속에서 일직선으로 튀어 나왔다.
심장마비가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이었다. 덩치 값은 하는 모양인지 몸은 부르르 떨고 있지만 그들은 주저앉거나, 정신을 잃지는 않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고 있는 세찬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가 어떻던 세찬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법의 후유증 때문에 머리가 무척이나 아프다는 사실이 짜증나고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밀려드는 창현의 기억 때문에 아픈 머리는 마치 터질 것처럼 가득차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대법!
수백 년 전 중원을 휩쓸었던 배교의 교주…고금제일, 역대 교주들 중 가장 사술에 뛰어났던 세찬이었다.
그래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무공의 극을 이루었고, 여러 가지 사술을 자유자재로 사용 했지만 세찬은 무공의 끝이라 불리는 등선은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을 한다면 굳이 등선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빌어먹을 신선 세계에 가는 것보다 지상에서 누릴 것을 더 누리면서 사는 것이 훨씬 편안했다. 정파의 무인들은 100년이나 넘게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배교에 대항했고, 그들의 청명한 기운은 늘 뛰어난 인재를 만들어 냈다.
그런 청명한 인재들과 손속을 나누는 것도 꽤 즐거웠고, 여러 가지 향락을 즐기는 것 역시 세찬의 취미 중 하나였다. 애초에 장로들의 배신은 알고 있었다. 하늘 아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재능이 너무나 뛰어나 인간의 머리를 벗어났다는 세찬이 장로들의 반란을 모른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었으니까.
안타깝게도 그들이 준비한 것들이 세찬의 예상을 빗나갔고, 세찬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 준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세찬은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이혼대법의 일종인, 배교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수많은 사술을 합쳐 세찬이 새로 창조한 무공! 무공인지 사술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능력인지 정확하게 잣대를 들어 밀기에는 힘들지만 마지막 순간에 세찬은 자신의 팔찌에 스스로의 영혼을 가두었다.
누군가가 팔찌를 발견하고, 삶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표출한다면 그 영혼을 밀어내고 육체를 차지 할 수 있는 잔인하면서도 엄청난 사술이었다.
팔찌의 행방은 장로들도 알지 못했고, 세찬 역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을 버릇처럼 차고 다녔다는 것을 죽기 직전에 깨달았기에 사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중원으로 불리는 곳에서부터 한국의 이름 모를 야산까지 떠돈 팔찌가 창현의 손에 쥐어졌고, 창현이 삶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표출을 하면서 수백 년 전 잠들어 있던 혈마 강세찬의 영혼을 깨운 것이다.
“…대체…뭐지?”
애초에 사술을 소화 할 수 없었다면 세찬은 다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팔찌를 잡는 주인의 영혼이 너무나 강력할 경우에는 도리어 스스로가 힘만을 내어주고 정말로 죽음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육체의 주인을 밀어내고 세찬의 영혼이 그 육체에 깃든다면 당연히 본래 육체 주인의 기억과 모든 경험들이 세찬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었다. 그건 육체와의 동화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세찬이 만든 사술의 단점 중 하나였다.
그 기억과 경험을 세찬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육체의 주인과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큭!”
덩치들이 슬금슬금 창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찬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찬은 창현의 기억을 받아들이느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희대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진작 머리가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세찬이었기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기에 세찬은 그런 사술을 만들어 냈고, 또 사용한 것이지만.
“후우우우…!”
갈치를 비롯한 덩치들이 멈칫했다. 창현이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몸에 잔뜩 묻은 흙을 태연하게 털어내면서 창현이 나지막하게 중얼 거렸다.
“젠장 시간 좀 걸리겠어.”
의외로 육체 주인의 영혼이 너무나 강했기에 세찬은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혀 알 수 없는 창현의 기억들 때문에 무척 짜증이 나는 상태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어디인지, 2013년은 대체 어느 나라 기준의 시간인지…수희? 창현의 얼굴이 다시 거칠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김…수희? 뭐지?”
와락 표정을 구기며 중얼 거리는 창현의 모습은 딱 미친놈이었다. 세찬은 수희라는 이름이 기억 속에서 점점 커지자 더욱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개새끼!”
다행히 하고 있는 말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그 옛날 혈마 강세찬이 사용했던 중국어를 중얼 거리고 있다면 더욱 기괴한 모습을 연출 했을 테지만, 그 건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창현이 사용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세찬이 창현의 육체와 어느 정도 동화를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음…아주 오래 전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군. 그러나!”
세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본래 창현이라면 절대로 보이지 않았을 아주 비리기도 잔인할 정도로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흐이익!”
표정 하나만으로 갈치와 덩치들을 기겁하게 만들고 있는 세찬이었다. 그동안 전혀 보여준 적이 없던 모습이었고, 구덩이에서 갑자기 솟구쳤다는 점, 끈적끈적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까지 모두 복합적으로 덩치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창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에 묻어 있는 흙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지만 그 속으로 보이는 혈흔은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으음….”
창현이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본래 세찬이었지만 어쨌든 모습은 창현이었으니까. 육체와 어느 정도 동화가 되기는 했지만, 완전한 동화는 결코 아니었다. 본신의 힘을 발휘 하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드문드문 맞춰져 가는 기억의 조각 속에서 이 시대는 무공이라는 것 자체도 없었고, 배교라는 것은 창현의 기억 속에 아예 저장되어 있지도 않았으니까. 단지 확실한 것은…마지막 창현의 기억이었다.
“뭐 죽이지는 않을게. 그래도 네 녀석들 덕분에 이 녀석의 삶에 욕구가 강해졌으니까.”
“….”
창현의 얼굴에 다시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욤샬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동시에 창현의 입에서 기괴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쓰레기군.’, 굳이 무공을 사용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창현의 육체가 아직 무공을 감당하기 힘든 탓도 있었고, 사술은 본신의 힘보다는 정신력이 더욱 그 효과를 좌우했으니까.
본신의 힘을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찬의 사술 능력도 있었고, 창현에 정신력이 가벼운 사술 정도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기에 덩치에게 육체적인 보복을 하는 것보다는 그저 가벼운 사술 정도만 걸어도 충분했다.
“이욜칭!”
창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주문이 끝이 나자 덩치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갈치의 입에서는 침까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혀를 차며 중얼 거렸다.
“정말 쓰레기들이군. 이 시대는 참 이상한 시대야.”
아주 흔해빠진 사술, 아니 사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술법이었다. 일종의 최면에 불과 했으니까. 창현은 갈치와 덩치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부르르 몸을 떠는 그들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 하려는 것 같았다.
‘본래 한 번 보면 잊지 않지만…이 육체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니까.’, 배교 장로들에 대한 복수는 창현의 기억을 받아들일 때부터 물이 건너갔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세찬이라도 썩어 문드러진 수백년 전의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럼 일단은…이 녀석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
더 이상 덩치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창현은 무심한 표정으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에 경수의 존재도 있었지만 굳이 찾는 수고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태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나중에 응징을 해도 늦지가 않으니까.
“일단 이 몸에게 손을 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본래 창현이었지만 세찬은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배교 장로들에게 할 복수를 이 녀석들에게 하면 그만이었다.
몸부터 완전히 회복을 한 뒤에.
“잔망한 계집도 하나 있군.”
되살아 난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움켜쥐고 있던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 보던 창현이 대충 팔에 돌돌 감은 이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중원을 지배했던 무자비한 폭군 혈마 강세찬의 부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