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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 현대 재림기-10화 (10/170)

< -- 10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씻고 나오자 제법 구수한 냄새가 집 안에 번지고 있었다. 문 앞에는 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속옷도 있었다. 시키지 않은 짓도 잘 하는 수희인데 나는 왜 그렇게 모시고 살았던 것일까? 아무래도 본래 나와는 다른 너무나도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변해버린 수희가 자신의 탓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 이제는 상관없지.”

대충 옷을 걸쳐 입었다. 무척이나 입기기 힘들었지만 기억을 의존해 손을 넣었고, 발을 넣자 금방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팬티라는 것은 아주 편안했다. 욕실에 붙어 있었던 변기라는 물건도 무척 신기했다.

여러 가지로 그 시대보다 편리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럼 먹지.”

늘 최고급 음식만 먹던 나였지만 지금 그 것을 바랄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리어 점점 몸과 동화를 하면서 현실이 밀어 닥치고 있었다. 눈앞에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수희를 대학도 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를 한 군데라도 학원이라는 곳도 보내야 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사줘야 한다.

“천하의 혈마가 금덩어리 따위를 생각 하다니.”

“무슨 소리야?”

내 중얼거림이 작았기에 수희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전혀 먹지 않고 내 눈치만 여전히 보고 있었다.

“왜 안 먹어? 배고프다고 그 생지랄을 다 해 놓고.”

“…뭐?”

내 말투도 확실히 조금 변했다. 녀석의 본래 말투와 내 말투가 조금씩 섞여드는 느낌이었다.

“마, 맛있어?”

“…뭐가?”

“맛있냐고 멍청아!”

냉장고? 라고 추정되는 물건에서 그냥 전부 꺼내온 것이 분명했다. 내가 늘 밑반찬은 물론, 공부한다고 수희의 체력을 위해 이 것 저것 만들어 놓은 것도 많았고, 항상 밥도 내가 전부 다 했었으니까. 지금 이 식탁이라는 탁상에 놓여 있는 음식들 전부가 내가 만든 것이었다.

수희가 한 것이라곤 오로지 밥 밖에 없었다. 그 밥도 그냥 빨간색 전기밥솥이 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대답은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다 만들었으니 당연히 맛있지.”

“밥, 내가 했어!!”

“근데?”

“밥, 내가 했다니까?”

“그래서.”

“아니…이 멍청이가!!!”

“오빠.”

살짝 눈을 치켜뜨고 무뚝뚝한 어투로 말하자 수희가 다시 움찔 몸을 떨었다. 확실하게 알려줘야 했다. 내가 오빠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건 전의 내가 무척이나 바라던 것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수희가 살갑게 오빠라고 불러주는 것을 너무나도 바랬다. 이제는 완전히 가족인데, 어째서 그 쉬운 말을 하지 않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그저 부모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자신이 잘 보살피지 못해 착하던 수희가 변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렇지만 꼭 그 때처럼 수희와 다정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왜 네가 내 오빠야!”

“당연히 내가 오빠니까.”

“엄마도 다르고! 아빠도 다르고!”

“결혼하셨잖아 부모님.”

“….”

그 말에 수희가 잠시 침묵했다.

“성도 달라 멍청아!!”

그건 그랬다. 김수희, 강창현. 아버지가 달랐으니 성도 달랐고, 어머니가 달랐으니 부모님 중 한 분이 같은 이복남매도 아니었다. 그냥 완전히 남남이었다. 수희 말은 어쩌면 맞았다. 오빠가 아니다. 법? 이 시대의 나라가 정한 법이라는 틀 안에서도 나와 수희는 남매가 아니었다. 그냥 동거인 정도가 적당했다. 그저 사람들이 모두 남매라고 알고 있고, 나 역시 남매라고 굳게 믿고 있다.

부모님이 수희를 부탁했던 것 역시 절대 잊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오빠라고 불러라.”

“…시, 싫어.”

그 것만은 양보 할 수 없다는 듯 수희가 수저를 놓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또다시 큰 눈에 물기가 서렸다. 마음이 약해졌다. 역시 녀석과 점점 동화되고 있다. 난 깊게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이건 본래의 나와 녀석의 타협안이다. 계집애에게 반말을 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빠라고 부르지 마. 그럼 대신 앞으로 높임말을 쓰도록 해.”

“…뭐라고? 나보고 존댓말 하라고?”

“싫으면 오빠라고 불러라.”

수희는 대답 대신 수저를 들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얼굴 근육을 비틀며 웃으려 했지만 잘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거울을 볼 수 없었으니까. 잠시 수희가 그런 내 표정에 아, 하고 탄성을 내뱉은 뒤 갑작스레 얼굴을 붉혔다. 별 희한 여자를 다 보겠다는 생각에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꽤 배가 고팠다.

“…오늘은 알바랑 일 안 가…요?”

“갈 생각이야.”

“…몸이 별로 안 좋은….”

창현은 고개를 다시 저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단지 조금은 변해야 한다고 느낀 거지.”

그 중 하나가 기세를 뿜어내는 것이었고, 그 것은 수희에게 확실히 어색함을 덜어 주었다. 내가 변하기는 했지만, 내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그동안은 거의 짓지 않았던 이질적인 표정들까지도 기세와 어우러져 오히려 수희를 압도해 버렸으니까. 단지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것이 수희에게는 문제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동화가 빨리 진행 될수록 어색함은 사라질 것이다.

“공부해라. 조만간 학원도 한 군데 다니고. 남들은 다 다닌다고 하더군.”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요.”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리고 네가가 아니라 오빠.”

“….”

수희는 끝내 오빠라는 말은 하지 않고 수저를 놓고 일어서는 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주방을 나가는 창현을 향해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해 놓으라고 앙칼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싹싹 비워져 있는 밥그릇을 보고 창현의 앞에서는 부모님이 결혼 소식을 알린 이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배시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

“후우!”

수희를 한 군데라도 학원을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그 것은 기억 속에 남겨져 있는 사실이었고, 결심이었다. 교에 들어간 이후 돈이라는 것에 단 한 번도 모자람이 없었기에 이건 분명 생소한 기분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돈의 존재였고, 그 것의 위력이었다.

내가 살던 시절보다 좀 더 그 돈이라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 듯 싶었다. 그 때도 돈을 버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와 같은 무인…아니지, 난 무인이 아니라 거의 무신이었으니…하여튼, 무공을 익히는 사람들 즉 무림에서 사는 사람들 역시 당연히 돈이 있어야 했다. 도사 놈들은 부적을 팔기도 했고, 후원을 받았다. 배교 역시 교도들이 내는 성금과 더불어 여러 가지 지원들이 있었다.

청렴함을 표방하는 소림의 땡중들 역시 부처에게 내는 공양이라며 돈을 받았다.

그런 것을 보면 역시 돈이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 있어서 필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희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 수희는 어렸을 땐 제법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지만, 녀석의 아버지와 수희의 어머니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알린 이후 그리고 곧바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방황’ 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출세의 가장 편한 길 같은데 감정 하나 제대로 누르지 못해서 그 쉬운 학문의 길조차 제대로 밟지 못하고 있다니.”

난 혀를 찼다. 학문이라는 것은 배움을 청하는 것보다 스스로 익힌 적이 많았기에 수희를 학원이라는 기관에 보내는 것 자체를 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분명 그 결심이 남아 있었고, 지금의 나에게까지 그 결심은 영향을 미쳤다.

“일이라는 것을 꽤 많이 해서 속은 썩어 가고 있는데 근력이 제법 붙은 것인가 보군.”

외공을 전문적으로 익힌 무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 몸은 허약한 체질과 얇은 팔 다리 치고는 어느 정도 근력이 있는 편이었다. 그 것은 나에게 꽤 도움이 되었다.

“그럼, 그 잔망스러운 계집을 이용해 볼까?”

복수도 할 겸, 귀력이 10년도 안 되는 잡귀들을 이용할 만큼의 내공도 쌓을 겸 나는 그 여자에게 일종의 흡정대법을 펼치기로 했다. 이 몸이 동정이라는 것도 흡정대법을 사용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옷으로 짐작되는 천들을 대충 몸에 걸쳤다. 확실히 내가 살던 곳보다 훨씬 미래라 그런 지 여러 가지 생활 편의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지금의 시절이 좋았다. 이렇게 얇은 재질의 옷은 나 역시 처음 보는 것이니까. 신축성도 상당히 좋은 것 같았다.

“폼은 별로 나지 않지만.”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검은색 옷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방에는 좀처럼 검은색 옷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뭐 그런 것이 나중에 차차 준비하면 되니 나는 방을 나섰다. 여전히 주방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는 수희의 모습이 보였다.

“나갔다 올게.”

“…일 가…요?”

피식 미소가 새어 나왔다. 수희가 보고 있는 내가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점점 동화 돼가고 있다. 난 이 대법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그 영혼과 육체의 동화라고 생각했다. 혈마 강세찬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던 강창현의 만남, 그리고 그 둘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 육체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하나가 되어간다.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난 둘 중 누구라고 딱히 단정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당장 지금만 해도 계집에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응.”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오늘 무엇인가 내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고, 그녀 역시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했기에, 그녀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무척 궁금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관계 없었다. 나는 나고, 지금의 나는 강창현이다. 그건 변하는 것이 아니었고, 수희가 동생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날의 강창현과는 다르게 수희가 무슨 결론을 내리던 나는 내가 받으려는 대접을 확실히 받으려고 할 것이다.

오빠른 호칭부터.

내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짧게 인사를 남겼다.

“문 잠그고 조심해서 자라. 그리고 공부 좀 하고. 모의…고사? 이번에 잘 받아오면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거 하나 사줄게.”

예전이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수희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조건도 걸지 않았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가지고 싶은 거…요?”

“응.”

대충 신발을 구겨 신었다. 음, 신발은 좀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막상 발이 전부 들어가니 그렇지도 않았다. 등 뒤로 수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가지고 싶은 거 말고…부탁…하나 들어줘…요.”

“좋을대로. 대신 지난 번 모의고사? 대체 이 나라에는 몇 번의 시험이 있는거야?”

기억 속에 지식들이 섞이고 있다는 사실에 난 잠깐 짜증이 났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여튼 지난 번 모의고사보다 20점 이상 올라야 해.”

“그, 그건!”

수희의 말을 뒤로하고 난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달이 휘황찬란하게 떠 있었다. 이 나라의 기후는 상당히 더운 듯 했다. 나중에 지도라도 한 번 봐야겠다. 이 나라가 정확히 내가 살던 시절에는 어떤 나라였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녀석의 기억 속에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잔망스러운 년을 만나러 가 볼까?”

이 녀석이 일을 하고 있는 기루 비슷한 곳에서 함께 일 하는 여자였다. 몸을 한 번 점검 해 보았고, 역시 흡정대법 정도는 충분히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흡정대법은 아니었기에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시대에 살인은 용서 할 수 없는 행위인 것 같았다. 날 죽이러 한 녀석들도 있긴 했지만.

“…생각 해 보니 꽤 오래 되었잖아?”

여자와 동침을 한 지도 제법 오래 ㅤㄷㅚㅆ다는 생각에 난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게 일석이조인가?”

도처에 깔려 있는 잡귀들을 헤치고 힘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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