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오늘 모의고사야!”
“그래?”
창현의 심드렁한 대답에 수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민식은 눈치만 보았고, 민정은 아예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민정의 동태가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창현을 믿었기에 걱정을 접기로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은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희가 아예 기본도 없는 학생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준비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창현이 딱 정해 놓은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르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했어?”
“그래.”
창현의 간결한 대답에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지난 번 시험을 개판 쳤기 때문에 제대로 풀기만 해도 모의고사 점수는 당연히 오를 것이다. 거기에 준비까지 했으니 점수가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보았다.
배시시 미소를 짓는 수희를 보면서 창현이 살짝 눈을 흘겼다.
“계집.”
“왜 오빠?”
이제는 계집이라는 소리와 오빠라는 단어가 익숙한지 수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하나 깨달을 수 있었다.
“근데, 오빠…뭔가 되게 달라졌다?”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창현의 달라진 모습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의 말은 애써 삼켰다. 매끄러운 피부와 현묘한 빛이 흘러나오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또다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창현을 보면서 수희가 붉게 볼을 물들였다.
‘점점 멋있어지고 있잖아?’
벅벅 긁는 배에도 언뜻 근육이 보였고, 반팔 밑으로 자리한 팔뚝도 꽤 굵어졌다. 삐적 마른 몸매의 창현이었기에 그 변화는 놀랍다는 생각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운동했어?”
갑작스런 운동으로 펌핑이 되었다 하더라도 저 정도는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에 물었지만 창현은 여전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숨겨졌던 것을 드러낸 것뿐이야. 학교나 가라.”
창현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환골탈태가 신체를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베이스가 없으면 환골탈태를 하더라도 지금의 창현처럼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노폐물과 운동부족 그리고 내공의 유무와 선천지기가 담겨져 있는 그릇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졌기에 급격하게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분위기가 달라졌고, 곧바로 느낄 수 있었지만 수희는 오늘 시험이라는 생각에 잠시 창현을 바라보는 듯 마는 듯 했기에 바로 느끼지는 못했던 것이다. 심드렁한 창현의 태도에 그제야 그를 제대로 바라 본 이후 곧바로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고, 창현의 대답은 여전히 비슷한 것이었다.
“알겠어…그리고 그 공책은 뭐야?”
책가방을 챙기다가 책상에 놓여 있는 공책을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던 것이 기억났다. 예쁜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설명을 달아 놓았으니 읽어보고 익혀라. 꽤 도움이 될 테니까. 내가 없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호신술 하나 정도는 알아둬야지.”
백보신권!
아무리 소림사가 백보신권을 등한시 했다고는 하지만, 달마가 창조 하였고 소림의 천재들이 모여 수정했다. 그리고 그 수정을 한 백보신권에서 또다시 창현이 손을 보았고, 훨씬 더 발전을 했다.
내공이 없어도 삼류에서 이류를 넘어가는 고수까지 오로지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 할 수 있는 백보신권을 창현은 간단한 호신술이라 말 하고 있었다.
수희야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수희는 창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위험한 동네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당장 학교만 가도 거친 아이들로 가득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창현이 24시간 붙어 지내며 지켜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치근대는 남자들이 언제 나쁜 마음을 먹을지 몰랐다.
이 동네는…그런 곳이니까.
“틈틈이 읽어 보고 따라 해 보면서 모르면 물어봐도 되지?”
“그렇게까지 그려놓고 설명도 달아 놨는데 모르면 계집 네 머리가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
수희는 볼을 부풀렸지만, 이내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현관으로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오빠!”
학교로 가는 수희의 발걸음을 가벼웠다. 오늘도 여전히 거리를 지나치는 남자들이 힐끔 거렸고, 유흥가 쪽에서 나오는 덩치들이 슬금슬금 접근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보란 듯 큰 거리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장 동네이기는 하지만 큰 거리 쪽에는 파출소도 하나 있고, 제법 아침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도 끝가지 쫓아오지는 못했다.
대부분 자신이 그들을 의식했다는 것을 느끼면 떨어져 나가기는 하지만, 가끔 학교 근처까지 쫓아오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수희는 그동안 그런 남자들 때문에 무척이나 불편했고, 불안했다. 민식과 친해진 이후, 정확하게는 민정과 민식 패거리가 수희를 끌고 다니던 때는 가끔 민식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집 근처까지 왔기에 그런 남자들의 접근은 막을 수 있었다.
수희는 그런 호위 따위야 전혀 고맙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는 오빠가 있으니까.’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에 수희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 있을 시험을 잘 치르고 창현에게 무엇을 부탁 할 까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결정했다. 이미 정해 놓은 것이 있지만 그 것보다 더 좋은 부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저절로 볼이 물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히히, 웃으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안녕?”
그렇게 학교 정문에 도착하자 밝게 인사를 건네는 담임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침부터 얼굴이 밝네.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뇨, 그냥 오늘 일찍 끝나서….”
모의고사라고는 하지만 이 학교에서 시험을 제대로 보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라면 모의고사 이후 야간 자율 학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수희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명목상 자율 학습이 있을 뿐, 실제로 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렇구나! 성적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며칠 동안 열심히 준비하는 것 같더라. 오늘은 꼭 잘 보렴.”
“…네, 선생님.”
3학년 담임선생님이라고 하기에 그녀는 학생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반 고등학교라면 한창 진학 상담이다, 성적이 어떻다, 학생과는 물론 부모님과와의 상담으로도 상당히 바쁠 시기이다.
꼴통 학교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선생들조차 대부분 포기를 한 상태였고, 학생들 역시 졸업이나 하자, 라는 심정이 대부분이었기에 수희 학교의 진학률은 경기도 인문계 고등학교들 중 최저를 기록하고 있었다.
어쨌든, 갑작스레 자상한 선생님의 모습에 수희는 머뭇거리며 대답했지만, 딱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요 일주일 동안 이것저것 신경을 써 주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선생님이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모의고사 끝나고, 집에서 가서 가채점 해보고 혹시 모르는 것 있으면 전화해.”
언어야 자신 있는 수희였지만, 선생님 그 것도 담임 선생님의 호의를 거절하기는 어려웠기에 수희는 교실 뒷문을 드르륵 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그럼 시험 잘 봐!”
손까지 흔들며 교무실로 향하는 그녀를 보면서 수희는 이제 완전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나쁠 것은 없기에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녀가 간간히 자신에게 딴죽을 잘 건다는 것도 생각이 났지만 굳이 그런 것을 일일이 계산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담임이었으니까.
젊은 처녀 선생이 이 꼴통 고등학교에서 더러운 소문 하나 없이 버티고 있다는 것도 어느 면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뭐 상관없어.”
“오셨습니까, 누님.”
혼잣말에 대답하는 종환을 보면서 수희가 살짝 놀랐다.
“아,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리려고요! 형님은 잘 계시죠?”
“…돌아가.”
민식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종환의 어쭙잖은 모습에 민정이 뒷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코웃음을 쳤다.
“이제는 지 몸종을 교실에까지 들이 내?”
민정의 비웃음에 종환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선배,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네요.”
이곳은 3학년 교실. 그리고 종환은 1학년이다. 하지만 종환의 말에 다른 학생들은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창현이 그 날 교문에서 개판을 치고 돌아갔고, 당연히 그에 따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수밖에 없었다.
워낙 폭력 사건이 일상화 된 곳이기에 종환의 일방적인 패배는 물론, 그 패거리조차 한 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꽤 큰 뉴스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민식까지 개 박살 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희는 학교 내에서는 강력한 방패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민식과 종환이 가장 잘 친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이고 그 둘을 창현이 밟아 버렸으니, 그 동생인 수희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민식 패거리 중 유일하게 민정만이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동안 수희를 무시하던 여학생들이 괜히 친한 척을 하거나, 치근거리던 남학생들이 자제를 하는 것 역시 이미 정해진 변화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변한 것은 종환의 태도였다.
“미쳤어 너?”
민정은 기가 찼다. 그 날 종환이 창현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보고 잘 친다는 소문과는 다르게 야비한 면을 느낄 수 있었다. 강자에게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는 그런 모습!
하지만 그런 모습은 민정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 2학년 때만 하더라도 창현이 조폭들과 같이 생활한다는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수희에게 살갑게 군것은 민정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어쨌든 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직 오빠들에게 연락은 없었지만 조만간 만난다면 창현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으…또 배가 아프네.’
그 날 이후 이상하게 아랫배가 저리고 화장실이 자주 가고 싶었지만 민정은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여기 3학년 교실이야. 너 1학년이고. 선배가 좆같아?”
“좀 좆같은 선배도 몇 명 있습니다만?”
종환의 얼굴에도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힘의 우위가 누구에게 있는 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민정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알았다.
그럼에도 종환은 스스로 창현을 ‘선택’ 했다고 믿었다.
“이 새끼가!”
민정이 자리를 박찼다.
“어디서 냄새 나네 오줌 냄새.”
“….”
쿡쿡, 웃는 종환의 모습에서 민정은 그 날의 일이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스치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말을 더듬는 민정을 보며 종환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까지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만해. 그리고 너 아침마다 찾아오지 마.”
“…아! 불편하시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누님. 그럼!”
민정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르게 꾸벅 허리를 숙여가며 예의를 표하는 종환의 모습에서 민정은 더욱 큰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마디 쏘아 붙이려고 했지만 때 마침 앞문이 열리며 선생이 들어왔다.
“그 뒤에는 뭐 하느라 서 있니?”
민정과 수희가 자리를 잡았고, 여선생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모의고사이지? 다들 너무 잠만 자지 말고 한 문제라도 풀어 봐!”
오전 8시 40분, 수희는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민정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준비 해 놓은 필기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오늘이 끝나고 창현에게 부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저 쌍년이….”
이를 가는 민정에겐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